모든 것이 경쟁에 쓸 무기가 되는 한국에서 자원봉사도 예외는 아니다. 대입을 위해 봉사 활동 점수를 쌓았던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면 스펙(specification)을 위해 해외 자원봉사에 눈을 돌린다. 취업 후엔? 밥 먹듯 야근하는 생활과 길어야 1년에 1주일인 짧은 휴가를 보내며 독하게 마음먹지 않는 한 자원봉사에 쉽게 도전하기 힘들다.
이런 팍팍한 삶 속에서 탈출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서일까. 서점에 가보면 가장 인기 있는 코너 중 하나가 바로 여행서 코너다. 해외여행 경비가 저렴해지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들과 다른 여행에 나서는 이들의 이야기는 인기리에 팔려나간다.
스펙도 아닌, 상품도 아닌 자원봉사와 여행 문화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걸까. 물론, 요즘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며 가방을 메고 떠나는 '여행족'도 나타나고, 공정 여행이나 '착한 여행'에 나서는 이들도 늘고 있지만, 아직 소수다. 그래서 팸 그라우트의 <특별한 자원봉사 여행 100>(최지아 옮김, 동시대 펴냄)이 다소 낯설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라다크에서 농사를 돕고, 지중해에서 바다표범을 구하고…
새로운 일을 찾고 있거나,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책의 목차만 살펴봐도 가슴이 뛸 것이다.
▲ <특별한 자원봉사 여행 100>(팸 그라우트 지음, 최지아 옮김, 동시대 펴냄). ⓒ동시대 |
해외 자원봉사라고 하면 오지에 가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돕거나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책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빈민을 상대로 하는 활동은 물론 북미와 유럽에서 하는 프로그램도 소개되어 있다. 문화 유적을 복원하거나 생태계 보호처럼 주제도 다양하다. 한편, 버마(미얀마) 국경을 넘나들며 버마 사람을 돕는, 다소 위험한 활동도 소개한다.
저자는 대륙별로 지역을 구분해 A4 1장 분량의 설명으로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활동을 주관하는 단체의 주소, 전화번호, 홈페이지 주소도 나와 있어 관심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해볼 수도 있다. 단, 대부분 소개된 단체와 담당자가 영어를 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 2008년에 원서가 출판됐기 때문에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지역도 있을 것이다.
영어가 장벽? 쉬운 것부터 도전해보라
문제는 '활용 가능성'이다. 이 책의 원서는 미국 독자를 염두에 두고 만든 책이다. 자원봉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지고, 휴가 기간이 긴 미국에서는 좀 더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내용이 많지만, 한 주를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일반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부담이 된다.
또 해외 자원봉사에 처음 나서는 이들에게 이 책은 제안은 버겁다. 우선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어서 프로그램 설명은 한국어이지만, 연락부터 참여까지 모두 영어 또는 외국어로 진행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출판사가 좀 더 세심한 배려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한국에서 연락할 수 있는 단체, 기관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다면 한국 독자에게 더 유용한 안내서가 됐을 테니까.
이런 점이 아쉬운 독자들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펴낸 <자원 활동은 자원봉사가 아니다>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제 자원 활동 실무를 오랜 기간 맡아온 필자들이 펴낸 이 책은 국내에서 연락할 수 있는 정보와 함께 국제 자원 활동에 관한 고민과 주의 사항을 담고 있어서 자원 활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유용하다.
또 해외 자원봉사가 익숙하지 않거나 외국어에 자신이 없다면 세계 곳곳에서 약 2주간 열리며, 다양한 국적의 청년이 모여 숙식을 함께 하며 자원 활동을 벌이는 워크캠프(work camp)를 추천한다. 이름 그대로 많은 워크캠프는 언어 능력보다 '육체' 노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국적의 또래들과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외국어에도 익숙해진다.
한편, 당장 이 책은 당장 자원봉사에 참여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도움을 줄 듯하다. 미래에 국제 자원 활동을 꿈꾸고 있다면, 스스로 자원 활동을 조직할 생각이 있다면, 보다 현실적이고 지역적인 국제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에 나온 다양한 조직과 프로그램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자원 활동은 공짜? "No"
"믿음을 가지세요. 사람들에 대해, 자신에 대해 믿으세요. 자신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을 하세요.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자원, 돈, 지원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될 테니까요."
싱가포르에서 테크놀로지 기업 임원으로 일하면서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는 라이 탄은 '무엇에 어떻게 헌신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이밖에도 <특별한 자원봉사 여행 100>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자원봉사를 참가했던 수기와 인터뷰가 함께 실려 있다.
탄의 말도 맞다. 그러나 이 책에 있는 많은 수의 자원봉사 활동은 참가비가 있고, 꽤 비싸기까지 하다. 책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휴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활동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이런 내용은 '자원봉사=공짜'라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은 거부감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상당수 사람들이 며칠간의 해외여행에서 리조트와 외식에 아낌없이 돈을 쓰지 않나? 이런 비용을 염두에 두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자원봉사 참가비는 그리 비싸지 않다. 또 참가비는 자원봉사가 진행되는 지역 사회에 보탬이 되는 기금으로도 쓰이는 경우가 많으니 무조건 거부감을 가질 일은 아니다.
만약 주머니는 가볍지만, 꼭 해보고 싶은 활동이 있다면 책에 나와 있는 '자원봉사 비용 마련하기'에 실린 내용처럼 직접 마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금 모금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후원자를 모으는 편지 쓰기, 지역 매체 연락하기 등의 방법이 그것이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함께 바자회를 열거나 캠페인을 벌여 비용도 마련하고, 자신이 관심이 가지는 이슈를 알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보다 긴 휴가와 여유
"자원봉사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재미난 일이 벌어진다. 정작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원봉사는 영혼을 충만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인간애와 다시 연결시켜줍니다. 타인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도록 해주는 최고의 존재입니다. 저는 늘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되돌려 받곤 합니다."
굳이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아도 자원봉사에 참여해본 이들은 안다. 자원봉사가 어떤 걸 가져다주는지.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는 자원 활동은 분명 스펙보다 더 큰 자산을 쌓게 해준다. 경험한 이들이 다소 비싼 참가비를 내고도 다시 참가하고, '자원봉사'가 아닌 '자원 활동'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얼마 전 한국 청소년의 '더불어 살기' 능력이 세계 최하위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경쟁을 교육하는 환경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10여 년 전부터 해외 자원봉사 열풍이 불고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불어 닥친 취업난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비야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유엔(UN) 사무총장 반기문처럼 되고 싶다는 청소년이 늘어나는 현상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정부는 해외 자원봉사마저도 숫자로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 박대원은 "2013년에는 2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해외로 나갈 것"이라며 "세계 최대 규모"라고 홍보한다. 그러나 선심성으로, 태극기를 앞세워 나서는 자원봉사가 참가자와 한국 정부에 과연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자원봉사 경쟁'이 아니라 자원봉사에 눈을 돌릴 수 있도록 하는 충분한 휴가와 여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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