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박시백 화백입니다!
박인규 : 어제에 이어서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전기의 많은 사실 중에 정사와는 다른 기록들이 많다고 하셨는데,그 중 하나 제가 관심있었던 게 세종대왕의 가장 큰 치적으로 훈민정음, 한글창제를 꼽는데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신숙주라든가 성삼문이라든가 집현전 학사들이 세종대왕을 도와서 한글을 만들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박시백 화백의 만화에선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세종대왕 혼자, 아니면 왕자들이 도왔을까, 혼자 한 작업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박시백 : 이건 그 당시 정황을 바라봤을 때 일단 당시 사대부들이 갖고 있었던 사고 자체가 뒤에 최만리의 반대상소로 유명한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최만리의 반대상소의 주요 골자가 뭐냐면, 새로운 자기만의 글을 갖는 것들은 오랑캐만이 하는 짓이다라는 거거든요. 거란이나 일본, 이런 데나 자기 문자를 갖고 있는 거지 우리는 소중화이기 때문에 한자를 쓰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린 흔히 최만리의 반대상소 때문에 최만리가 마치 당시 보수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최만리는 당시 집현전을 대표하는 학자였어요. 누구보다도 집현전에 오래 있었고 심지어는 훈민정음 창제 직전 한 3년 넘는 기간 동안 집현전을 총괄하는 부재학이란 자리에 있었습니다.
집현전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거대한 기구가 아니라 작게는 열몇명에서부터 최고로 많을 때도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도의 기관이고. 내부의 각 관원들은 각 팀별로 자치통감 해설을 맡고 있는 팀, 내지는 농사직설을 담당하는 팀, 이런 식으로 분업화가 돼 있어요. 더더구나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많이 활용한 게, 모든 새로운 어떤 사안이 생기게 되면 이것에 대해 과연 전례가 있는지 집현전 학자들에게 상고를 해보라고 합니다. 과거에 그런 일들이 있는지 기록들을 다 뒤져서 확인해 봐라 이런 얘긴데요, 이런 것들 때문에 독자적으로 집현전 일을 다 하면서 비밀리에 어떤 팀에 가담해서 한글창제 작업을 한다는 것 자체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오히려 가장 그 당시 신진사대부를 대표하는 이런 학자가 최만리였고, 그가 반대상소를 냈던 것으로 봐서 적어도 집현전이 한글 창제에 가담한 것은 아니다.
박인규 : 집현전을 통해서 공식적 공개적으로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박시백 : 네. 공식적으로는 하기는 특히나 어려웠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종대왕이 어찌 보면 비밀리에 작업한 게 아니겠는가라는 판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박인규 : 실제로 실록에는 한글 창제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까?
박시백 : 처음에 바로 창제가 됐다고 하는 그 날 한 줄 딱 나옵니다. 오늘 상께서 친히 새로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셨다. 이렇게 나오고 그 이후에 한 2주 정도 지났나요? 그런 다음에 세종이 뭔가를 언문을 가지고 번역하라는 명을 내리니까 집현전 학자들한테, 그때 바로 최만리 등이 반대상소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아마 이게 대체 뭔가를 연구하는 신하들이 이게 대체 어떤 거지, 하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간이었다고 생각되는데요
박인규 : 신하들은 전혀 몰랐고.
박시백 : 예. 그래서 반대상소가 나오는데 세종이 굉장히 강경하게, 탄압이라면 좀 심하고 하여튼 바로 투옥했다, 하옥을 시켰다가 직에서 내쫓아 버리거든요.
박인규 : 저희가 고등학교 때나 이런 때는 신숙주가 음운학에 굉장히 밝아서 세종대왕이 신숙주를 중국으로 보내서 베워왔고,
박시백 : 맞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우선 백성들이 자기 뜻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글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 이것이 첫 번째였다면 또 한 가지는 한자음을 통일하는 거였거든요. 이를테면 우리가 하늘 천 하면 천자로 다 읽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이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천, 텬, 여러 가지로 읽히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가급적이면 한자음을 중국 원음에 가깝게 읽는 것이 옳다는 판단하에서 이런 한글의 필요성이 제기됐던 것이고. 또한 신하들도 최만리의 반대 이후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런 필요성에 공감했던 것 아닌가. 그래서 이후에 정인지 등에게 맡겨서 훈민정음 해설서를 작성하게 하는데 이때 신숙주나 성삼문이 함께 하고요. 말씀하신 대로 동국정운을 연구하기 위해서 요동에 당시 중국의 유명한 언어학자가 유배와 있었다고 해요. 이 사람을 찾아가서 공부하고 이러는데 이건 다 창제한 이후의 일들이거든요.
박인규 : 그 말씀대로라면 적어도 훈민정음 창제까지는 집현전 학사들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세종대왕 거의 단독으로 했다는 건데 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네요.
박시백 : 이미 이런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꽤 있으시고 예전에 기사로도 봤던 것 같은데요.
박인규 : 또 하나 다른 얘긴데, 황희 정승 하면 조선시대의 가장 명재상. 십수년이나 영의정을 하고 그런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른 건 다 능력있는지 몰라도 적어도 청렴결백하진 않았다. 맞습니까?
박시백 : 제 책을 읽고 사람들이 가장 많은 놀라움을 표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황희 관련한 묘사였는데요. 사실 저도 굉장히 놀랐죠. 우리가 횡희에 대해선 누구나 다 몇몇 일화들은 다 알고 있는데요
박인규 : 청렴결백하고, 너도 옳다 너도 옳다, 부인도 옳다, 이런 말씀 하신 거
박시백 : 그런데 실제 실록에 보면 황희 정승이 청렴과 거리가 먼, 부정부패와 관련된 뇌물을 받고 청탁을 한다거나. 또는 국유지로 개간한 땅을 사유지로 점유한다거나. 또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 자기 사위가 지방을 가다가 지방에 있는 아전이 인사를 안 한다고 불러다가 혼쭐을 내준다는 게 그만 죽고 말았어요. 아차 싶어서 뒷수습을 하려는데 황희가 얘길 듣고는 같은 고향 출신인 맹사성을 통해서 이 사건을 덮어버리거든요.
박인규 : 청탁을 넣었군요.
박시백 : 나중에 어떻게 드러나냐면, 사형인 경우 마지막에 왕이 결제를 해야 집행되거든요. 이 사건을 마지막에 세종이 보다 보니 뭔가 허술한 겁니다. 그래서 재조사를 명하면서 이 사건이 오픈되죠. 그래서 그때 황희와 맹사성이 같이 쫓겨나고, 이랬던 게 있고. 하여간 탄핵받은 적이 꽤 있습니다.
박인규 : 그런 기록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죠?
박시백 : 그렇죠.
박인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렴하진 않았지만 정승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다. 이렇게 평가하신 것 같은데.
박시백 : 네. 그렇게 평가합니다. 조선시대 정승이 갖는 위치는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중요해서, 세종은 심지어 좋은 정승 한 사람이 있으면 나라 다스리는 건 다 된 거나 진배없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실제 좋은 정승의 가치를 높이 봤고. 또 그런 만큼 황희가 정승으로서 자질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거동하지 못할 때까지 계속 정승으로 등용하거든요. 정승이 주로 하는 역할이 뭐냐면 우리가 흔히 왕의 자문역이다 하는데, 이 자문이 그냥 그런 이렇습니다 하고 설명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하십시오 마십시오를 최종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그야 말로 최종적 조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어떤 사안도 정승들 중에서 두 정승이 완강하게 반대한다면 왕이 거의 실행할 수 없습니다. 이럴 정도로 뛰어난 판단력을 갖고 있어야 되고, 또한 할 말을 할 줄 아는 기개가 있어야 되고.
박인규 : 황희 정승에 대한 평가를 보면, 박시백 화백께선 기록에 바탕해서 나름대로 일방적으로 두둔하거나 일방적으로 폄훼하기보다는 균형잡힌 평가를 하셨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경우를 적용할 수 있는 게 저는 임사홍 같은 경우, 연산군 때 갑자사화를 일으킨. 조선시대의 가장 간신의 대명사로 불린 분인데 젊었을 땐 적어도 그렇지 않았다는 평가를 하신 것 같아요.
박시백 : 그렇죠. 임사홍은 출신성분이 워낙 좋아서 등장과 함께 바로 상당히 실세급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요. 이러다 보니 너무 오만해서, 잘난척을 좋아하고 이런 것들 때문에 평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할 말을 하는 신하 중 하나가 임사홍이었다고 저는
박인규 : 적어도 직언을 했다.
박시백 : 네. 성종 당시 폐비에 대해서 세자를 생각하십시오. 하면서 끝까지 반대한 것도 그렇고. 모든 왕들은 자기가 비정상적으로 집권하게 되면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사후에 추존하려는 마음을 다 갖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성종도 실제 임금이 되지 못했던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가 그럴 텐데요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데 굉장히 몰두하죠. 이것에 대해서 완강하게 반대했던 사람도 임사홍이고.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실제 간신의 대명사로 찍히게 된 사건 자체도 지금 기억나진 않지만 되게 소소한 사건이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사림들에 대해서 좀 우습게 알고
박인규 : 그 당시 막 부상하던 신진사림들과는 관계가 안 좋았다. 그러다 보니 신진사림들이 임사홍을 소인이다 소인이다 하면서 그런 측면도 있겠군요.
박시백 : 그 이후 신진사림들이 집권해 버리고
박인규 : 이 작업이 11권까지 나왔는데, 첫 권 하실 때 2년인가, 오래 걸리셨고 그 다음 오래 걸린 게 10권인가요? 선조 시대를 그리면서 분통이 터져서 어려웠다고 하시던데 임진왜란 떄문에 그런 겁니까?
박시백 : 그렇죠. 10권은 분량도 좀 많았습니다. 다뤄야 할 얘기가 많아서 분량은 많은데 기록은 또 굉장히 부실한 게 선조실록이거든요.
박인규 : 기록이 부실한가요? 전쟁때라 그런 건가요?
박시백 : 그렇죠.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면서 당시 있었던 사초를 거의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선조실록에, 임진왜란 때까지는 다른 때의 경우에 비교해 본다면 거의 하루치 정도의 기사가 한 달 기사를 대신할 정도로 굉장히 부실한데
박인규 : 부실한 것 때문에 분통이 터진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박시백 : 그렇죠. 그것 때문에 공부에 어려움이 있었던 건 사실인데요. 분통은 역시 왜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조정의 모습
박인규 : 이른바 지배계층의 비겁함
박시백 : 특히나 선조, 그리고 선조를 둘러싼 호종했던 몇몇 신하들의 모습이 너무나 뻔뻔하고, 그래서 분통이 많이 나더라구요.
박인규 : 한두 가지 사례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박시백 : 이를테면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에 대한, 이순신을 모함하고. 나중에 백의종군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실제 선조는 이때 이순신을 죽이고 싶어했어요.
박인규 : 그 정도였습니까? 왜 죽이고 싶었을까요
박시백 : 이건 저의 주관적 해석이기도 한데,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선조가 처음에 의주까지 피난갈 때 이때는 바로 요동으로 중국으로 도피할 생각을 합니다. 망명하고 왕위에 대해서도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요. 정 그러면 세자한테 넘기고 가겠다. 그야 말로 자기 한 목숨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순신이 정세를 반전시키고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전황이 크게 바뀌지 않습니까? 일본군이 남쪽으로 후퇴하고 중국군이 들어오고 이러니까 이젠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됐단 말이죠. 그런데 그 전까지 왕위를 내놓겠다는 말은 여러 번 내뱉은 게 있고, 그래서 이걸 돌파하는 게 선조가 선위를 하겠다는 소동을 일으키면서 오히려 자기 자리를 공고하게 하는 이런 작전을 펴는데, 이게 굉장히 주효했어요.
왕이 내가 물러나겠다 하면 신하들이 그러십시오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아니됩니다, 몇 번 반대하면서 나중엔 거의 조그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 물러나겠다, 한단 말이죠. 이렇게 해서 자기 왕위를 공고하게 지켰을지 모르지만 평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란 말이죠. 어쨌거나 전쟁이 나자마자 요동으로 도망가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신하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다 알고 있는데, 반면 이순신이라는 존재는 모든 조선의 군대가, 그야 말로 왜군이 보이기만 해도 도망가던 상황에서 거의 주도적으로 첫 싸움부터 승리로 이끌면서 완전히 장악해 버리고 전체 전세 자체를 역전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구국의 영웅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는 거죠. 이럴 경우 만약 신하들까지도 전부 그런 의견에 동조해버리게 되면 왕의 입지는 굉장히 초라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이순신을 깎아내리고 원균을 자꾸 띄워서 최소한 신하들만큼이라도 이순신 일변도의 사고를 갖지 않게 제어하지 않았는가
박인규 : 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이순신에 대한 질투나 견제 같은 게 있었다.
저는 또 놀라운 것이, 임진왜란의 영웅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이지만, 정치가 쪽에서는 서예 유성용이 역할을 했다고 보여지는데 서예도 이순신 탄핵에 동조했다. 왜 그랬을까요?
박시백 : 저도 보면서 약간 놀랐던 장면이었는데,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서 여러 번 좋아하지 않는 의사를 몇 번씩 보이고 결국 어떤 사안을 꼬투리 삼아서 탄핵을 시작했을 때, 그 과정을 통해서 신하들이 아, 우리 임금이 이순신을 싫어하는구나, 충분히 퍼져있었단 말이죠. 이러면서 유성용이 이순신에 대한 태도가 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는 자기가 추천했고 어릴 때 옆에서 지켜봤는데 아주 강직하고 이런 식의 두둔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순신이 공을 세워서 직위가 높아져 가니까, 너무 높은 품계를 내리니 걱정되더라. 본래 장수라는 건 교만해지면 쓸모없는 법인데 이순신의 품계가 높아지면서 자기도 걱정했었다. 좀 더 지나서는 원래 교만한 장수는 쓸모가 없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발전하거든요. 반면 원균에 대한 평가에서는 자기가 원균이 하는 일을 봤더니 어느 성 쌓는 일을 봤더니 굉장히 야무지게 잘하더라 이런 칭찬을 하는데, 바로 옆의 다른 사람이 그 성은 금방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뜻밖에도 왕의 심중의 변화에 따라가는, 그래서 결국 이순신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박인규 : 선조와 이순신. 세습왕과 국민적 영웅, 그런 간에 갈등이 있었고 거기서 신하들은 어떻게 보면 왕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지금까지 광해군까지 책을 내셨는데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리셨어요. 그 중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 또는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누가 있을까요
박시백 : 애착이 가는 인물이라면 같이 얘기했던 이순신, 세종대왕 이런 분들이 당연히 애착이 가고. 앞서 정도전 같은 인물, 정말 40, 50이 돼서도 자기 이상을 위해서 일관된 길을 가고. 더 나아가서 이상으로만 흐르지 않고 현실과 접목할 줄 알았던 면에서 굉장히 인상적 인물로 기억되고요. 또 한 사람 얘기한다면 정광필 같은 사람, 중종 시절의 재상이었는데요 이 분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게, 아까 재상의 소양을 얘기할 때 자문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제는 중요한 때 할 말을 할 줄 알아야 되고 또한 사안에 대한 판단력이 높아야 되고, 더 나아가서 백관의 최고 우두머리니까 도덕적으로까지 흠결이 없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이런 걸 보여준 게 제가 보기엔 정광필이나 나중에 인조 때 활약했던 이원익, 이런 분들이 그런 모범적 사례라고 생각이 들어요.
박인규 : 광해군 같은 경우는 폭군이라고 합니다만 연산군과는 경우가 다르다. 특히 광해군의 대외정책이 잘 됐으면 그런 일방적인 사대로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평가도 하던데 광해군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박시백 : 광해군은 조선시대에는 폭군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있었고. 또 근래에 와서는 그에 대한 약간의 반동으로 개혁군주로 묘사하는 경향도 꽤 있는데 저는 양 측면을 다 갖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타고난 자질은 꽤 훌륭하고, 또한 무엇보다도 경험이 다른 어떤 세자도 해보지 못했던 전쟁을 하면서 백성들 사는 것도 봤고 전국 각지를 누벼도 봤고. 그리고 그 당시가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변할 때였는데, 북방에 있으면서 여진의 힘이 어떻게 장성해가고 있는가 이런 것도 다 겪었던 말씀이죠.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어떻게 본다면 전쟁 이후에 나라를 복구하는데 최적의 적임자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성군이 될 자질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또 한 가지 경험이 뭐냐면, 세자가 되기전부터 시작해서 되고 난 이후까지도 끊임없이 자리에 대한 위협을 받았거든요. 그것도 다름아닌 바로 자기 아버지 선조로부터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위협을 계속 받았단 말이죠. 그런데 세자에서 폐세자가 되면, 양녕의 경우는 세종 덕에 살았지만 사실 당시 정치풍토에서 살아남기 힘듭니다. 곧 목숨의 위협이거든요. 이런 경험 때문에 굉장히 자기방어본능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영모설이 돈다 하더라도 좀 통 크게 넘어가지 못하고 계속 뿌리를 파헤쳐나가면서 키우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은 고문하다 보면 없는 말도 다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럼 다시 거기서 새끼를 치면서 또 판을 키우고, 이런 식으로 하면서 끊임없이 옥사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맙니다.
박인규 : 정책적 능력은 있었으나 처세랄까 권력운영에선 문제가 많았던 왕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번달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는데, 어떻습니까. 거창한 얘기긴 합니다만 조선시대 여러 왕들을 보시면서 우리시대 지도자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은 이런 왕이다. 누가 있을까요?
박시백 : 당연히 저는 세종을 들고 싶습니다.
박인규 : 어떤 측면이 그렇습니까?
박시백 : 너무나 위대해서 본받기도 어려운 왕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세종은 제가 판단하기로 일단 출발부터 굉장히 장기적인 비전을 뚜렷하게 갖고 있던 임금이었어요. 독자역법을 세워야겠다, 거기엔 뭐뭐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설계가 애초에 충분히 서있었던 임금이었고. 또한, 어찌 보면 그것은 거의 자기만의 생각이에요. 당시 신하들과 공유되지 못하는, 그런데 이걸 혼자 해나갈 순 없기 때문에 신하들과 토론을 통해서 숙제를 시킵니다. 그러면서 또한 신하들이 제기하는 좋은 안이 있으면 바로 발탁해서 쓰고. 이러면서 신하들도 준비시키고, 그러면서 일을 더욱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또 한 가지 저는 세종에게 가장 반한 게 뚝심입니다. 이 사람은 동시에 진짜 여러 건의 대형 프로젝트를 동시에 발주하거든요. 그리고 각각의 것들을 직접 다 챙깁니다. 이런 일들이 몇 달 해서 끝날 일들이 아니고 10년 20년짜리 일들인데 이걸 동시에 전부 직접 체크하면서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고, 또 하다가 이쯤에서 그만둘 때도 됐는데 그래도 조금이라도 성이 안 차면 다시 채근하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 뜻대로 완성시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말 대단한 뚝심이었다
박인규 : 미래에 대한 비전과 여럿을 이끌어갈 수 있는 설득력. 그리고 일을 끝까지 추진하는 뚝심, 이 세 가지가 세종에게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요즘 지도자를 보면 뚝심들은 많이 계신 것 같은데 비전과 설득력은 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인색했나요?
여기서 창작타악밴드 공명의 연주곡, 통헤야를 들으시겠습니다.
* 공명 - 통헤야
박인규 : 한겨레신문 계실 때는 하루하루 그야 말로 피를 말리는 마감의 고통에 고통스러워했고요, 조선왕조실록을 그리면서는 8년째 그리고 계신데 시사만화 그릴 때의 어려움과 아주 긴 호흡의 역사만화를 그릴 때의 어려움. 어떤 게 더 낫습니까?
박시백 : 지금 작업이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사실 그림에 들어가는 시간은 굉장히 작거든요. 그러니까 하루로 치면 작업하는 시간이 한 시간도 안 되는 생활이었는데, 그만큼 나머지 시간은 저한테 거의 정말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이거든요. 그러니 되게 편할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또 달리 보면 이 한 시간을 위해서 나머지 시간도 다 투여해야 되거든요. 잘 때도 생각하고 밥먹을 때도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좋은 거라도 나오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데, 작업을 다 해서 데스크에 딱 가져갔는데 표정이 벌써, 이거 뭐야? 이런 표정이면 기분이 나빠지죠.
박인규 : 어떤 조사결과에 따르면 직종별 수명을 조사해 보면 광고카피라이터가 제일 짧답니다. 순간적, 한줄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수명이 짧다는데 제가 보기엔 시사만평하시는 분도 버금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사만화 그리시는 것보다 역사만화로 바꾸신 게 정말 잘하신 것 같습니다.
고려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만화를 그리셨다고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하셨나요?
박시백 : 어렸을 땐 당연히 꿈이 만화가였요.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때부터. 제가 5살 터울의 형님이 계신데, 공부한다고, 연습지라고 하죠? 습자지를 사다 놓으면 슬쩍 해서 구멍 뚫고 해서 책을 만들거든요. 만화책을. 그렇게 그린 게 꽤 여러 권 될 정도로
박인규 : 그럼 극화를 그리신 거예요 그때부터?
박시백 : 예. 그랬는데 중학교 이후엔 거의 잊고 있다가, 보기만 하다가 학생운동 하면서 우연찮게 제가 대자보 만화를 광주항쟁과 관련한 걸 그렸는데 학생들 반응이 꽤 괜찮았어요. 이게 계기가 돼서 총학생회 신문에 만평도 그려보고. 그래도 시사만화라고 그린 건 다 해서 열 컷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아요.
박인규 : 요즘엔 만화학과도 많고 애니메이션학과도 많던데 아예 일찍부터 만화학을 전공하자 그런 생각은 그 당시엔 아니었던 모양이죠
박시백 : 그 당시엔 없기도 했을 뿐더러 막연하게 미대를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미대 가면 돈이 많이 든다든가 이런 얘기들이 들리고 해서 일찌감치 포기했죠
박인규 : 한겨레 신문엔 어떻게 가게 되신 겁니까?
박시백 : 그 전에 제가 만화 습작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시사만화는 거의 안 했었고요. 일반 극화를 하고 싶어서 습작을 하고 있었는데, 박재동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후임자를 공모했습니다. 그때 응모를 했죠.
박인규 : 말하자면 공개모집에 응모하신 겁니까?
박시백 : 제가 인터뷰 때마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제가 얼떨결에 뽑히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래서 만평을 1년 하고 그만뒀고, 나중에 한 4년 정도를 박시백의 그림세상이라는 타이틀로 이야기가 있고 호흡이 긴 시사만화를 연재했어요
박인규 : 만화가들이 전업으로 만화 그리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을 많이 하시던데 만화의 인기에 비해선 안 맞는 것 같아요. 만화는 많이 좋아하는데 왜 만화를 그리시는 분들이 전업으로 하지못하는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까?
박시백 : 만화환경이 10여 년 넘은 사이에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제 기억으론 90년대 초반 정도에는 그래도 대중적으로 떴다 하면 권당 10만 권씩 팔리는 작품들이 제법 나온 것 같은데, 대여점들이 많이 들어서고 또 인터넷 환경이
박인규 : 온라인 만화가 많이 나오면서 그것도 영향을 미쳤다던데
박시백 : 온라인 만화도 그렇고 인터넷으로 공짜로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니까, 아무래도 만화를 사서 보려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지 않았나 이렇게 판단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며칠 전 일본을 다녀왔는데 일본은 만화왕국 아닙니까? 서점에 가보니 정말 다종다양한 만화들이 잔뜩 쌓여있고, 심지어 60년대 70년대, 저희가 어릴 때 봤던 만화도 아직까지 연재되는 작품이 있을 정도로. 작가가 한 작품만 대중적으로 히트한다 하더라도 평생 이걸 갖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더라구요. 굉장히 부러운 부분인데, 우리로선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은 듭니다만.
박인규 : 주변환경 문제도 있을 수 있을 것 같고 이번에 그리신 조선왕조실록처럼 어떤 한 분야에 대해서 아주 깊이있는, 단순한 재미뿐만 아니라 깊이있는 것들도 전해주는 마니아라고 합니까? 그런 식의 만화를 우리가 상대적으로 덜 생산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박시백 : 아무래도 시장이 작다 보니 다시 만화에 뛰어들려는, 말씀하신 대로 전업하려는 사람들의 대단한 결심을 요구하고. 이런 것들이 서로 악순환을 겪기도 하는데요, 그래도 제가 한국만화에서 굉장한 가능성을 보는 건 뭐냐면, 만화학과들이 많이 생기고 워낙 만화를 하려는 젊은, 좋은 친구들이 생기면서 기량이 굉장히 늘었습니다. 아직까지 스토리 이런 건 좀 약한데 표현력에 있어서는 오히려 일본만화를 능가할 정도까지 굉장히 기량이 발전하고 있다. 이것이 요즘 모습인 것 같고요. 여기에 좀 더 어떤 만화에 대한 지원이라든가 내지는 독자들의 사랑이 조금만 더 가미된다면 한국 만화가 정말 얼마 전의 드라마처럼 만화에서도 한류를 불러일으키는 날이 오지않겠나라는 희망도 갖고 있습니다.
박인규 : 일단 조선왕조실록으로 역사만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 그리고 있는 만화는 2011년까지를 목표로 하신다고 하셨지만 그 전에 끝날 수도 있겠죠?
박시백 : 전에는 아마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고 2011년에만 무사히 잘 끝난다면 스스로도 만족할 것 같습니다.
박인규 : 10년 가까이 조선왕조실록에 들인 공력이 만화 스무 권으로 끝날 것 같진 않고 앞으로 여러 군데 활용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성급한 질문이긴 합니다만 앞으로의 계획을 포함해서 만화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시백 :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는 게 좀, 일단 조선왕조실록을 잘 마무리짓는 게 향후 계획이 되겠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제가 이 작업을 하면서 공부한 걸 노트로 남겨놓고 있거든요. 지금도 쌓인 노트가 상당히 되는데, 이것을 활용한 구체적인 또 다른 만화들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우선 지겨워서 좀 안 하지 않겠나라고 막연한 생각이 듭니다.
박인규 : 뭐 한 3년 잊어버리시다가 나중에 또 하시면 되죠.
박시백 : 그리고 젊은 친구들한테는 그런 얘기를 드리고 싶어요. 항상 주변에서 누구 만화를 하고 싶어하는 젊은 친구들 있으면 그렇게 얘기하는데, 너무 20대에 모든 승부를 보려고 하지 말자. 만화는 30대에도 데뷔할 수 있고 마흔에도 데뷔할 수 있고 문제는 얼마만큼 경험들이 풍부해져서 어떤 한 분야의 전문적인 식견과 이런 걸 갖게 되는가가 중요하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만화학과 이런 것도 좋지만 만화학과가 아닌 일반적인 다른 전공들을 해서 그쪽의 더 전문적인 지식을 쌓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고. 또 졸업한 다음 취직해서 사회생활 경험을 쌓아보는 것도 또 좋다는 생각이 들고. 여유있게 출발하되 만화에 대한 꿈만은 놓지 말고 있어라.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박인규 : 만화 조선왕조실록.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끝내시고 앞으로도 재밌고 유익한 만화 그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박시백 :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려내고 있는 박시백 화백과 함께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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