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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 한국적 록의 명맥이 끊긴 게 가장 가승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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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 한국적 록의 명맥이 끊긴 게 가장 가승 아파"

박인규의 집중인터뷰[11/28]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씨 <하>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한국적 락 음악을 완성시켰으며, 인기를 누리려고 급급해하기보다..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지켜온 한국 록의 산증인 신중현씨.. 데뷔 45주년을 맞은 올해.. 공식은퇴를 선언하고 지난 여름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은퇴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은퇴를 선언함하면서 자서전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락과 함께했던 화려했던 가수활동 이면에 담긴 가슴아픈 기억들을 담아내고 지난 45년을 정리했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어제에 이어서 신중현씨와 함께 합니다. 45년간 한국적 락음악을 펼쳐오면서 겪었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에 대해 얘기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한국 락음악의 대부 신중현씹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어제에 이어 계속 말씀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불운한 아티스트라는 말씀을 하신 게 계속 제 귀에 남아있는데 여름에 책을 내셨어요.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중앙일보에 내셨던 걸 묶으신 걸로 아는데, 여기에 대마초 얘기도 있었고 활동금지조치, 또 여러 가지 힘든 이야기도 들어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털어놔야겠다고 생각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신중현 :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음악인을 대중들이 볼 때는 굉장히 화려하고 행복하게 일생을 가는 것 같은 느낌이 오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굉장히 불운하고 파란만장한 일들이 있었던 것이, 거기에 맞지 않게 음악을 하고 있는 자체가 조금 특이하기도 하고. 또 음악인으로서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나 생각도 해서, 그렇게 내는 것도 음악인으로서의 길이 있었다는 기록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박인규 : 선생님이 1940년생이신데 부모님 두 분이 다 6.25때 돌아가신 걸로 돼 있어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신중현 : 그렇죠.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는데 결국 그 바람에 제가 초등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6.25 당시니까 약을 구할 수도 없었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약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저한테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약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그거라도 드렸을 텐데 그런 여건이 안 된 것이 굉장히 전쟁이 원망스럽죠.

박인규 : 그런데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하모니카를 즐겨 부셨다구요. 워낙 음악을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신중현 : 8.15 전에는 중국에 있었어요. 만주에서. 아버님이 서울에 계시다가 중국에 들어가셔서 성공을 하신 계기가 있었는데, 그래서 저희들이 식구가 전부 만주로 갔는데 거기서 부유하게 자랐죠. 유년시기에는 축음기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까 매일 음악도 많이 듣고. 부모님이 부유한 상태에서 그런 악기들.. 악기래 봐야 하모니카 정도밖에 없었고. 이런 것들이 남아있었던 것이 저한테는 굉장히 음악을 할 수 있는, 또 음악의 눈을 트일 수 있는 기회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하죠.

박인규 :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는데 전쟁통에 부모님 두 분을 다 잃으시고 말하자면 졸지에 고아가 되신 거군요. 기타를 잡으신 건 언제부턴가요?

신중현 : 기타는 중학교 2학년 때 겨우 잡았는데 그때는 남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만져볼 기회가 별로 없었죠. 밤에 몰래 꺼내서 연습하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학교래 봐야 야간.. 일 열심히 하니까 조금 돈도 주시니까 그것으로 야간학교도 다녔는데, 결국엔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테크닉이 늘어난 상태였어요.

박인규 : 16살 때 미8군 무대에 서신 걸로 아는데 그 당시 미8군 무대는 국내 최고 무대라고 들었는데요, 10대 때부터 굉장히 실력이 좋으셨던 모양이에요.

신중현 : 저 나름대로 열심히 하다 보니까 굉장히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당시 종로 같은 데 가면 음악학원, 기타학원도 많고. 저는 당돌하게 기타를 들고 그런 데 가서 기타를 치고 그러니까 선생님들도 쳐다보고 학생들도 잘 한다고 칭찬하고 동료들도 많이 생기고. 이런 과정에서 8군 들어갈 기회가 생겼죠. 운이 좋았던 것이죠 한 마디로.

박인규 : 처음에는 기타연주로 시작하신 거죠.. 노래까지 하신 걸 보면 타고난 재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신중현 : 그런 게 좀 있었기 때문에 했겠죠.

박인규 : 본인께서도 나의 음악의 최대 장점이랄까 특징은 한국적 락음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른바 락음악은 서양음악인데 거기에 한국적 요소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신중현 : 미8군 무대를 정신없이 하다 보니까 실력도 많이 늘고 음악에 대한 눈이 트이고, 세계적인 음악을 다루다 보니까 음악에 깨달음이 생겼고. 이러던 때에 비로소 한국무대를 들여다보게 됐어요. 사실 정신없이 미8군에서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사회에 나올 기회도 별로 없었고. 그런데 우리 음악은 어떤가 하는 걸 그때 비로소 느꼈죠. 들어보니까 너무 뒤떨어졌다. 세계적인 문화흐름에 비해서 너무 뒤떨어진 상태였고. 제가 미국음악만 할 게 아니라 대중음악이라도 뛰어들어서 뭔가 대중음악의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그런... 젊었으니까 그런 패기가 있었던 거죠. 그것이 대중음악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됐죠.

박인규 : 63년에 '빗속의 여인'으로 공식 데뷔하신 거죠?

신중현 : 했었지만 음반은 64년도에 나왔어요. 데뷔는 63년도에 했는데, 음반 하나 취입하는 과정도 엄청 힘들었고, 그래도 어떻게든 한다는 신념으로 만든 것이 애드포의 첫 음반이죠.

박인규 : 그 당시만 해도 트로트가 주류였던 것 같은데 첫 음반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신중현 : 제가 굉장히 기대를 갖고 했는데 막상 나와 보니까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린 나이로 굉장히 실망했죠. 그래서 한 2년 동안 애쓰다가 다시 미8군으로 들어갔죠. 도저히... 생활에 위협을 받다 보니까 안 되겠다 해서 깨뜨려 버리고 다시 미8군에 가서 시작했죠.

박인규 : 그렇다면 신중현의 한국적 락음악이 대중의 반응을 받은 건 '미인'인가요?

신중현 : 그렇죠. 74년도 경인데, 거의 10년 후인데 그 전에 펄시스터즈나 김추자라든가.. 가수들을 배출했죠. 그런데 의외로 가수들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저라는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미인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도, 그때 당시 상황은 굉장히 스타의식들이 강하다 보니까 무조건 스타가 되면 나오질 않아요. 물론 당연한 거겠지만.

박인규 : 나오지 않는다는 건 어딜 얘기하는 겁니까?

신중현 : 저의 사단을 탈퇴하는 거죠.

박인규 : 말하자면 신중현씨의 곡을 받아서 스타가 됐는데 뜨고 나면

신중현 : 만나보기 힘든 상황이 되다 보니까 결국엔 74년도.. 그 전에 이정화를 비롯해서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김정미, 박인수 할 것 없이 굉장히 많은 스타가 나왔지만 남는 건... 저 혼자 외톨이가 됐는데 그러다 보니까 제가 불러야겠다. 그래서 부른 것이 미인이죠.

박인규 : 그 전까지 작곡가로서는 상당히 입지를 굳혔지만 대중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신 게 미인. 미인이 나왔던 그 당시 굉장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미인이란 노래를 발표할 때 그룹 이름이 '신중현과 엽전들'이었습니다. 엽전들이라는 말에는 사실 비하적인 의미가 있거든요. 그런 이름을 지으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신중현 : 바로 그거죠. 비하적인 것이.. 저는 미8군에서 계속 하면서 외국 사람들한테서 받은 괄시가 있어요. 인종차별이 제일 심한 데가 미국이라는 걸 느낀 것은, 부대 같은 데 들어가면 흑인 클러버가 별도로 있고 백인 중에서도 계급 별로 클러버가 나뉘어져 있는 걸 볼 때 굉장히 인종차별이 있다는 걸 느꼈는데, 한국사람은 말도 못하구요.

박인규 : 말하자면 3등시민 비슷하게..

신중현 : 그런 것을 느끼다 보니까 엽전. 엽전이 그렇지 뭐. 비하적인, 하여튼 그런 걸 느끼다 보니까 저 나름대로 오기가 생겼죠. 그래 좋다, 내가 엽전이다. 젊은 나이니까 그런 이름을 붙인 거죠.

박인규 : 그래 내가 엽전이다. 하지만 엽전이 만든 음악 한 번 들어봐라. 반항의 의미도 있고. 사실 굉장히 흥겨운 노랩니다. 그러면 여기서 신중현과 엽전들이 불렀던 미인을 한 번 듣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한국 락음악의 대부 신중현씨와 함께하고 있는데요, 방금 미인이라는 곡을 들어봤지만 언제 들어도 신이 나는군요. 기타연주가에서 김추자, 펄시스터즈를 배출한 작곡가에서, 그리고 가수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가 미인이었는데 이게 74년도에 발표되고 얼마 안돼서 금지곡이 됐어요. 왜 금지곡이 됐죠?

신중현 : 듣기 싫다. 시끄럽다. 아무 이유도 없고, 시끄럽다는 게 이유거든요. 참 황당했죠.

박인규 : 74년도가 사실은 아주 유신의 극성기였는데, 신중현씨는 사실 그 이전부터 정부에 밉보인 사건이 있다고 그래요. 박정희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고 했는데 거절했다.. 실상이 어떤 겁니까?

신중현 : 저는 잘 모르는데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서 박정희 노래를 만들어라. 저는 그 당시 음악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제 이미지 상으로 독재정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 한 마디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거절하다 보니까 두 번째 전화가 또 왔었어요. 공화당이라고. 그때는 좀 강압적으로 저한테 그랬는데 제가 반항이 심했고. 그러다 보니까 좀 밉보이지 않았느냐. 그러고서 바로 발표한 곡이 '아름다운 강산'이에요. 그런 것이 맞물리면서 뭔가 저의 실체가 별로 맘에 안 들었던 것 같아요.

박인규 : 미인이 금지곡이 된 것도 그 당시 유신정부가 대중음악인 신중현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신중현 :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하겠지만, 어떻든 저에 대한 죽이기.. 이런 작업을 많이 한 것은 제가 많이 의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인규 : 그 이후에 대마초 사건도 터지고 그래서 심지어 감옥 뿐만 아니라 정신병원도 가셨는데 굉장히 힘드셨겠어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신중현 : 그렇죠. 대마초라는 건 제가 68년도에 사이키델릭뮤직을 8군에서 많이 할 땐데 그때 히피족들이 저를 따라다니면서, 음악을 좋아하니까 락음악을 듣기 위해서 저를 많이 따라다녔는데 그때 권장을 많이 했어요.

박인규 : 히피라면 미국 사람들..

신중현 : 예. 미국 사람들이 반전데모를 하러 그때 당시 많이 왔었어요. 월남전이 시작되고 하면서. 그런 것에서 당시 락음악의 사상은 평화를 부르짖다 보니까, 그 친구들이 굉장히 좋아했던 시절인데. 그런 데서 그네들이 저를 좋아하니까 주는 거예요. 가진 게 전부 대마초 밖에 없어요. 저는 고기도 사주고 밥도 사주는데 그 친구들이 주는 건 전부 대마초.

박인규 : 그 사람들이 줄 수 있는 게 대마초 밖에 없었군요.

신중현 : 네. 배낭에 대마초 아니면 환각제를 많이 갖고 있었죠. 저는 또 그때는 세계적인 락음악이 사이키델리코, 환각음악으로 돌변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연구해야 된다는 의무성도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그곳에 들어가서 생활을 오래 했었죠. 그러다 보니까 파악이 됐고, 또 그 후론 제가 바쁜 생활에서 그걸 해가지고는 스케줄을 못 맞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사실 잊어버린 상태거든요 74년도까지는.

박인규 : 그럼 한 5,6년 전의 일이 뒤에 가서 벌어진 거군요.

신중현 : 예.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들춰내서 덮어씌웠는데, 하여튼 그 상황에서는 당연히 제가 의식을 했었어요.

박인규 : 어쨌든 그야말로 잘 나가는 기타연주가에서, 또 작곡가에서 가수로도 인기를 얻을 즈음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도 할 수 있는 시련을 겪으셨는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신중현 : 그때는 정신이 없죠. 아무 생각 못 했어요. 이렇게 가야 되는 건지. 하여튼 그네들이 하라는 대로 가라는 대로 고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신병원, 구치소까지 가면서... 끌려만 다닌 거죠. 그동안의 고충은 육체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인 게 굉장히 저한테는 피곤했죠.

박인규 : 예술가로서 30대 중반이라면 그야말로 전성기인데 그 시기 한 5,6년을 그런 식으로.... 유신독재의 피해라는 게 여러 가지 형태로군요. 어쨌든 79년도에 유신정권이 갑자기 막이 내리고 다시 대중연예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5,6년 떠나 있다가 돌아와 보니까 어떻던가요?

신중현 : 한 마디로 강산이 변했더라구요. 5,6년이면 강산이 변하는구나를 그때 느꼈는데, 당연히 중학교 3학년이 대학교 몇 학년이 돼 있을 땐데, 5년이라는 그 세월의 음악성이, 그 당시의 디스코라든가.. 또 락음악이 공교롭게도 제가 금지되면서 세계적으로 침체되는 시기고, 밀려오는 유흥음악이죠, 댄싱뮤직 같은 디스코 음악이나 그 외에 기형적인 음악들이 존재하게 된 시대가 70년도 후반인데. 저는 나왔을 때도 제 나름대로 댄싱뮤직을 들려줘야겠다는 것 때문에 부담을 많이 가졌고. 그래서 락음악에 댄싱뮤직을 가미를 많이 해서 뮤직파워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발표했지만, 결국 그것이 신중현 음악은 춤을 출 수 없다는 평이 나돌기 시작한. 하여튼 시련이 연거푸 저한테 오기 시작했죠.

박인규 : 74년도에 미인이 나왔을 때 정치적인 부당한 탄압을 받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하시겠어요.

신중현 : 그렇죠. 그때 당시는 사실 저희들이 세계적으로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어요. 왜냐면 우리 음악은 이웃나라들도 굉장히 부러워했고. 심지어는 일본 같은 데서는 저한테 귀화해라. 얼마든지 지원하겠다는 제의도 왔었지만 제가 거절했는데, 세계적으로 우리도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자부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맥이 끊기면서 음악문화가 상실돼 버린 것이 저로서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죠.

박인규 : 참 안타깝습니다. 부인 되시는 명정강 여사께서도 미8군에서 최고의 여성드럼주자였던 걸로 아는데 아드님 세 분이 전부 락음악을 하시는 걸로 압니다. 약간 소개해 주시죠.

신중현 : 대철, 윤철, 석철 3형제가 있구요. 집사람은 원래 미8군에서 드럼을 최초로 한 여성이죠. 그런 면이 있어서 음악식구가 돼 버렸죠.

박인규 : 12월 17일에 잠실에서 팬들과 만나서 은퇴공연을 하시겠지만, 청취자들도 많이 계시니까 그동안 신중현의 음악을 사랑했던 분들에게 인사말씀 한 마디 하시죠.

신중현 : 제가 마지막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도 사실 대중들이 제 음악을 들어주셨기 때문이고, 저는 참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제가 마지막까지 저의 음악인으로서의 신념을 보여드릴 거고,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을 겁니다.

박인규 : 12월 17일 공연 한 번 기대해 보구요, 은퇴하신다고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고 하니까 기대를 또 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은 한국 락음악의 대부인 신중현씨와 함께했구요, 마지막으로 문제의 1970년도 작 '아름다운 강산'을 들으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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