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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를 낮춰 보는 사회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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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를 낮춰 보는 사회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8/28] 대중가요 연구로 박사학위 받은 가수 하춘화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여섯 살의 나이로 대중가요 음반을 내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가수 하춘화씨.... 45년 동안의 가수활동을 통해 131장이 넘는 앨범, 2천5백곡의 대중가요를 발표해왔는데요

그런 하춘화씨가 지난 금요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가요계의 큰 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예술철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 사유는 무엇일까?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가수 하춘화씨를 초대해서, 박사까지 공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들어보고,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노력했던 지난 10년을 돌아봅니다. 또, 앞으로 어떤 활동계획을 갖고 있는지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가수 하춘화씨입니다.

하춘화씨는 1955년 부산 출생으로 만 6살 때 서울 동아예술학원 가요과를 수료한 후, <효녀심청 되오리다> 등 8개 곡을 취입해서, 당시 가요사상 최연소 레코드 출반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후 물새 한 마리, 잘했군 잘했어, 영암아리랑, 날 버린 남자, 인생, 연하의 남자 등 45년간 2천5백 곡을 발표했고, 91년 최다 개인발표회 1260일로 세계기네스북에 올랐고 2001년에는 최연소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았습니다. 1998년 방송통신대 가정학과를 졸업했고, 2000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과에서 공연예술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현역가수가 됐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우선 박사학위 받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시고 대학에서부터 지금까지 10년만에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어떻게 보면 빨리 받으신 겁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하춘화 : 글쎄요.. 사실 저는 덤덤하더라구요. 마지막 논문에서 손을 떼고 책 인쇄를 넘겼을 때 저녁에 잠이 안 왔어요. 지난 일들이 머릿속에 지나가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기쁘다.. 물론 첫째로 부모님한테 효도했다는 차원에서는 기쁜데 제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또 내가 학문적인 걸 펴나가야 될까 하는, 오히려 걱정이 앞선다고나 할까요. 그런 심정입니다.

박인규 :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뭡니까?

하춘화 : 사회변동기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 그것을 1970년도 산업화와 도시화 중심으로 연구했습니다.

박인규 : 70년대 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대중가요가 어떻게 대중들의 정서를 보여줬나.. 그런 거군요?

하춘화 : 그렇습니다. 가장 격변기였기 때문에 그 시기를 택했습니다.

박인규 : 논문 제목을 들어보면 사회학과 같은 느낌이 드는데 전공은 동양철학 중에서도 예술철학이에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하춘화 : 보통 대중가요와 철학이 무슨 관계냐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대중가요 속에는 정말 심오한 철학이 들어있습니다. 대중가요를 통해서 우리 대중이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다는 건 대중가요가 대중정서에 주는 엄청난 철학이 들어있거든요. 보통은 대중가요와 철학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생각하지만 정말 살아있는 철학이 들어있습니다

박인규 : 연구하신 시기가 1970년대 말인데, 사실 그때가 하춘화씨의 최고 전성기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 때문에 그 시기로 정하신 건 아니죠?

하춘화 : 아닙니다. 논문은 개인적인 것보다 객관적으로, 앞으로 학문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가 돼야 되는데, 제가 70년대를 택한 이유는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그때가 가장 격변기였습니다. 가장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산업화와 도시화인데 그로 인해서 정말 사회가 격변하는 시기에 우리 대중의 정서에도 엄청난 변화가 왔을 것이다. 또 그 대중의 정서의 변화에 따라 대중가요 역시 그 정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대중가요가 나왔을 거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춰서 그 시기를 택하게 됐습니다. 지도교수님도 그 때가 좋을 것 같다고.. 또 앞에 연구자들이 일제 강점기 때나 한국전쟁 이후에 연구한 논문들이 있더라구요. 선행연구를 통해서 앞에서 연구되지 않았던 걸 제가 해야 하기 때문에 70년대를 택했습니다.

박인규 :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구하셨습니까?

하춘화 : 첫째로 그 당시에 많은 대중들이 선호했던 대중가요들을 선정했습니다. 선정기준은 당시 시문, 잡지, 라디오, TV를 통해서 가요 순위프로그램이 많았어요. 그걸 중심으로 하고. 그리고 당시에는 양대 레코드 회사 두 거목이 가요계 전체를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히트곡이 거의 그 두 회사에서 나왔거든요. 그리고 당시는 대중들이 선호하는 가요 장르가 요즘 말하는 성인가요 쪽이 주류였습니다. 그래서 그걸 중심으로 해서 처음에는 143곡이 선정됐어요. 거기서 다시 제가 연구하려는 것과 학문적 방향을 같이 할 수 있고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던 곡을 재선정했습니다. 선정한 그 곡들을 통계 분석하는데, 그럼 과연 대중가요가 그 시대의 사회상과 대중정서를 반영하고 있느냐. 우리가 흔히들 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입증된 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 논문을 톤ㅇ해서 실증적으로 확인을 한 거고 따라서 대중의 정서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면 엄청난 의미를 지니잖아요. 다시 말해 대중가요라는 것이 사회의 분위기와 대중정서를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말도 되죠. 그래서 우리 대중가요가 어떻게 좀 더 미래지향적으로 갈 것인가 하는 방향도 제시할 수 있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140곡 중에서 80곡을 고르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노래들을 골랐는데 그 노래들을 봤더니 이런 것이 보이더라... 이런 것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하춘화 : 예를들면 여러분이 지금도 알고 계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소양강처녀'.. 그 노래를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슬프다. 소양강처녀는 기쁘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창작하시는 분들 생각이지 대중이 받아들였을 때 이 노래가 과연 기쁜가 슬픈가를 판단할 때는 정반대로 나올 수 있거든요. 우리가 소양강 처녀를 노래할 때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가사 자체는 굉장히 슬퍼요. 또 작가가 굉장히 울적한 마음으로 썼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나 대중들은 술이 한 잔 들어가고 그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을 때 흥에 겨워서 그 노래가 나오거든요. 손뼉 치고. 그렇다면 그 노래를 기쁨의 노래거든요. 그런 정서에 관한 걸 통계 분석하면서 그 노래에 대한 점수가 다 매겨집니다. 이건 좀 테크니컬한 건데, 전문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제 논문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 보통 표본수 500정도면 신뢰도가 높다고 했는데 저는 1000으로 했어요. 또 그걸 조사기관에 의뢰했습니다. 제가 개인이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며 어느 한 쪽에 편향될 수가 있거든요. 서울 경기지역만 설문조사가 된다든가..

박인규 : 그냥 가사만이 아니라 그 노래를 들으신 분들이 어떻게 느꼈느냐를 1000명에게 조사하셨다는 거죠?

하춘화 : 그래서 나이를 제한했습니다. 50대부터 70대까지. 왜냐하면 그 분들이 1970년 당시 2,30대로서 가장 우리 경제의 주역이었고 그 가요를 향유했던 층이거든요. 그 분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돌렸죠. 전문조사기관에 의뢰한 것도, 개인이 얼마든지 할 수도 있는데 보통 연구자들은 개인이 해요. 조사기관에 의뢰를 안 합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골고루, 나이도 성별도 골고루 하기 위해서, 어느 한 지역에 치우치면 신뢰도가 떨어지니까 그렇게 해서 통계 결과가 나왔는데 참 재밌는 현상들이 많이 나왔어요.

박인규 : 재밌는 현상들은 어떤 게 있습니까?

하춘화 : 예를 들면, 그 당시에 남자는 굉장히 만남지향적인 정서를 갖고 있어요. 여자는 추억지향적이고, 도시에 사는 분들은 도시지향성을 담은 정서의 노래를 좋아했고, 또 읍, 면이나 시골에서 태어났거나 살고 계신 분들은 시골 정서를 갖고 있는 노래를 좋아한 것으로 뚜렷이 나타났는데, 70년대의 우리 국민의 대표적인 정서가 뭐냐, 한 마디로 요약해서 얘기한다면 이중성이에요. 그것 역시도 참 재밌는 결과인데 그게 만약 지금 2000년대나 90년도에 조사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거예요. 그것 역시도 산업화와 도시화가 되면서 굉장히 격변기였잖아요. 대중들의 정서도 굉장히 변화무쌍하게 넘어갔거든요. 예를 들면 생활을 위해서는 도시로 가서 일을 해야 되는데, 서울 드림을 안고 와서 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도시생활이 너무 삭막하고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가 그리운 거예요. 또 고향노래로 향수를 얻고. 그러니까 도시와 시골 노래도 편차가 0을 기준으로 했을 때 많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좁아요. 그러니까 1970년도의 대중정서는 이중성이 대표적인 정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을 지향하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거기에서 힘을 얻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서 아주 재밌는 70년대의 현상을 이번 통계 분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박인규 : 이런 식으로 대중들의 대중가요에 대한 느낌이나 정서를 체계적으로 조사한 연구가 이전에 있었나요?

하춘화 : 대중가요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가 지금 초기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번 논문을 쓰면서도 자료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 몇 편의 석사논문, 단행본, 2000년도 접어들어서 박사논문이 한 대여섯 편 나온 정도입니다. 그런데 거의 음악분석 아니면 가사 분석으로 된 논문들이 한 80% 이상 되고, 저처럼 실증적인 연구를 한 것은 처음이죠.

박인규 : 엉뚱한 질문이지만, 70년대에 한국사람들이 가장 좋아한 노래가 이런 거였다. 그런 조사는 없었죠?

하춘화 : 그런 건 없었고 제가 조사를 하고 통계를 내면서 나왔던 것은, 1000명을 대상으로 했을 때 80곡을 다 체크한 건 아니거든요. 좋아하는 것만 하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90% 이상이 빠지지 않고 체크한 것이 '돌아와요 부산항에'였어요.

박인규 : 가장 넒은 층에서 좋아한 노래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하춘화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박인규 : 노래를 해오시다가 특정한 시점의 대중들의 대중가요에 관한 반응을 조사하다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대중가요를 어떻게 받아들였구나 하는 느낌을 새롭게 받으셨을 것 같아요.

하춘화 : 제가 이번 논문에서도 70년대 사회상을 연구 안할 수가 없었어요. 사회상을 연구함으로써 대중가요의 어떤 정서를 대중들이 갖고 있었는가를 뽑아내기 위해서도 그 당시 사회상을 연구해야 했는데 그래서 뽑아낸 정서가 도시와 시골,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이런 상반된 정서를 뽑아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사회상을 통해서 상반된 정서를 가지고 가요를 분류를 했습니다. 분류한 것을 대중가요의 30년 이상 연륜을 가진 전문인들에게 평가를 받았습니다. 점수를 얻는 거죠. 이것이 통계분석의 기술적인 절차인데, 그래서 이미 노래마다 점수가 매겨진 상태에 대중들한테 설문조사한 거거든요. 역시 사회가 격변기였기 때문에 우리 가요 역시도 굉장히 다양했습니다. 요즘은 젊은층, 중고등학생 위주의 음악이 굉장히 주를 이루지 않습니까? 당시만 해도 요즘 말하는 성인가요가 지금처럼 주류를 이뤘어요. 그런 것이 요즘과 비교해서 좀 다른 점이고, 또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대중음악을 생각하는 이해나 해석, 인식이 그때하고 지금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다는 것. 그건 사실이죠.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최근 성균관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은 가수 하춘화씨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잘나가는 톱가수 생활을 오랫동안 하셨는데 96년도에 방송통신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왜 그 불혹의 나이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셨나요?

하춘화 : 늘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새롭게 마음먹은 게 아니라, 제가 61년 6살 때 첫 음반을 내놓고 소위 데뷔를 하고 가수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 그 당시만 해도 대중가요를 보는 대중의 시선이 곱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중예술인이 어느 집안에서 나왔ㄷ고 하면 큰 일 나는 것처럼 그러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것이 저의 어린 마음에 굉장히 상처가 됐던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좋아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요를 부르면서 왜 그 자리를 떠나고 분위기를 떠나면 하시하고 천시하는가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늘 갖고 성장했죠. 우리 대중가요가 학문적인 대상이 된 것도 얼마 안 되거든요. 꼭 학문적으로 접근을 해서 내가 이 땅에서 반세기에 가까운 45년이라는 세월을 노래했으니까. 또 제가 노래만 부르고 끝날 것이 아니라 다음 후배들을 위해서는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늘 미루다가 95년에 제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용기를 주더라구요. 원래 가정이 있는 여자 입장에서는 남자의 외조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거든요. 그런데 하라고,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고 용기를 줘서 그때 96년에 시작하게 됐죠. 결혼한지 올해로 10년이 되는데 그 기간 동안 추억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독서실 다니고 문고에 가서 책 사고 이런 것밖에... 부부의 추억이 그것밖에 없습니다.

박인규 : 석사학위는 동국대에서 하셨어요..

하춘화 : 네. 제가 석사때나 박사때.. 대중음악학과나 대중가요학과가 있었다면 그 과를 택했겠죠. 그런데 딱 맞아 떨어지는 과가 없었어요. 그래도 최대한 저와 연관지을 수 있는 학과를 택하다 보니까 석사때는 연극영화학과에서 공연예술을 전공했어요. 그렇게 해서 대중가요 쪽으로 논문을 썼구요. 박사때도 원래 딱 맞는 전공이 없어서 처음에는 법대를 지원했습니다. 세 번 떨어졌어요. 왜냐하면 '엔터테인먼트 인 로우'라고 있거든요. 우리나라에는 아직 가수에 대한 저작권법이 열악합니다. 작사가나 작곡가들은 그래도 권리를 찾고 있지만 가수들은 지금 굉장히, 말도 못하게 미개한 나라의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거든요. 거기에 대한 생각으로 제가 그러면 가서 공부를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사실은 사명감과 책임감이죠. 누구나 개척자에게는 희생이 따르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사실 제가 활동하는 시간 돈 을 생각했다면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지원했는데, 외국만 해도 로스쿨이 따로 있잖아요. 전공이 달라도 자기 분야에서 좀 더 깊이 연구하고 싶으면 로스쿨을 갑니다. 그런 설명을 심사때 법대 교수님들한테 해도 영 받아들이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세 번 지원해서 세 번 떨어졌습니다.

박인규 : 대중가요를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싶은데 국내 대학에서 아직 그런 부분에 대한 준비가 안 돼있는 거군요.

하춘화 : 아직은 실용음악학과 정도고. 대중가요나 대중음악학과라고 딱 정해진 과는 아직 안 돼있는 것 같아요.

박인규 : 대중가요를 사람들이 즐기면서도 돌아서면 하시하는 분위기가 싫었다고 말씀하셨어요. 45년을 하셨는데 이제 좀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하춘화 : 그러니까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60년대에 비해서 지금, 정말 우리 후배들은 축복받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런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활동했는데, 지금은 대학에서도 예술자만 들어가면 인기학과로 부상되거든요. 그리고 부모님들도 탤런트나 영화배우, 가수가 된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후원해주고 환영해 줘요. 그렇지만 우리가 한참 활동할 때는 완전히 큰일 나는 걸로.. 집안에서 대중예술인이 나오면 아주 큰 문제가 되는 것처럼 그랬어요.

박인규 : 하춘화씨는 지난 10년가 공부하시면서도 개인공연을 쭉 하셨어요

하춘화 : 그렇습니다. 올해도 연초에 45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환경미화원자녀들 장학기금마련으로 해서 했습니다.

박인규 : 부군 되시는 분이 공부를 강력하게 권유하셨다고 하는데, 차제에 남편자랑 좀 하시죠.

하춘화 : 그래도 제가 시간이 되는 한은 최선을 다하죠. 물론 가정에 충실하려고 하고. 그래서 제가 박사논문을 쓰면서 힘들었던 게 바로 그런 점이에요. 공부하는 것, 논문 하나에만 매달렸으면 여유롭게 할 수 있었을 텐데 1인 3역을 하지 않았습니까. 직업은 가수, 주부, 학생. 그 세 가지를 충실히 하려고 하니까 그게 힘들었던 거예요. 24시간이 모자라고. 그러나 제가 지방공연이나 외국공연을 가는 경우만 빼면 아침을 꼭 제가 차려주는 성의는 보입니다.

박인규 : 박사학위를 받으셨으니까 교수나 이런 쪽으로 나가시는 건 아닙니까?

하춘화 : 물론 강단에 설 계획은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직업이 가수니까 가수에 충실하면서 후배들에게 경험적인 것, 학문적인 걸 다 인수인계하고 싶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후배들이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걸 저를 통해 경험한다면 더 앞선 음악, 더 좋은 활동을 대한민국 대중예술을 위해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또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45년간 대중가요를 불러온 원로가수로서, 또 대중가요의 학문적 정립을 시작하는 개척자로서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대중가요란 이런 것이다. 당부말씀이랄까요?

하춘화 :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예술장르보다도 심오한 철학과 예술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 많은 대중가요들이 매일매일 쏟아지고 있지만 대중들에게 다 사랑받는 건 아니거든요. 그 중에서 예술성 또는 한국의 독특성을 가진 음악만이 영원한 명곡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명곡을 인정하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참 좋겠구요. 또 우리쪽 입장에서는 빨리 앞으로도 저 말고 많은 박사들이 나와서 우리 가요계 발전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해줬으면 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박인규 : 대중가요인도 클래식 음악가 못지않게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좋은 노래 많이 불러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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