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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애국가개정론'에 대한 저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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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 책은 '애국가개정론'에 대한 저의 응답입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8/21] '애국가의 모든것을 한 권의 책 에 담은' 김연갑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올해 열리는 클래식 음악 공연을 보면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과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올해는 이것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 선생의 탄생 100주년 되는 해이기 때문인데요, 최근 아리랑 박사로 통하는 한민족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가 애국가에 대한 연구를 정리한 책을 곧 출간한다고 합니다.

지난 30년간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을 연구해왔고, 애국가와 태극기의 숨은 기록들을 찾아다녔던 김연갑 씨....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한민족 아리랑 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를 초대합니다.

우리 애국가는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가? 100여 년의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애국가는 어떻게 변해왔는가? 그는 왜 애국가와 아리랑, 태극기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가?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한민족 아리랑 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삽니다.

김연갑씨는 충북 청원 출신으로 대학시절 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1975년 강원도 철원 전방에서 육군사병으로 복무하면서 북한의 선무방송을 듣던 중 북한식으로 노랫말과 곡조가 바뀐 북한의 아리랑과 국가를 들으면서 아리랑과 애국가, 태극기 연구를 시작했고 30여 년간 우리민족의 노래와 국가, 태극기 연구를 통해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기록들을 발굴했습니다. 10여권이 넘는 아리랑 관련서적과 수십 개의 우리노래음반을 제작한 그는 국내에서 "아리랑 박사"로 통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국가상징연구회 연구위원,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아리랑세계위원회 사무총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올해가 안익태 선생 100주년인데 그것 때문에 애국가와 관련된 책을 내시기로 한 건 아닌지 궁금하네요.

김연갑 : 이 책은 오랫동안 준비해 왔구요, 금년 4월에 애국가 개정론이 일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애국가에 대한 역사성과 정통성을 한 번도 제대로 연구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개정론이 대두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11월에 안익태 선생 100주년이 되는데, 광복절이 있는 이 달, 8월에 미리 내서 100주년 기념도 하고 애국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자. 그래서 서둘러 8월 말에 출간할 예정으로 준비했습니다.

박인규 :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작곡하신 게 언제죠?

김연갑 : 35년 11월입니다. 미국에서 작곡하셨고, 그러다 보니까 이 분이 작곡했다는 사실을 국내에선 알 길이 없었죠.

박인규 : 지금의 애국가 전에, 구한말에 불렸던 다른 애국가가 몇 개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연갑 : 물론이죠. 국가나 국기, 국호, 국화 등을 국가상징이라고 하는데, 이걸 인식하는 기회가 운양호 사건 땝니다. 우리는 운양호를 향해서 포를 쐈는데, 일본은 일장기가 걸려있는 배를 우리가 포격했으니 일본을 포격한 것과 마찬가지다. 배상하라고 했죠. 외국의 깃발이 중요하다는 걸 구한말에는 아무도 인식 못했죠. 깃발이 나라를 상징한다는 걸 강제로 인식하게 된 경우거든요. 그러다 보니 막연하게 그런 게 필요하다는 걸 일부 관리들만 알았고, 이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필요성을 연구하고 전문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죠. 그러다 보니 구한말 독립신문이 만들어지면서 너도나도 애국심으로 애국가를 만들었죠. 그래서 곡조도, 기독교인들이 외국의 올드랭사인 같은 곡조를 끌어다가, 가사는 천도교에서도 기독교에서도 만들고, 독립시문에 투고 형식으로도 만들고, 그래서 30여 종의 애국가가 있었죠. 어느 나라도, 이렇게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인식을 갖고 애국가를 여러 가지 만들어낸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애국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증거죠.

박인규 : 민중들의 자발적인 애국가 말고 대한제국 때인가, 공식적으로 만든 국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연갑 : 방금 말씀드린 관리들의 그런 인식 때문에, 일본의 기미가요를 알아보니 잘 됐다더라. 그런데 알아보니 독일의 에케르트라는 사람을 일본도 불러다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그런 사람을 찾아보자. 마침 에케르트가 일본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사람을 다시 불러오자고 해서 고빙을 한 거죠. 그래서 1902년에 대한제국 애국가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잘됐느냐 못 됐느냐를 검토할 만한 인식이 없었죠. 일본의 기미가요를 만들었으니까 당연히 잘했겠지 하고 1902년에 약 3개월에 걸쳐 만든 걸 악보화 해서 약 20여개국 대사관에 보냈죠. 그런데 기미가요를 들어보시면 알지만 굉장히 우울하고 무겁습니다. 우리나라는 더구나 서양음악을 접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찬송가만 외국음악으로 인식했던 단순한 음악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902년에 만든 노래가 보편화 되지 못했죠. 공식적인 것이었지만, 이미 그때는 너도나도 만든 애국가가 보편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걸 굳이 국가가 강요한다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통제력이 없었다고 할 수 있죠.

박인규 : 일본국가를 만든 사람이 만든 애국가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어찌보면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김연갑 : 그렇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총독부가 그걸 알리게 하는 걸 반대했죠. 기미가요에 대한 훼손도 있었을 거고 이미 1905년부터 통감부가 와있는 상태에서 이 노래가 보급되는 걸 막아야 되기 때문에, 그런 이중적 압력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박인규 : 그 뒤로 한 30년대까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에 지금의 가사를 붙인 게 대표적인 애국가로 알려진 거 아닙니까?

김연갑 : 1919년까지 그랬죠. 그때까지 여러 애국가가 있었는데 3.1운동을 하다보니 하나의 대표적인 국가가 있어야 되겠죠. 그러다 보니 당시 3.1운동에 앞장선 지도층들이 대개 기독교인들이었죠. 그래서 윤치호의 가사를 붙인 올드랭사인이 가장 앞서서 많이 불려지다 보니 이것으로 합일된 거죠. 그래서 1919년 3.1운동 60일 동안 가장 많이 불려진 애국가가 그것입니다.

박인규 : 지금 애국가 가사가 윤치호 작사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김연갑 : 예. 임시정부때도 많은 사람들이 김구 선생님한테 물었어요. 우리가 상해에서 부르는 이 애국가가 윤치호 작사입니까 안도산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우리가 3.1운동운동을 애국가와 태극기로 했는데 그걸 알아서 뭐하겠느냐. 그 우리가 3.1운동을 이것으로써 했다는 게 중요하지 누가 작곡한 게 뭐 중요하냐.

박인규 : 작사 문제는, 윤치호 그 분이 나중에 친일을 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죠?

김연갑 : 그렇죠. 1911년에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해 내지 않습니까. 탄압하기 위해서. 그래서 윤치호는 항복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다 보니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도 윤치호가 친일 했는데 그걸 불러야 되겠나 하는 인식으로 아마 김구 선생에게 물었겠죠.

박인규 : 1919년부터는 올드랭사인에 붙였던 애국가가 거의 대표적으로 불렸다가, 안익태 선생이 35년에 지금의 애국가를 작곡하시고, 그게 보편적으로 불리게 된 건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입니까?

김연갑 : 35년 11월에 작곡을 완성해서 12월에 미주 한인사회에서 악보를 만듭니다. 당시 신한민보에 대대적으로 기사가 나오죠. 드디어 우리도 조선인 안익태라는 사람이 작곡한 애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신 애국가와 구 애국가를 둘 다 넣은 음반을 만들었다. 이것을 팔아주시죠. 수익금은 독립운동에 쓰겠습니다. 그랬죠. 그리고 나서 미주 한인회에서, 아마도 1935년 12월에 악보가 나온 후로 바로 임시정부에 보냈겠죠. 그런데 그 당시에 사실 임시정부가 간판이 없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어디 계신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41년 독립군 성립식에서 공식적으로 임시정부에서 부르게 된 거죠. 이것을 기점으로 우리는 임시정부에서 정통성을 부여한 게 아니겠는가. 물론 그 이전에 40년도에 미주 한인회에서 임시정부에 의뢰를 하죠. 우리가 지금부터는 안익태의 이 곡을 공식적으로 부르려고 하는데 임시정부에서 허가해 달라고 했죠. 그래서 중경임시정부에서 의회를 거쳐서 1940년에 미주 한인사회에 불러도 좋다고 했고 공식화 됐죠.

박인규 : 그 전까지는 주로 미주에 있는 한인동포들이 많이 불렀겠군요.

김연갑 : 그럴 수밖에 없었죠. 우리는 식민지 사회였으니까 우리의 독자적인 국가를 갖는 걸 총독부가 허가할 리도 없었고 그게 오는 것 자체도 통제했을 상황이었으니까

박인규 : 그러다가 대한민국 국가로 공식지정된 건 건국과 함께 그렇게 된 겁니까?

김연갑 : 임시정부에서 꾸준히 불러왔기 때문에. 우리도 국내에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걸 불렀죠. 가장 결정적으로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애국가를 부르는데 안익태의 것을 부른 거죠.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8월 15일에 해방되고 나서 임시정부에서 우리를 불러서 조선으로 가는 배에 타야 되는데 그 때 애국가를 가르쳐줬다. 그 때 온 분들과 못 온 분들이 있었는데, 못 온 분들을 조사하다 보니 그 분들이 아리랑과 애국가를 부르는데 안익태의 곡을 부른 거죠.

박인규 : 최근에 와서는 애국가를 개정하자, 새로 만들자. 작사가 문제도 있고 안익태 선생 자체도 친일행적이 있지 않느냐 이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김연갑 :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안익태 선생님의 유럽에서의 활동상황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금년이 100주년이다 보니까 일부 전공가들이 독일을 왔다갔다 하면서 자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35년이 일본이 만주국을 창설한 10주년입니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일본이 3국동맹을 맺어서 활동할 때여서, 그런 기념식을 독일에서 하게 되는데 안익태 선생한테 만주국환상곡이라는 걸 의뢰했다고 해요. 기록에 남아있진 않지만 공연장면이 독일 뉴스 프로그램에 남아있었습니다. 그걸 보니까, 플랭카드에 만주국 10주년 기념음악회라고 써 있었고, 만주국환상곡이라는 걸 연주했다. 거기 안인태 선생이 지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국환상곡에서 합창부분 앞부분 8소절 정도와 만주국환상곡에 나오는 음악의 8소절이 공교롭게도 공통된다. 이것은 분명한 친일이라는 거죠. 그것이 알려지면서, 그러면 안익태도 친일혐의가 있지 않느냐. 한국환상곡과 애국가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우리가 한국환상곡과 애국가를 늘 안익태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기 때문에 애국가도 문제가 있다. 그러니 개정하자는 논란이 4월에 있게 됐죠.

박인규 : 만주국환상곡의 악보나 공연음반 같은 게 남아있습니까?

김연갑 : 그건 없고 독일의 뉴스로만 확인됐습니다.

박인규 : 애국가의 곡조 자체도 약간 우리 전통곡조와는 다르다고 지적하시는 분도 있는 것 같아요.

김연갑 : 그럴 수밖에 없죠. 안익태 선생은 서양음악을 공부했기 때문에. 그러나 국가상징이라는 건 소소한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인식하는 자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리고 기능음악은 예술음악처럼 음악성을 따져서 채택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죠. 일정부분 문제는 있습니다. 서양식 음악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와 조금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죠. 구체적 예를 든다면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가사에서 '동해의 물'인데 '동'자 띄워놓고 '해물'이니까 동쪽에 있는 해물이라는 해석이 가능하죠. 그런 일부의 문제점은 분명 있습니다. 가사는 1907년부터 있었던 거기 때문에..

박인규 : 윤치호, 안익태 선생의 친일행적, 그리고 한국적 정서와 다른 곡조같은 것 때문에 애국가를 바꾸자는 의견이 있는데, 동조하십니까?

김연갑 :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안익태의 친일혐의는 아직 혐의 정도입니다. 정확한 건 아닙니다. 윤치호는 분명 친일의사가 있었고 친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에는 윤치호가 변절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그들을 검증해서 우리 애국가를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도 똑같이 개인적으로 애국적 발상에서 만들었다는 거죠. 애국가로 채택하는 것도 민중적 합의를 거쳐서 한 거지, 그들에게 애국가로 할테니 허가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바로 개인적인 음악성이나 예술성, 또는 그들의 성향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당시 애국적인 마음에서 이것이 가장 우리 이념을 표상하기에 적합하다고 해서 채택했기 때문에 그것은 아직도 유효한 거죠.

박인규 : 누가 만들었느냐 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자발적으로 불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냐. 곧 나올 애국가에 관한 책 이름이 뭐죠?

김연갑 : '애국가연구'. 부제가 '역사성과 정통성을 중심으로.'입니다.

박인규 : 애국가에 관심있는 분들은 그 책을 보시면 지금 말씀하신 것보다 더 많은 걸 알 수 있겠네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안익태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애국가 연구를 해오고 있는 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지금까지는 애국가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아리랑에 대한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군에 가 계시면서 아리랑 연구를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연갑 : 연구는 아니고, 철책선 근무를 하다 보니 하루에 6시간 정도 북한의 대남방송을 들어야 되거든요. 꼭 시작할 때는 북한 애국가로 시작하고 추석이나 8월 15일 같은 때는 아리랑 같을 걸 방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에는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해뜨고 달뜨고 꽃도 피네' 아리랑이 이런 가사입니다. 아, 저건 참 긍정적인 가사다. 그런데 왜 저런걸 부를까. 우리가 똑같이 일제시대부터 불렀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이런 가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래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박인규 : 본격적으로 연구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김연갑 : 79년부터 관심을 갖고 전국을 답사했는데, 양주동 박사나 이병도 박사 같은 분들이 발표한 논문을 보니까, 아리랑은 아주 고대의, 오래 전의 노래다. 이렇게 화석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진도나 정선 같은 데를 가보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리랑은 계속적으로 가사가 만들어서 불려지는 거죠.

박인규 : 아직도 살아있고 진화하고 있다.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연갑 : 그렇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 세 조각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 한 덩어리 된다네.' 이런 것들은 상상도 못했던 아리랑이죠. 그래서 아, 이분들의 아리랑에 대한 연구는 옛날 연구다. 그렇다면 이렇게 싱싱한, 아직도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진 아리랑에 관심을 가져보자. 해서 79년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죠.

박인규 : 외국사람들도 한국노래라면 아리랑을 말할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죠. 아리랑이라는 게 한국문화와 관련해서 한 마디로 뭐다. 나름대로의 개념정의랄까요?

김연갑 : 글쎄요, 저도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92년도에 유네스코에서 아리랑상이라는 걸 제정했습니다. 이 분들이 구비문학이라는 제도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여기자고 하고 러시아 지역에 조사를 갔는데, 카레이스키.. 고려인들을 조사하는데 남조선이냐 북조선이야 하니까 우리는 고려인이다. 남조선 북조선 둘 다 싫다. 그래서 끝나고 가는데 이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다 눈물을 흘리더라는 거죠. 그래서, 남한사람도 북한사람도 아니라면서 이 노래를 왜 부르냐고 하니까 이것은 우리 조상들의 노래다. 그러면서 부르더라는 거죠. 아, 이 조국을 떠나있으면서도 부르고, 누구도 가르치지 않은 노래를 이렇게 계속 부른다면 이것은 세계적인 모범이 되는 노래다. 그래서 구비문학을 보존하는 제도를 만들면서 아리랑이라는 말을 썼다는 거죠. 저 역시도, 그렇다면 그동안 나온 수많은 민요와 노래 가운데서 우리가 아리랑을 민족공동체, 누구나 민족의 노래로 꼽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관심을 가져 봤는데, 우선 저항성이 있습니다. 저항하는 노래. 두 번째는 연대와 대동정신. 기쁠 때든 슬플 때든 누가 선창을 하면 그 분위기에 똑같이 감정이 몰입된다는 거죠. 신비롭죠. 세 번째는 해원상생정신이 있습니다. 그래 좋다. 이 노래를 똑같이 부르니까 같은 한국인이라는 감정을 갖는다는 거죠. 이 세 가지 정신을 아리랑이 갖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흩어져 있는 동포들 누구에게도 민족의 노래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이구동성으로 아리랑을 꼽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박인규 : 아리랑은 우리 민족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세계적인 민요들 중 하나로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김연갑 : 예. 1800년도 한미수호조약 때 우리가 국기가 없었습니다. 조약을 맺으려면 공식적인 국기를 걸어야 되는데, 그래서 급조했죠. 기록에는 일본 국기와 혼동할 만한 깃발을 급조해서 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을 연주했다. 그러니까 1800년대부터 외국인들에게는 아리랑이 인식이 됐던 거고. 또 선교사들이 이 땅을 밟으면서 놀라워 한 것은 어딜 가나 노래 부르라고 하면 아리랑을 부르더라는 거죠. 그래서 집중적으로 해외에 알려진 게 구한 말 선교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일본인들이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서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어딜 가나 아리랑을 부르는데 그것은 저항적인.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일본 등살에 나는 못 살겠네' 이런 가사를 붙여 부른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도 아리랑이 해외에 알려지게 돼서 세계인의 노래가 됐는데, 결정적인 건 한국전쟁 때죠. 19개국의 유엔 병사들이 한국에 왔는데 오기 전에 바로 몇 가지 손들어, 누구냐, 이런 걸 배우는데 노래를 애국가 말고 아리랑을 가르쳐 줬습니다.

박인규 : 그래서 일부에서는, 남북한이 국가와 국기가 다른데 통일되면 국가는 아리랑으로 하고 국기는 한반도기로 하자는 얘기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지한 얘기는 아니지만..

김연갑 : 문익환 목사가 북한에 갔을 때 김주석과 그런 얘길 했죠. 남측의 국가나 북측의 국가나 통일되면 문제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러시아 동포, 중국 동포, 우리 때문에 억지로 헤어졌던 동포들, 2세 3세들이 이 우리말은 몰라도 아리랑은 아니까 그걸 국가로 합시다. 이런 비공식적인 얘기를 했죠. 그런데 그건 정치적인 합의였습니다. 제3국에서 남과 북이 체육행사를 할 경우에만 쓰자. 단일기와 단일가를, 그리고 호칭을 코리아로 쓰자. 그런 취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북이 정치적인 모임을 하는 데도 한반도기를 걸어놓고 쓰거든요. 그것은 남과 북의 현재 상황을 모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죠. 아주 중요하게,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결과로 이것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때는 다르겠죠. 그런데 그 명분은 통일이라는 대전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국가나 애국가, 태극기는 분명히 민족공동체가, 문단 이전에 모두가 불렀던 거죠. 이것을 우리가 일시에 버릴 명분은 없죠. 그러니까 우리는 충분히 남과 북의 정치적인 합의가 아니라 민중들의 인식에서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죠.

박인규 : 정권을 가진 분들의 즉흥적인 합의 보다는 전체 국민들의 의사가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30년 동안 아리랑과 태극기, 애국가 연구를 해오셨는데 앞으로도 많이 애국가의 의미 등을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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