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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때 시민군 통역, 미국으로 추방될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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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때 시민군 통역, 미국으로 추방될 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6/21]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의사 인요한씨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행... 미국의 린튼가문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111년에 걸쳐, 4대째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삶 속에 묻혀,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말을 하며,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인답게 살았던 린튼가문 사람들...

이 가운데,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이 최근, 한국인과 부대끼며 살아왔던 지난 47년의 삶을 담은 책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을 펴냈습니다.

자신을 키운 8할은 한국의 정과 따뜻한 심성이었다고 고백하는 의사 인요한.....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을 만나봅니다.

자신이 한국에 사는 것은 선교사로의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한국이 좋기 때문이고, 이번에 책을 펴낸 것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한국인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입니다.

인요한 소장의 본명은 존 린튼으로 1959년 선교사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여사 사이의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란 그는, 영어보다 전라도 사투리가 더 능숙하고, 미국친구보다 순천친구들을 더 그리워하고 좋아합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면 의사 존 린튼이 아니라,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라고 밝히는 그는 의리와 인정을 제일로 아는 한국인의 기질을 닮기도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의예과를 다니 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아버지 때문에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 보급하는 등 한국의 응급구조시스템 개선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나아가 북한의 결핵퇴치 사업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1895년도에 처음 한국에 들어오셨는데,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게 되면 족보를 서로 캡니다. 인요한 소장님의 선조분들이 어떻게 한국에 사시게 됐고 어떻게 쭉 내려오셨는지 가계도를 좀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죠.

인요한 : 원래 우리 원적은 스코틀랜드입니다. 스코틀랜드가 상당히 센 데죠. 한국과 잉글랜드가 축구경기를 하면 스코틀랜드 사람은 아마 한국을 응원할 겁니다. 1895년도에 유진벨 조부님께서 한국땅을 처음 밟았는데 북장로교와 남장로교가 미국 안에서 남북전쟁 때문에 나눠져 있는데 그때 남장로교 출신이었어요. 잘 아시는 연희전문학교나 세브란스의전.. 연세대학교는 언더우드 가족이 세웠고 한 10년 늦게 한국땅을 처음 밟게 되는데, 너희들은 좀 골치아픈 동학사건 난 데로 가라.. 그래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주로 호남지역으로. 처음 목포에 가셔서 할머니가 1899년 목포 태생입니다. 할아버지는 주로 전주, 익산.. 그당시 이리, 군산에서 활동하셔서 아버지가 군산에서 태어나셨구요. 저는 집은 순천인데 병원 신세를 지느라 전주 여수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주에서 산 게 아니고 곧바로 순천에 가서 살았습니다. 전주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병원신세만 졌습니다.

박인규 : 그냥 출생만 전주고 사신 건 순천.. 유진벨 선생님부터 따지면 전라도 토박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한국 성씨를 인씨를 쓰십니다.

인요한 : 할아버지가 린튼을 인으로 고친거죠. 두음법칙 전에는 린이었고, 린을 인으로 고친 거죠. 요한은 세례명이 아니고.. 개신교인데, 존입니다. 존 린튼이 인요한이 됐는데 전라도에서는 어린 시절에 '짜니'였죠.

박인규 : 몇 달 전인가 저희 프로그램에 형님인 스티브 린튼.. 인세반 선생님이 나오셨는데, 많이 다르시네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97.3MHz)'

인요한 : 둘째 형님입니다. 둘째 형님은 학자 스타일이고 어렸을 때 결핵도 앓았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안 좋고 키도 작고. 저는 키가 크고. 기질상 저희 형님은 물이고 저는 불입니다.

박인규 : 이번에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라는 책을 내셨어요. 원래 의사선생님인데.. 이런 책을 내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요한 : 한국인이 너무 각박해지고 있어요. 물론 제 자신을 남한테 설명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갈수록 새로 만나는 사람을 피하게 되구요. 중고등학교도, 대학교 친구들도 중요하지만.. 의대 친구들도 병원에서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지만 그 친구들보다 옛날 친구들이 그립고, 한국이 변해가고 있고. 등잔밑이 어둡다고 할까요? 한국인이 한국인의 변해가는 모습을 지금 잘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옛날 기억을 좀 살려보고.... 물론 어려웠습니다. 먹는 거 입는 거 다 귀했죠. 어려웠지만 사실 그때가 더 좋았습니다.

박인규 : 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서로를 보살피고 나누는 정이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인요한 : 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기 힘드니까 아마 거기에 중점을 두고 목적을 위해서 뛰었지만, 과정에 더 충실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분들은 오로지 목적만, 결과만 따져요. 외국인들도 저한테 오면 한국이 왜 이러냐고 비판을 많이 해요. 그러면 제가 늘 얘기하는 게, 서울이 한국의 모습이 아니다. 지방에 한 번 가봐라. 지방 사람들과 앉아서 밥 한 끼 먹어라. 얼마나 여유있고 친절하고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이건 아니라는 표현을 여러 번 합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 같은 걸 잃어버리고 있다는 걸 지적해 주고 싶다. 그런 말씀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순천에서 쭉 사셨다고 하는데, 아무리 쭉 사셨다고 해도 외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왕따 같은 거 당하지 않으셨는지...

인요한 : 재미난 얘기가 많이 있죠. 머리를 다 빡빡 깎았죠 그 당시에. 버짐도 걸리고.. 그래서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남자아이한테는 그게 편하죠. 그래서 머리가 노출되니까 '앞뒤꽁치 삼천리 왔다갔다 육천리 돌아가면 구천리' 머리가 길다는 놀림... 꽁치. 그거하고, 표현하기가 좀 뭣하지만 딱 한 가지가 불편했습니다. 허심탄회하게 그냥 말씀 드릴게요. 웅덩이나 저수지에서 목욕할 때 다 벗고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뭐시기가 까졌네...

박인규 : 일찍이 고래를 잡으셔서..(웃음)

인요한 : 그게 좀 괴로웠습니다 사실. 그런데 그거 외에는, 거울을 보고 살지 않으니까 그냥 뛰어노느라 바빠서... 아이들이야 나를 외국인으로 봤겠죠. 그러나 감사한 것은, 전라도 시골에 있는 아이들은 그런 거 따지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은 일은 없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순천이 고향이신데, 지금도 가끔 가보십니까?

인요한 : 한 달에 두 번은 내려가죠.

박인규 : 자주 가시네요.. 친구분도 그쪽에 많이 계시겠네요?

인요한 : 예. 우선 아버님 산소도 거기 있고, 내려가면 어머니도 순천에서 아직 기독결핵재활원을 운영하시고.. 아직도 저희 외할머니가 살아 계세요. 97세신데, 그래서 어머니가 미국에 계신 시간이 많은데, 어머니도 오시고 친구도 만나고, 또 지리산도 있잖아요. 지리산에 가야 됩니다. 답답할 때는 반드시 지리산에 올라갑니다.

박인규 : 외할머님은 살아계신데, 아버님은...

인요한 : 84년도에 교통사고로.. 불행하게도 저희 집 앞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음주운전을 한 관광버스 기사가 사고를 냈는데, 한 4시간 살아계셨어요. 순천병원으로 옮기고 구급차가 흔치 않아서 택시로 광주로 옮기다가 택시 안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박인규 : 응급시스템이 제대로 됐으면....

인요한 : 그렇죠. 누워서라도 갔으면 혹시라도.. 그런데 이미 돌아가셔서 기독병원에서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박인규 : 아버님께서 순천의 검정고무신이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굉장히 지역개발이나 봉사 같은 걸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인요한 : 예. 아버지는 농어촌을 좋아하셨습니다. 농어촌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버지 일생의 일이었는데, 고무신을 그렇게 좋아했고 심지어 지리산을 종주할 때도 고무신을 신으셨어요. 70년도에 우리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종주를 하는데, 지나가는 등산객들을 만났는데 우리는 그 사람들이 장비를 거창한 걸 갖고 있어서 신기하게 봤고 그이들은 저희 아버지 고무신 보고 한탄을 한 거예요. 어떻게 고무신을 신고 종주를 하느냐. 그래서 서로 즐거웠습니다.

박인규 : 더 진짜 한국적이시네요 어떻게 보면... 어머님 되시는 로이스 린튼 여사께서는 지금도 순천에 계시다고 했는데 주로 결핵퇴치사업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인요한 : 예. 어머니는 60년도 초부터 지금까지.. 처음에는, 60년도 초에 순천에서 수해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전염병이 돌았고, 그렇지 않아도 결핵환자가 많았어요. 그래서 광주 기독병원과 협조하다가, 환자를 옮길 게 아니라 의사가 광주에서 좀 오는 게 좋겠다고 해서 요양소를 세웠어요. 우리 집에서 시작을 했어요. 집이 진료소였는데... 큰형님들 셋 다 결핵을 앓았구요, 그래서 어머니가, 우리 가족도 결핵에 걸렸고, 남의 일이 아니구나 해서 40여 년동안. 또 어려운 사람들이 결핵에 걸립니다. 못 먹고 제대로 자기 몸을 관리하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아주 보람있는 사업을 해오셨는데.. 지금은 더 어려운 사람들이 결핵에 걸립니다. 노숙자나 사회에서 소외받은 사람들이 걸립니다.

박인규 : 인요한 소장께서 의사가 되신 건 그런 어머님의 결핵퇴치사업 같은 활동을 보시면서..

인요한 : 예. 어머님의 사업을 보고 감동받은 것도 있지만, 저는 과학을 좋아했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는데, 과학을 하면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직업이 별로 없어요. 그 중에 의사가 제일 좋을 것 같았습니다

박인규 : 이번에 책을 내시면서 전통적인 심성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요한 소장같은 경우는 한국에 사시고 한국인들과 사귀면서, 한국인의 정을 느낀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인요한 : 제가 외국인학교 갈 때.. 10대고, 엄청나게 격동기죠. 순천에서 아이들과 뛰어놀다가 갑자기 육사같은 학교를 가게 된 거예요. 그 육사학교에서 전환점이 있었어요. 최기호라는 형님이 계셨어요. 하루는 미국문화도 싫고 다 싫어서 제가 외국인학교를 빠져나가야 돼요. 대전에 있는 학교인데, 시내를 나갔다 오면서 그 형님 몰래 양복과 신발을 다 신고 갔다 왔는데. 많은 경우에, 서양아이들은 신앙도 좋고 밤새도록 기도하지만 사실 아침에 치약을 빌려달라고 하면 안 빌려줘요. 니꺼 내꺼...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허락도 없이 기호 형님 옷을 다 빌리고 구두를 신고 시내를 나가서 멋지게 놀다 들어오는데, 들어오는 길에 가슴이 무겁더라구요. 두드려 맞을 텐데.. 그 당시에는 맞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맞아야겠다 하고 방으로 갔더니, 이 형님이 미적분을 풀고 있었어요. 근데 거기서, "형님, 이렇게 이렇게 해서 양복을 입고.." 말을 했는데 "잘했다. 거기 걸어놔라." 그래서 "형님, 구두도.." 했더니 "거기 벗어놔." 하시더라구요. 그 시점에 제가 살아온.. 동과 서를 종교적인 것 보다는 문화적으로 비교하게 됐어요. 야, 저렇게 여유가 있을 수가 있나. 너무 좋다. 그래서 나는 변하지 않아야지. 한국의 문화가 사실 미국보다 더 우수하구나. 여유가 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돼. 그런 확신을 가졌어요.

박인규 : 최기호라는 형님이 보여준 그 태도야말로 한국인의 정인데, 요즘은 그게 좀 없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인요한 : 지금은 꼭 서양사람들처럼 니꺼 내꺼 따지고. 안 만나고 불편해하고 모임에도 안 가고. 좌절하면 한강으로 풍덩해 버리고. 이게 무슨 한국인의 모습입니까..

박인규 : 저희도 반성을 많이 해봐야겠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4대째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과 부대끼며 살아온 47년의 삶을 담은 책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를 펴낸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계속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인요한 소장께서.. 그 당시 폭도라는 말을 쓰고 그랬는데, 폭도의 주모자로 몰리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요?

인요한 : 저로서는 제 인생을 바꿔놓은 일이었는데요. 말씀 드리기 전에, 저는 육체적 고통을 받거나 감옥에 끌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내용을 얘기하기 전에 늘 송구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희생당한 그 분들의 일생에 되돌이킬 수 없는 변화. 죽기도 하고 불구도 되고 가족도 잃고 망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 분들은 회복이 안 됩니다. 그 분들 앞에 감히 창피스럽지만.. 제 경험은, 호기심이 있어서 광주에 들어갔어요. 5.18이 일어난지 일주일만에, 그 다음 일요일에. 도대체 거기서 나온 얘기를 못 믿어서 친구랑 갔는데. 아주 간단히 얘기하면, 도청 2층에서 시민군 대표가 나오고, 외신기자회견때.. 북으로 향할 총이 왜 남으로 향해 있느냐 어떻게 우리 국군이 선량한 시민을 죽이느냐.. 그런 뜻에서 광주의 정확한 실상을 외부에 전달했습니다. 세 시간 동안 기자회견 통역을 했고 시민군대표도 굉장히 의젓하게 나와서 발언을 했고. 저도 통역하면서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요. 광주가 폭도 분위기가 아니고 장례식 분위기였습니다.

박인규 : 그때가 군대가 막 진입하기 직전이었나요?

인요한 : 진입하기 직전이고 에워쌌을 때죠. 그걸 마치고 나오면서, 내일도 다시 좀 해달라. 그런데 같이 있는 친구 때문에 그날 나와서 우리 아버지 설득을 받아서 이걸 대사관에 알려야 된다. 아버지는 미국 분이니까 미국쪽에 실상을 알려야 된다. 너무 기가 차다. 그래서 열심히 했는데 한 2주쯤 지나서 또다시 미국 대사관을 가게 됐어요. 이번엔 소환장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가봤더니 총영사가, 당신이 데모를 주동했다는 편지가 넘어와 있대요. 그래서 너무 흥분하고 격분하고 총영사한테 달려들고. 이 양반아 내가 무슨 데모 주동을 하냐 통역을 했지. 그리고 진실이 중요하지. 그때 미국 정부에, 외국과 국내에서의 잣대가 다르구나.. 해서 참 섭섭했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미국에서는 인권이나 진실을 소중히 하면서도 한국에서는 그것보다 외교적인 것을 중요시하고..

인요한 : 너는 외교적인 문제야. 진실은 나와 관계없어. 끔찍한 얘길 해요. 네 몸에 총알이 지나갈 수도 있고 교통사고도 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가 막질 못한다고. 그래서 한 마디 했죠. 당신이 우리 세금을 받아먹고 사는데 무슨 소리냐.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당신은 나를 지켜주고 사람도 파견하고 또 한국정부에 내가 데모를 주동하지 않았다는 변명도 해줘야 되고. 그랬더니 골치 아프다고 나가라고 하더라구요. 아무 것도 보장 못한다며. 그래서 참 그때로서는 암담했죠.

박인규 : 잘못하면 영영 한국을 떠날 수도 있었던 때였네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97.3MHz)'

인요한 : 예. 아버지하고 대화를 좀 나누시더니 아버지가 나오셔서 소리를 지르면서 나가라고.. 아버지가 그 당시 살아계셨는데, 한국에서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네가 바로 잡혀갈 거다. 외국인도 잡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두 번째는 네가 미국가면 이 정권이 한 10년 갈 거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 몰라요. 그리고 세 번째는, 네가 지방에 가서 봉사하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살면... 너는 어쨌든 한국정부로부터는 죄인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가서 봉사하고.. 저는 결혼할 여자도 만났고 떠나기 싫었죠. 하지만 아버지 시골 내려가겠습니다.. 해서 한 2년 동안 형사들과 살았죠. 순천에 내려가서 정보3계. 외사. 그 분들을 마음으로 저는 동정했죠. 업무상 저를 감시했지만. 그래서 형사들과 아주 재밌게 지냈습니다.

박인규 : 같이 지내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미운정 고운정 든다고..

인요한 : 지금도 웬만한 순천 근처의 파출소에 들어가면 그 당시 저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이 있어요.

박인규 : 인소장님께서 막내아들이시고.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아버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때가 1984년도였다고 들었습니다.

인요한 : 의대 2학년때, 집에 돌아갔는데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교통사고로 세상 떠났다고 빨리 내려오라고. 저희 집안에서는 아주 기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박인규 : 그 일을 계기로 지금 하시는 사업 중 이른바 한국형 응급구조시스템..

인요한 : 제가 수련 마치고 한국에 91년도에 들어왔는데 92년도에 돈을 좀 보냈어요. 아버님 기념사업으로 그 지역에 구급차를 한 대 기증하고 싶다. 그게 씨앗이 돼서. 그땐 저도 몰랐고, 구급차들이 상당히 열악하고. 그래서 외제를 들여오는 것보다 한국 실정에 맞는 한국형 엠뷸런스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지금 119에 보급돼 있는 탑자형으로 된 차들이 그때 만든 엠뷸런스입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인요한 소장께서 설계를 하신 겁니까?

인요한 : 그렇습니다.

박인규 : 대충 몇 대나 보급이 돼있나요?

인요한 : 삼사천대는 되는 것 같아요. 뿌듯합니다. 꼭 우리 자식을 보는 듯한 기분이에요.

박인규 : 인요한 엠뷸런스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인요한 : (웃음) 아닙니다. 거기까지는 아니구요.

박인규 : 결핵환자가 북한에도 굉장히 많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인요한 : 96년도에 저희 어머니가 호암상을 수상하셔서 그 상금을 가지고 남한에 구급차도 줬는데, 형님이 유진벨 재단을 만들어서 사업하고. 북한에도 한 대 기증하자. 그때는 북한에서 남조선 것은 싫다 미제를 달라.. 희한한 일이죠. 그래서 미국것을 보냈어요. 그래서 97년 1월에 만수대 앞에서 김영남 외교부장님한테 어머님이 나가서 드리는 걸로. 남한에도 줬고, 북한에도 순수한 선물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어요. 미망인이 오셔서 자기한테 주는 선물이니까 갑자기 오찬이 만찬이 되고. 그리고 식량지원사업을 형님이 그때 했는데, 어머님이 결핵사업을 한다고 하고. 아이들이 셋 다 결핵에 걸렸다는 걸 안 다음에, 그럼 우리나라.. 조선인민주의공화국의 결핵사업을 도와달라고 정식 공문이 온 거예요. 그래서 유진벨 재단의 결핵사업은 어머님의 선물을 계기로 전환이 돼서, 식량지원에서 결핵사업을 7,8년 했는데 한 3년 전에 북한사람들을 300억 이상 모금해서 도왔거든요. 돈으로 도운 게 아니라 물자를 사서. 그런데 펑안남북도만 해라. 성공하는 것을 좀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너무 가까워졌고.

박인규 : 그 동안 한 20차례 북한을 다녀오셨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한국인의 정.. 그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과 어떻게 다르던가요?

인요한 : 북한의 주민들은 전라도의 30년 전과 같습니다. 가치관도 같고, 변하지 않았고. 우리가 눈부시게 발전을 했는데 그 분들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게 다 나쁜 건 아니에요.

박인규 : 우리가 물질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으로나 인간관계에서는 상당히 잃어버린 게 많이 있다.

인요한 : 예. 순수합니다 그 분들은.

박인규 : 책을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그런걸 일깨워주고자 말씀하셨지만, 이 자리를 빌어 청취자들에게, 한국인들이 사는 데 제일 중요한 건 어떤 것이다.. 그런 걸 좀 말씀해 주시죠.

인요한 : 어려울 때 단합하고.. 전라도 같은 경우는 동학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소외를 받았기 때문에 끈끈한 순정과 의리랄까요, 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이 여러 가지로 식량사정 때문에 상황이 나빠졌는데, 그래도 정이 남아있거든요. 한국인들은 미국식 표현입니다만 배꼽을 너무 보고 살아요. 내 자식이 좋은 학교 가야되고. 내가 일해야 되고 나, 나, 나. 그게 서양이에요 사실. 서양사람들의 이기적인 문화에요. 바로 제가 싫어했던 서양쪽의 문화로 가고 있으니까 안타깝죠. 그럼 이걸 비판만 할 게 아니라 해결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결할 건가. 북한은 물론이고 이제는 남을 도와야 됩니다. 남을 돕고 남이 어려운 것을 보면 결국 내 자신을 돕는 겁니다.

박인규 : 진짜 소중한 게 뭔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는 게 뭔지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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