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교육부의 '밥상머리 교육'? 밥 먹다 체할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교육부의 '밥상머리 교육'? 밥 먹다 체할라"

['학교폭력'을 말하다] 인권교육센터 '들' 배경내 상임활동가

학교폭력 문제가 지난 2일 대구 고등학생의 자살을 계기로 다시 뜨거워졌다. 축구를 좋아하던 16살 김 모 군의 투신은 중학교 때부터 계속된 괴롭힘 문제여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올해 초 김 군은 A4 용지 세 장 분량으로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김 군이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매일 잡혀가는 모습이 나올 것"이라는 김 군의 말처럼 "OO 초등학교 앞 CCTV"만 알고 있었다.

인권교육센터 '들'의 배경내 상임활동가를 만난 건 그래서였다. 폭력의 반대편이 있는 개념이 인권이다. 죽음으로 몰고간 폭력을 'CCTV'만 알고 있었다는 현실은, 동시에 우리의 학교가 얼마나 폭력에 무감각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인권이 그저 교과서 속 개념으로만 여겨지는 학교 현실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하다 인권교육센터 '들' 설립을 주도했고,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에도 참가했던 배경내 활동가는 학생 인권에 대한 보장이 학교 폭력을 줄이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보수 언론의 주장과는 정반대다. 학생 인권 보장이 교권 약화를 낳고, 이는 다시 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통제를 완화해서 학교 폭력을 더 심각하게 한다는 게 보수 언론의 주장이다. 하지만 배경내 활동가는 가해자 일부를 솎아내서 처벌하는 방식의 학교 폭력 대책은 오히려 폭력의 방관자를 양산할 뿐이라고 본다.

학교 공동체 전체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작업이 우선이라는 것. 인권에 무딘 교사와 학생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서도 무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맞을 짓'을 한 학생을 때려도 된다는 생각,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혀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통하는 학교에서 힘이 센 아이가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일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번에 자살한 학생은 3년 전 가해자와의 싸움에서 진 뒤에 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지독한 괴롭힘이 3년이나 이어졌지만, 주변에선 아예 몰랐거나 설령 알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폭력에 무덤덤한 학교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이는 아이들이 '주류 엘리트', 요컨대 사회에서 강자로 통하는 어른이 되기만을 바라도록 몰아가는 교육 풍토와도 무관하지 않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무시당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을 내면화한다.

'싸움'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약자에게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시험 점수 경쟁'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닥치고 시험 공부'라는 말이 공공연히 통하는 학교에서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건 그래서 어쩌면 필연이다.

배 활동가가 정부의 '학교폭력 예방 대책'이 지닌 한계를 지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약자의 인권에 대한 배려가 없는 곳에서 '폭력은 나쁘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아무런 메아리가 없다는 것. 오히려 아이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지난 1일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있는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배경내 활동가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했다. <편집자>

▲ 인권교육센터 '들' 배경내 상임활동가 ⓒ프레시안(최형락)

"폭력은 '괴물'만 휘두르는 게 아니다"

프레시안 : 교육과학기술부가 만든 '학교폭력 예방 대책'이 때론 인권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폭력을 예방하는 대책이 반(反)인권적이라면 상당히 역설적이다. 마침,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 비슷한 취지의 글을 썼다.(☞바로 가기 : "여자애가 '호모'라고 놀려서 때렸다는 남자아이, 어떻게 해야 할까?")

배경내 : 교육부의 '학교폭력 근절대책'에 따라 올 3월부터 학교생활기록부에 가해학생의 폭력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이들을 폭력 고위험군으로 분류해 기록한다는 것인데, 이는 폭력을 가진 인자들의 징후를 미리 발견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 대책이 전제하는 것처럼, 폭력이 특별한 몇 사람, '괴물'들만 저지르는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실제로 이번 대구 자살 사건의 경우, 가해자는 내성적인 성격에 성적도 상위 20퍼센트 이내였다고 한다. 학교 폭력 가해자의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편집자>)

폭력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특정 개인의 속성을 발견해서 특별히 관리하는 방식으로 예방되지는 않는다. '관계와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흔히 인권을 개인 단위로 행사되는 권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이다. '인권이 보장된다'라고 했을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인권 친화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내놓은 학교폭력 근절대책은 이런 '관계'의 문제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문제가 있는 개인'을 찾아내면 된다는 식의 대책은 의미가 없다.


"차별 해결 없는 폭력 해결은 불가능"

크게 세 가지를 질문해 보자. 먼저, 폭력의 원인을 어떤 방식으로 찾을 것이냐? 무엇이 폭력을 키우고 있는가? 두 번째, 폭력의 피해가 왜 그토록 치명적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격하는 사람이 왜 증언자가 되지 않고, 방관자 혹은 동조자가 될까?


먼저 첫 번째 질문이다. 폭력은 우연히, 개인적으로, 비이성적인 분노가 순간적으로 폭발해서 행사되는 게 아니다. 폭력의 대상을 발견하고, 행사되는 과정에 폭력의 원인이 있다. 한마디로 '차별'이다. 그래서 차별의 문제를 명확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차별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결국 힘의 서열 관계를 함께 다룬다는 것이다. 폭력은 늘 강자와 약자 사이의 '차별' 속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지금 학교폭력 대책에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다. 그래서 학교폭력의 뿌리를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폭력 가해자인 학생들을 만나면, 대부분 "걔(피해자)가 맞을 짓을 했다"라고 이야기한다. '맞을 짓을 했다'는 말은 폭력을 행사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을 경미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피해자에게 원인을 찾을 때 자기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맞을 짓을 했으면 때려도 된다'라는 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분명히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다.


"'맞을 짓' 했으니까?…폭력 피해자는 두번 운다"

프레시안 : '폭력이 아예 없는 세상'은 어차피 불가능한 것 아닌가.

배경내 : 그렇다.근본적으로 폭력이 없는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폭력을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폭력이 발생하는 빈도를 약화시키거나, 폭력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다루는 힘이 강해지거나, 아니면 피해자에게 남는 흉터나 상처가 덜 치명적이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세 가지일 것 같다.

학교에선 맞아도 되는, 쓰레기 취급을 당해도 되는, 심부름해도 괜찮은 아이로 여겨지는 학생이 꼭 있다.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문화다. 그리고 이런 문화가 생겨난 데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네가 잘못했으니까 맞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지 않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학생들이 폭력 피해자가 됐을 때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이는 앞서 말한 세 가지 질문 가운데 두 번째와 관계가 있다. 우리가 폭력 자체를 없애지는 못해도, 폭력이 피해자에게 덜 치명적이게끔은 할 수 있다.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문화가 바뀌어야 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정부의 대책에선 이 대목이 빠져있다.


"아이들은 왜 폭력을 방관하기만 했을까"

이제 앞서 말한 세 가지 질문 가운데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왜 아이들은 폭력 사건의 증언자가 되지 못할까. 왜 방관자 혹은 동조자가 될까. 앞서 한 이야기와 맞물린다. '맞을 짓'이라는 게 있다는 문화 속에선 아이들이 굳이 도덕적 긴장을 무릅쓰고 폭력 사건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쓸데없는 데 신경 끄고 공부나 해라"라고만 하는 학교 문화 역시 이유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생겨난 문제에 대해 결코 '해결자'로 초대되지 않는다. '어른들이 해결해줄 테니, 너희는 공부만 하라'는 식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죽고 나니, 화풀이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너희는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느냐"라고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늘 공부 외의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던 어른들이 이렇게 돌변하면, 아이들도 당황스럽다. 이런 식으로는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이들이 증언자로 나설 수가 없다.

폭력 자체를 근절할 수 없다면, 중요한 건 일종의 탄성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폭력 피해에서 회복할 수 있는 탄성 말이다. 이런 탄성을 키우려면, 어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일관돼 있어야 한다. 언제는 '맞을 짓' 하면 때려도 된다고 하다가, 학생들끼리 생겨난 폭력 사건에선 무조건 때리면 안 된다고 하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세상에 '맞을 짓'이란 없다", "'쓰레기' 취급을 당해도 싼 사람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보내야 한다.

"'안도감' 때문에 때린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아이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만나는 어른들에게서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경험하니까, 어른들이 '폭력은 나쁘다'라고 해도 아이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설명으로 들린다.

배경내 : 물론, 학교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는 아주 복합적이다. 아이들이 폭력 피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유 가운데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다'라는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맞을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약하니까 맞았다'라는 생각도 있다. 이 대목도 잘 살펴야 한다.

범죄자들이 폭력을 휘두를 때, 그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안도감'이라고 한다. '쾌감'이나 '우월감'이 아니다. 왜, 안도감일까? '내가 때리는 동안에는 맞지 않는다'는 안도감이다. 많이 맞은 사람은 남을 때려서 안도감을 얻으려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논리가 폭력 피해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는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다만, 폭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폭력을 부른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자기보다 (폭력의 서열에서) 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서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호모라고, 동성애자라고 놀림 받았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때리고 강간한 사건이 있다. 강간으로써 자기가 남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소수자로 배척된 경험이 새로운 약자를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 경우다.


"학교 폭력 대책, 어려운 가정에 대한 편견 조장 말아야"

프레시안 : 하지만 걱정스런 면도 있다. 최근 학교 폭력이 쟁점이 되면서, 가정 및 사회의 구조적인 면에서 원인을 찾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가 자칫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최근 <중앙일보>가 강력 범죄자들의 어린 시절을 분석해 통계를 냈더니, 이혼·가정 내 불화 등 부모로부터 폭력에 노출된 경우가 66.7퍼센트였다고 보도했다. '폭력 가해자는 문제 가정에서 나온 괴물', '이른바 문제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위험하다' 등의 편견이 생긴다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다.

배경내 : 폭력 문제에 대해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잘못이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 해서 꼭 폭력적인 성향을 띠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절대 우리 부모 같은 존재는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폭력에 대해 성찰하는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다. 또 폭력성의 원인이 꼭 가정 때문인 것만도 아니다. 이른바 '정상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폭력성을 띠는 경우도 많다. 폭력을 배우는 곳은 가정 외에도 아주 다양하다.

중요한 건, 폭력성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이다.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약자에게 폭력을 재생산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폭력이 줄어든다.

어차피 아이들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어떤 부모를 만나건 아이들이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어른으로 자라게끔 하는 일은 학교와 사회가 할 수 있다. 학교가 할 일은 그것이다. 내가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수 있게끔 하는 것, 폭력의 방관자로 머무르지 않을 용기를 낼 수 있게끔 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보면, 교육과학기술부가 만든 학교폭력 고위험군 분류 기준이 참 안타깝다. 이 기준은 '가난한 집 아이들은 폭력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라는 편견에서 출발한다.

이런 분류 기준이 오히려 가난한 집 아이들에 대한 차별적인 낙인효과를 낳고, 결국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폭력의 피해자로 만든다.


ⓒ프레시안(최형락)

"학교는 가정 탓, 가정은 학교 탓, 그도 안 되면 게임 탓"

프레시안 : 폭력의 구조적 이유를 찾는다면서, 실제로는 사회, 경제적 약자들에게 폭력의 원인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책임한 짓이다.

배경내 : 자기 자녀가 가해든, 피해든 폭력을 경험했다고 하면, 부모들이 깜짝 놀라면서 보이는 반응이 있다. "우리 아이가 뭐가 모자라서?"라는 것이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폭력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된다는 편견 때문이다.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에게 자녀의 폭력 사건은 대단한 충격이다. 동시에 이 경우는 해법을 찾기도 몹시 어렵다.

하지만 '가정 내 문제'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관계'다. "이 친구한테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만한 사람이 있었을까"가 "부모가 그렇게 길렀느냐?"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다. "누구든 간에 의지할만한 사람이 있는가?", "학교에서는 어떤 사람으로 대접받았나?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나?"라는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

자기 책임을 벗어나는 방식, 서로 뺑뺑이 돌리는 것, 요컨대 학교는 가정 탓하고, 가정은 학교 탓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친구 탓하고, 정 안되면 게임 탓하고, 이렇게 핑퐁게임을 하는 것은 이제 멈춰야 한다.

"폭력 앞에서 쪼는 건 당연, 문제는 그 다음"

프레시안 : 앞서 한 말 중 인상 깊었던 것이 '아이들이 왜 학교폭력의 방관자가 될까'라는 질문이다. 학교폭력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 부분은 많이 안 다뤄진 것 같다.

대안교육 전문지 <민들레> 발행인 현병호 씨는 "싸울 때 제대로 싸울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이 불의 앞에서 분노할 줄 아는 건강한 시민을 키우는 것이라면, 학생들이 눈 앞에서 뻔히 벌어지는 폭력을 '나 몰라라' 하는 어른으로 자란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로 가기 :
"'일진' 솎아내며 학교폭력 해결?…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

아이들 입장에서는 '맞을 짓이다'라고 생각해서 폭력을 방관할 수도 있겠지만, 속으로는 '어? 저거 맞을 짓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방관하는 경우도 많을 것 같다. 보수언론 식으로 진단하면 "일진 애들이 너무 흉포해서, 무서워서 그렇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배경내 : 누군가가 힘을 괴팍하게 휘두를 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쪼는' 것은 당연하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것을 탓하면 안 된다. 그럼 그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진짜 중요한 문제다.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니까 아이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친다 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한계가 있다. 폭력 문제를 '나 홀로 맞서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권 문제에선 '당사자성'이라는 개념이 자주 쓰인다. 하지만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 개개의 개체로만 다루는 것이다. 이 경우, 폭력의 목격자들이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같이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의 학생들의 삶에서는 사라진 경험 중 하나다. 이런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의견을 모아 서명을 받고, 집회를 열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인간은 '함께'여서 용기를 낸다"

폭력 앞에서 겁이 나다가도, 누군가가 "저건 잘못인 것 같은데?"라고 지적하고, 주위에서 "맞아, 맞아"라고 호응을 해주면 상황은 바뀐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상황에 개입하게 된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용기 있는 게 아니다. '함께'여서 용기를 낼 수 있다. 이처럼 함께 용기를 낸 경험을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의 학교는 이런 관계들을 해체하게끔 되어 있다.

지금 학교 환경에서는 폭력과 불의 앞에서 "네가 잘못한 것 같은데"라고 얘기하도록 장려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는 여럿이 얘기하면 "대표가 혼자 말해"라고 말한다. 집단적으로 문제를 푸는 경험을 통제하는 것이다. 학교는
한편으로는 집단주의적 문화를 강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그룹을 형성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중성이 있다.

학생이 학교 폭력의 증언자가 되기 힘든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 입장에선 증언자가 되는 게 위험한 일에 '연루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려면, 눈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불의가 결국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느껴야 한다. 공동체가 겪는 문제에 대해 함께 문제를 풀어간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학생 인권에 대한 보장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이 일방적인 훈육 대상에서 벗어나 인권을 지닌 주체로 인정받아야 가능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잘못했어요. 사과하세요…상황이 '탁' 터지면서 서로 '실'이 이어지는 경험"

얼마 전 충북 음성에서 과학 교사가 학생 두 명을 불러서 중력의 원리를 설명한다며 서로 잡아당기기 했는데, 몸집이 큰 여학생이 수치스러워 울었다. 그때 지켜보던 한 학생이 "선생님이 잘못하신 것 같은데요, 사과하세요"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가해 교사와 피해 학생에게만 국한됐던 당사자성이 '선생님이 사과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얘기한 용기 있는 학생 덕에 상황이 '탁' 터지면서 서로 '실'이 이어지는 것이다. 다른 학생들도 "맞아요, 선생님이 사과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게 됐고, 결국 선생님이 여학생에게 사과했다.


(지난달 17일 충북 음성의 한 중학교 과학 교사가 '중력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몸집이 뚱뚱한 학생과 왜소한 학생을 불러 서로의 손을 당기게 했다. 이 과정에서 몸집이 큰 학생이 수치심에 울음을 터트렸고, 이를 지켜보던 학생들이 교사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일이 '학생들이 과학 수업 중에 실수한 교사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게 만들었다'라고 소문이 나면서 충북교육청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21일 충북 교육계와 교과부는 교사가 자세를 낮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달랬던 모습이 '무릎을 꿇었다'고 와전된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학부모들은 "교사가 무릎을 꿇으면서 학생에게 사과하는 것을 보면 교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것 아니냐"라고 비난 했고, 보수 진영은 이를 '교권 침해'로 몰아갔지만, 잘못된 사실 관계에 기반한 주장이었다. <편집자>)


"잘못은 피해자에게 했는데 반성문은 교사에게. 그리고 상황 끝?"

ⓒ프레시안(최형락)
이처럼 '탁' 터지면서 '실'이 이어지는 경험이 다양한 상황에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학교 폭력에 맞서는 힘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여기는 접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시간'이다. 예컨대 학생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고 하자. 사건을 차분히 들여다 보고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학교에선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폭력 사건이 눈에 띄자마자 "야, 네가 잘못했다"라며 교사가 잘못한 사람이 누군지 지정해준다. "사과해, 사과 안 해? 그럼, 너 잘못했어. 벌점!" 아니면, "너 잘못했으니 맞아야 되겠구나"라며 (친구를) 때렸다고 (교사가 학생을) 때린다.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교육이 진행됐다.

그런데 이 방식이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방식이 아니다. 내가 친구를 때렸는데, 반성문을 내는 것은 선생님이다. 선생님에게 '잘못했다'며 반성한다. 또 친구를 때려서 벌점을 받았는데, 교무실 청소하고 상점을 받아 잘못이 상쇄된다. 이런 게 지금 학교에서 이뤄지는 훈육 시스템이다.

학교에서는 벌을 준다며 가해자와 피해자로 이어진 끈을 끊어놓고 있다. 걸리면 재수 없을 뿐이고, 교사가 두려워서 숨기거나 피할 뿐이다.
학생들 입장에선 '우리가 함께 이 상황을 책임지고, 함께 가해자에게 벌을 줘야 한다'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다. 벌주는 사람(교사)이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끼리 책임지게 하는 방식을 생각해봐야 한다.

"'신경 끄고 공부나 해!'…폭력의 방관자로 자라는 아이들"

그래서 현병호 발행인의 말처럼 '제대로 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폭력과 불의에 대해 제대로 싸운다는 것은 어쨌거나 "아!"하고 소리를 내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 소리를 낸다는 것은 "내가 이 상황에서 같이 아프고 힘들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폭력 상황이 자기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해하는 '해석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쓸데없는 데 신경 끄고 공부나 해"라며 학생들이 서로의 관계, 문화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아이들은 '폭력의 방관자'로 자란다.


프레시안 : 학생들은 폭력을 당해도 '(부모나 교사에게) 얘기를 안 하는 게 낫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일 게다.

배경내 : 사실 어른들은 목격자인 학생들에게 상황이 그렇게 심각해졌는데도 말을 안 했다며 굉장히 분노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잃고 나서는 안타까워하면서 "왜 우리에게 얘기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돼 있나.

아이들이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얘기할 것 같은가. 부모?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먼저 해결하려 한다. 문제가 발생한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 주위의 친구들과 얘기해보고 정 안 되면 부모에게 가는 게 순서다.


"폭력 당하며 왜 말 안 했냐고?…어른들은 아이들 얘기 들어줄 준비 돼 있나"

보통 아이들에게 "그래, 너 그렇게 힘들었을 때 어떻게 했니?" 하고 물으면, "얘기할 사람이 없었어요"라고 답한다. 학교폭력 피해자나 가해자의 가정이 도덕성과 권위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라면, 아이 입장에선 자기 상황을 이야기하기가 더 어렵다.

학교폭력 문제를 말할 때 이런 관계성 속에서 (학생들의) 말이 터져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막상 이 부분에 대해 성찰하는 어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밥상머리 교육'이 참 싫다.


(교과부는 '학교폭력 근절 대책'의 일환으로 지난 2월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교과부 전 직원이 매주 수요일을 '밥상머리 교육의 날'로 지정해 출퇴근 시간을 30분 일찍 앞당겨 자녀와 함께 식사 및 대화를 하는 방식이다. 교과부는 다른 부처와 유관기관 등에도 가정 친화적인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밥상머리 교육'에 적극 동참해주도록 권고할 계획이다. <편집자>)


"'밥상머리 교육'이 학교폭력 해법?…밥 먹다 체한다"

프레시안 : '밥상머리 교육', 그게 그렇게 나쁜가?

배경내 : '밥상머리에 같이 앉아 있으면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는 발상은 사람을 단세포로 보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나. 같이 밥 먹는 순간이 기쁘려면, 그 관계에 동등성과 존중감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역이다.

교과부 밥상머리 교육 지침을 보면, '대화할 수 있도록 밥을 천천히 먹는다'거나 '밥상을 함께 차린다'가 있다. 하지만 실제 가정의 현실은 아주 다르다. 아빠와 엄마가 함께 밥상을 차리는 가정이 얼마나 되나. 아이들 입장에선 '밥상머리 교육'이 대화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훈계만 늘어놓거나 부모가 궁금한 것만 질문한다고 여긴다. 자꾸 그러면, 아이들은 밥 먹다가 체한다.

교과부가 말하는 '밥상머리 교육'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어른이 있고, 이 어른이 아이와 밥을 같이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표하면 아이들은 악한 마음을 먹었더라도 "예"라고 하게 되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을 단세포적으로 본다고 지적한 것이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정작 부모들은 아이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느냐'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건너 뛰고서는 '밥상머리 교육'이 의미가 없다.


"너 오늘 학교생활 잘 했냐? 선생님 말씀 잘 들었고? 친구랑은? 성적은?" 이런 질문만 쏟아진다면, 아이 입장에서 '저 사람이 나한테 애정과 관심이 있다'라는 생각이 들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잘못했나? 책 잡힐 일을 하지는 않았나?'라며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밥상머리 교육'은 엄마-아빠-자녀로 구성된 정상 가족 모델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한부모 가정 등 다른 학생들을 더 외롭게 만든다. 사람들이 외로울 때 주위에서 알아주지 못하면 외로움이 더 증폭된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있다. 중요한 건 '언제, 어디서 대화하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대화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학교에 의한 폭력'은 어쩔 건가?"

프레시안 : '학교 폭력'이라는 낱말은 이제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됐다. 하지만 '학교 폭력'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학교 폭력이라면,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체벌 역시 학교 폭력일 게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학교 폭력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만 다룬다.

배경내 : '학교 폭력'이라는 말이 처음 거론됐을 때 '학교 폭력이라는 말 자체가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폭력'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인가? 학교에 의한 폭력인가?

물론 현실에서 통용되는 개념은 둘 다 아니었다. 그냥 '학생들끼리 하는 폭력'이 '학교폭력'이었다. 그런데 이 폭력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학교 밖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일련의 사태들을 '학교 폭력'이라고 부르면서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고 학교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폭력이 감춰지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학교 폭력은 나쁘다'라는 학교 당국의 이야기를 학생들은 조롱하게 된다. 학교 폭력 방지 서약식을 하면서도 학교가 학생들을 대하는 방식은 굉장히 폭력적인 웃긴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학교폭력방지법'에 담긴 학교 폭력 개념이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 학생과 학생 간 폭력으로 한정하니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해당되지 않게 된다. 또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라고만 했을 때는 학교 밖 폭력이 포함되지 않고, 탈학교 학생이나 성인이 연루된 폭력 역시 전혀 다뤄지지 않게 됐다.

지금은 '학교 내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폭력'으로 '학교 폭력'의 법적인 개념이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폭력'은 학생들 사이의 폭력이다. 이 법적 정의로는 그것만을 한정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학교 안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폭력은 종류가 다양하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도 있고, 교사 상호 간에 벌어지는 것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학교의, 학교에 의한, 학교에서의 폭력'이라는 것으로 개념을 들여와서 지금의 '학교 폭력' 개념을 흔들어야 한다.


"매를 든 교사의 말만 듣는 아이들, 그 이유 때문에 체벌 금지해야"

프레시안 : 학교 폭력을 아이들끼리 때리고 따돌리는 것에만 국한하는 것은, 전형적인 보수 언론의 프레임이다. 이런 구도에선 체벌 문제, 지나친 경쟁 문화, 학생 간 서열화, 시험만 잘 치면 면죄부를 주는 풍토 등이 감춰진다.

보수 언론은 이런 프레임을 통해 학교 폭력 문제를 교권 실추 논란과 연결 짓는다. 실제로 일부 언론에서는 학생이 교사를 폭행했다며 크게 보도한다. 또 학생인권을 강화했더니, 교권이 위축돼서 학교폭력이 더 기승을 부린다라고도 보도한다. 그런데 실제 교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교사들을 상대로 인권교육을 오랫동안 해 왔던 경험을 듣고 싶다.

배경내 : 교사들의 생각을 일반화하는 것은 어렵다. 체벌을 긍정하는 전통적인 교사관을 신념으로 유지하는 교사들도 있다. 또 '체벌은 필요악'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또 신념으로서는 체벌이 잘못됐다고 믿고, 그래서 '필요악' 개념으로 체벌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대안이 없으니 매 순간을 모면하는 방식으로 버티는 교사들도 있다. 그리고 인권과 교육을 결합하며 학생인권의 적극적 옹호자가 돼서 실천하려고 애쓰는 교사도 있다.

이 가운데 앞의 경우와 마지막 경우는 소수다. 다수는 '나는 안 때린다. 그러나 체벌은 필요하다'처럼 애매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체벌을 교사가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마지막 안정장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에게 체벌할 권한이 있을 때 '학생들이 교사를 얕잡아 보지 않는다'라는 생각, 그래서 체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자. 학생들이 매나 몽둥이 앞에서만 주눅이 든다면, 과연 교육의 여러 문제가 풀릴까. 이런 학생들은 몽둥이를 든 무서운 교사가 아닌 다른 교사들에게 대들게 된다. 몽둥이를 든 교사 앞에서만 학생들이 말을 듣는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매를 내려놔야 한다.

반면, 체벌 금지라는 시대의 흐름에는 따르기는 하되 수고로움은 감수하기 싫다는 '방관자' 유형의 교사들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겠다. 보수 언론은 흔히 '학생인권 개념이 교실이 들어오면서 교육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교사가 늘어난다'라고 보도한다. 이런 교사들이 바로 '방관자' 유형의 교사들이다. 예전에는 자는 학생이 있으면, "야, 일어나!"라고 하면서 뒤통수 한 대 치고, 아니면 말고 정도였던 교사들이 (학생인권 조례 제정 이후에는) '그래? 그게(안 때리는 게) 대세니까'라며 자는 학생을 아예 안 깨운다. 이런 경우는 답이 없다. 우선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권에 바탕한 교육이 자리잡으려면 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인권친화적 교실에서 학교 폭력 문제를 푸는 법"

분명한 것은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는 방식으로는 폭력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생인권을 고민하는 교사들은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체벌하면 안 된다"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다. "학생인권이 예전에는 무시되어 왔었는데, 이제 인정되면서 여러분에게 가해지는 어떤 모욕도, 체벌도, 폭력도 안 된다. 그렇게 되게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다.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도와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이 바로 체벌이 금지된 이유다.

교사는 "지금부터 그래서 학생을 체벌해서는 안 되고, 어떤 선생님도 (체벌은) 절대 안 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변화가 생긴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선생님, 제가 어제 OO 했는데 나쁜 것 아니예요? 인권침해 아니예요?"라며 자기들이 경험한 관계를 인권이라는 '거울'에 비춰보게 된다. 아이들이 고자질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저런 것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며 자신이 겪은 부당한 일, 폭력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


폭력의 방관자가 되지 않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문화는 이런 토양에서만 가능하다. 한 교사에게 들은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한 학생이 의자로 친구를 때린 사건이 있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반 학생과 같이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우리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었으면 좋겠니?"라고 물었더니, 학생들이 '드러난 사건은 의자를 휘두른 것이지만, 의자를 집어든 학생은 사실 수개월 동안 피해자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가만히 있었지만, 사태에 대한 판단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교사의 질문으로 비로소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학생들 다수가 '의자를 던진 친구가 다친 사람을 분명히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다친 친구도 의자를 던진 친구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의자를 휘두른 사건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는 그 이전부터 가해자였던 것. 그래서 다친 친구도 사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반 친구 모두가 나서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굉장한 압력이 된다. 다친 친구가 처음에는 자심이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결국 의자를 집어든 학생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지켜만 봤던 같은 반 친구들도 "도와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학생들 사이에, 그리고 학생과 교사 사이에 '폭력은 안 된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 차별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이 된 것은 바로 '학생인권조례'다.

"학생인권 보장, 학교 폭력 해결의 출발점"

어떤 이들은 말한다. 왜 학생 인권만 중요하냐고. 교사 인권, 부모 인권도 중요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권은 원래 가장 약한 사람의 옷을 입고 들어가는 법이다. 교사, 학부모 등과의 관계에서 약자는 학생이다. 그리고 약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면, 상대적으로 힘이 센 사람들의 인권 역시 보장된다.

이런 힘이 가능해지려면 폭력에 대해서 알고 있고, 계속 성찰할 수 있는 자석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학교의 철학이고, 그 철학의 핵심이 학교-학생이든 교사-학생이든 '폭력은 안 된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 차별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서로에게 자리 잡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인권에 대한 각성은 그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학생인권에 대한 보장이 학교 폭력의 완전한 해법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면은 꽤 있다. 아이들 중에는 '튄다'라는 이유로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꽤 있다. "넌 너무 나대! 넌 너한테 어울리지 않게 왜 그렇게 입고 다녀?"라는 식이다. 사회가 강요한 획일적인 기준을 아이들이 그대로 내면화 한 것이다. 아이들이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과 학생인권에 대한 각성은 같은 흐름이다. 학생인권에 대한 각성이 학교 폭력 해결에 도움이 되는 한 이유다.

학교 폭력 문제를 풀기 힘든 이유 중에는 아이들이 사과하는데 익숙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 학교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에게 벌을 줄 따름이다. 아이들 입장에선 사과의 방식이라고 배운 게 무릎을 꿇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자존감을 꺾는 것들뿐이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존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학교가 보다 인권친화적인 공간으로 바뀐다면, 아이들은 보다 다양한 사과의 방식을 익힐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학교 폭력 문제르 푸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문제에서 떼놓으면, 문제 해결능력도 못 키운다"

프레시안 : 학교 폭력이 쟁점이 되자 교육당국은 '학교폭력은 나쁘다'라는 메시지만 되풀이한다. 그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궁금증만 깊어진다고 말한다.

배경내 : 학교폭력을 주제로 서울시교육청과 서울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제작한 <눈(을 감은)사람? 눈(을 뜬)사람!>(연출 홍서연)이라는 토론 연극이 있다.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들과 토론하는 방식이다. 관객들이 극 속 상황으로 직접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겠지'라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상황이 꼭 그렇게 전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예상치 못한 다른 방향과 계속 만나게 되고, 다른 상황이 펼쳐지면서 생각 못했던 지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사실 이렇게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 초대되는 경험이 중요하다. 인권교육을 하며 만난 교사 한 분이 "금지하는 규칙이 나쁜 이유는 학생들을 문제로부터 떨어트려 놓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있어야 문제 해결 능력이 생긴다"라고 했다.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지금까지 문제를 정의하는 것도 학교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학교가 일방적으로 가르쳤다. 학생은 어쨌든 규칙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학생들을 문제에서 떨어트려 놓는 방식인 것이다. 학생이 직접 문제에 뛰어들어 해결해 보는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



- '학교폭력'을 말하다

"'일진' 솎아내면 학교폭력 해결?...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

"폭력과 섹스 말고 놀 줄 모르는 아이들, 방법은..."
"내 아이 인생설계가 아이를 망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