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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 인생설계가 아이를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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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 인생설계가 아이를 망친다"

['학교폭력'을 말하다] <주먹을 꼭 써야 할까?> 이남석 작가

경찰에 이어 대법원이 학교폭력 문제 해결에 팔을 걷고 나섰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21일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 법원의 선제적 대응을 주문하며, 수사기관의 조사 없이 학교장이나 보호자가 가해 학생을 곧바로 법원에 알려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통고 제도'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법관이 '이혼 조정'을 하듯, 처벌이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 간 화해를 주도하겠다는 것.

그런데 왜, 학교폭력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사법부의 대책을 보며 종훈이처럼 외치고 싶어질까.

"정말 교과서 같은 이야기만 하시네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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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을 꼭 써야 할까?>(이남석 지음, 사계절출판사 펴냄) ⓒ사계절
'종훈'은 <10대를 위한 폭력의 심리학 - 주먹을 꼭 써야 할까?>(이남석 지음, 사계절 펴냄)의 주인공이다. 책은 일진인 종훈이 방과 후 교사인 택견 사범을 만나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심리적 이유를 알아간다는 내용이다. "폭력의 피해자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방관자와 가해자로 고등학생 시기를 보낸 경험"이 있는 이남석 작가는 종훈이기도 하고, 종훈을 지도한 택견 사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은 학교폭력을 삼인칭 시점의 '범죄'로 보지 않는다. 자신의 학창 시절, 일인칭 시점으로 폭력을 썼던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묻어 있다.


지난 14일 이남석 작가와의 인터뷰는 2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듯 했다. 왕따 '남순'이 일진이 되고, 군 수색대 경험을 거쳐 심리학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폭력을 극복한 10대 '남순'이 40대 '남석'이 된 지금, 그는 폭력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우선, 그는 학교폭력 문제 대책에 '일인칭이 없다'고 지적했다. "왜 아이들이 주인공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대책은 단지 '이만큼 노력했어'라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요즘 아이들은 안나푸루나 빙벽, 영하 40도에 맨몸으로 매달려 있"는데, 대책과 해결 방안은 여전히 구식이라는 지적이다. 학교 일진은 과거 동네 노는 형, 주먹 좀 쓰는 형이 아닌 조직화된 세력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이러다가 나 자살하는 것 아냐? 이러다가 나 일진한테 당하는 것 아냐?'라는 공포에, 오히려 다른 사람을 더 왕따 시킨다". "내가 좀 덜 다치려면, 내가 좀 덜 피해 보려"면 친구조차도 일회용품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궁금한 것은 '내가 (폭력적인 행동을) 버렸을 때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강요에 의한 선도가 아닌 '넛지(Nudge, 특정 방향으로 살살 밀다)' 방식으로 시간을 두고 기다리며,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믿으라고 충고했다.

이남석 씨는 <원샷원킬>,<주먹을 꼭 써야 할까?>,<논리를 찾아라!>와 같은 청소년 심리학책뿐 아니라, 자신의 전공 분야인 인지과학과 관련해 <무삭제 심리학>,<마음의 비밀을 밝히는 마음의 과학> 등을 쓴 하이브리드형 작가이다. 심리학 전공자로 WCU 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IS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다음은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진행한 이남석 작가와의 인터뷰 전문. <편집자>


"학교폭력, '일인칭'은 없고 '삼인칭'만 많다"

프레시안 : <주먹을 꼭 써야 할까?> 작가 소개에 '폭력의 피해자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방관자와 가해자로 고등학생 시기를 보낸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상담을 하던 중, 날로 심해지는 청소년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가해자만을 선도해서는 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 있어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를 보면, 대부분은 제3자가 보고 듣는 입장이다. 정말 학생들-가해자와 피해자의 목소리는 안 나오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남석
: 지금 나오고 있는 대책을 요약하면 '가해자 처벌-피해자 보호-방관자 각성'이다. 여기엔 공통점이자 문제점이 있는데, '일인칭' 주어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 '삼인칭'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은 공부나 외모 등으로 서열화 돼 있다. 구별에 민감한 아이들인데, 요즘 나오는 대책 역시 아이들을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로 구별하고 있다.

'왜 아이들이 주인공이 아니냐'는 게 내 생각이다. 어른들이 대책을 세운다면서 처벌하고 보호하는 데만 급급하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는 피해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만들어 준다. 피해자는 약한 이미지가 생긴다. '누군가 내 인생을 망가뜨렸을 때 그 아이는 나쁜 짓을 했으니까 혼나야 하지만, 그동안 나는(피해자는) 무엇을 해야하냐'를 물어보지 않는다. '그래, 너 고생했어'라며 안아준다.

아이들에게는 '우리'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해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대책에는 '우리'라는 개념이 빠져 있다. '너희들 가해자잖아, 너희들 피해자잖아, 너희들 방관자잖아'라며 나누기만 한다.

아이들이 '우리'로 묶이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아이들은 어떤 '큐(Q, 사인)'를 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을 분절시키는 큐로, 굉장히 안 좋은 것이다. '아이들이 폭력적이니까 우리 체육 한번 해볼까' 라면서 체육 시간을 두 배로 늘리는 게 대책이라고 한다. 만약 체육을 못하거나 싫어하는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심리적으로 안 좋은 에너지를 풀라는 취지일 텐데, 실제 나온 대책에선 취지가 사라졌다. 예컨대 스트레스를 미술이나 음악으로 푸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정부 대책은 스트레스 푸는 방식도 그저 한 가지다. 어떤 경우건 획일적인 방식은 안 좋다.

미국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이 쓴 <넛지(Nudge)>라는 책이 한때 화제가 됐다. 이 책에 나오듯 '팔꿈치로 툭툭 찔러도 되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걸 정부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순간,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획일적인 대책 강요보다는 '팔꿈치로 툭툭 찌르는' 게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학교 폭력'을 주제로 토론을 시키면, 다들 말을 잘 한다. '서열화된 사회가 문제'라며 전문가들이 할 말까지 다 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는 빠져 있다. 이처럼 구조적인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알리바이만 견고해진다. '봐, 시간 많이 걸려. 학교 폭력은 당장 해결 못 해'라는 알리바이다.

"다들 알리바이만 만든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너무 구조적인 문제로만 보면, 결국은 나, 또는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 같다.

이남석 :
걸핏하면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학교 폭력은 자기는 관계가 없는, 문제아 같은 몇 명의 가해자와 찌질한 피해자의 일인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학교폭력 문제로 외부 강연을 할 때 "폭력적인 나를 행복하게 하는 법"이란 주제로 한다. '내가 왜 폭력적이야'라고 할 수도 있다. 자기 안의 폭력을 보면, 남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화나면 때릴 수도 있지'가 아니라, '화나서 때리면 후회한다'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보통은 '화나면 때릴 수도 있지'까지만 생각하고, 다음이 없다. 자기 스스로도 후회하는 단계까지 가지 않는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른바 전문가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오히려 '난 알아'라고 하는 순간, 인지적 오류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전문가일수록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계속해봐야 하는데 우리는 사실 제대로 안 해 보고 '잘 안 될 거야, 뻔해' 라고만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왕따 '남순이', 때리는 맛에 눈 뜨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 피해자라고 했는데, 개인적인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남석 : 7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1971년 음력 10월생, 양력으로 12월생이어서 70년생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몸집이 작았다. 당시에는 생일 별로 출석 번호가 배정됐는데 나는 36번이었고, 뒤를 이어 여학생들은 37번부터 시작됐다. 유일하게 여자 짝꿍이었고, 별명도 '남순이'였다. 못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여자와 같이 앉는다는 사실만으로 그냥 '왕따'였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쭉 왕따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고구려-백제-신라를 몰랐다. 공부를 못했다. 선생님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무척 어렸기 때문에 나머지 공부를 하다 4학년 때는 지체장애인이 있는 특수반 옆에 있었다. 학교에서는 저능아라며 포기한 경우였다. 그래서 학급문고만 열심히 읽었다. 기본 교과 과정도 모르고, 신체적·지적으로 미달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하위로 쳐졌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 때쯤 몽정을 했다(2차 성징을 겪었다). 그런데 나는 한 살 일찍 학교에 갔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사춘기를 겪고, 폭풍 성장을 했다. 160cm 초반이었던 키가 1년 만에 174cm가 됐다. 전에는 맞기만 했는데, 키가 큰 후로는 때리는 아이의 주먹을 막게 됐다.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방어한다고 한 행동이 때리는 게 됐다. 신체가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해진 것이다.

과거에 피해자였기 때문에 지금은 남을 때리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충분한 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폭력을) 당했으니까…. 다른 아이들은 성격이 나쁜 거였지만 난 당했으니까, 복수다'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 종훈이처럼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은 기분이 나빠서 싸웠지, 원한이 있어 싸우지는 않았다.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서는 힘보다는 '얼마나 독기를 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데, '복수'라는 생각으로 독기를 품으니 해결됐다. 주먹 서열도 팍팍 올라가고, 으스대게 됐다.

그러다 보니, 롤라장(롤러 스케이트장)도 다니게 됐다. 롤라장에 다니면서는 내가 원하던 것보다 더 놀게 됐다. 당시에는 '일진'이라고 해도 규모가 크지 않았다. 몇 명이 얻어맞고 오면 다시 몇 명을 데리고 가서 혼내주고 오는 식의 동네 차원이었다. 지금 같은 일진 네트워크는 없었다. 충남 예산에서 살았는데 온양에 가서 혼내주고 오는 정도였다. 그때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보다 더 폭풍 성장한 아이들이 생겼다. 174cm의 키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라서 여기저기서 다 모였다. 나보다 힘이 센 아이들 틈에서 그냥 조신하게 지냈다. 나는 그냥 '깐죽이'가 됐다. 또 공부를 잘하면 그냥 놔두는 편이었다. 혼자 머리 기르고 야간 자율학습 빠진 채 나이트에 가서 맥주를 마시곤 했다. 중학교 때 어울리던 아이들 중 고등학교에 못 간 아이들이 나이트에서 웨이터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대학만 가면 될 것 아냐'라는 생각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사회적 불만을 데모로 풀었다. 가장 안 좋은 행태였다. 결국 수색대에 지원해 군대에 갔다. 해병대보다 더 멋있을 것 같아서 지원했는데 400명 중 200명, 절반 정도는 일진이었다.

군 생활 중 하루에 두번 전원투입 시간이 있었다. 이때 보급받는 수류탄과 총알 300발이면, 언제든지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동료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자는 상상말이다. 수색대 12명과 국방부에서 파견된 4명인 16명이 벙커 생활을 했는데, 어차피 모두 실탄을 갖고 있는 상황에선 힘의 논리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논리로 언제든 서로를 죽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벙커 안에 있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벙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세심하게 배려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진실되느냐'의 게임이 됐다. 그때 경험이 책에 많이 반영됐다.

휴가를 나오면 으레 싸움이 붙었다. 웬만한 사람들과는 싸움이 안 됐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무서웠다. 남자다운 게 아니라, 범죄자에 더 가까워진다고 느끼게 됐다. 매일 사람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면서도 군대 내에서는 동료끼리 굉장히 잘해줬다. 내 안에서 불협화음, 부조화가 일어났다. 군 생활 마지막에 벙커 생활하면서 책을 읽게 됐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고민했던) 답들이 모두 책에 있었다. 이후에는 과거 강한 척했던 내 모습이 오히려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제대하고 복학했더니, 교수님 아들 중에 '일진'이 있다며 (아이 상담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인데, 처음 만나자마자 사흘 동안 치고받고 싸우기만 했다. 그렇게 싸우기만 하다가 아이를 안 만났더니, 오히려 아이가 겁을 먹었다. 그때 알았다. '이 아이도 정말 외로웠구나.'

자기가 강하게 보이면 (주변에서) 다 받아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지나면 또 외로워진다. 이 아이 이후에 만난 다른 일진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다 행복하지 않구나.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경기도 분당에서 서울 송파구 가락동으로 원정을 와서 주먹으로 (그 지역을) 평정한 아이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아이조차도 행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아이가) 당당할지 모르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폭력으로는 아무도 행복한 아이가 없었다.

가출청소년 '쉼터'에서 만난 아이들도 나름대로 일진이었는데, 다들 같은 고민을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아이들과 내 경험이 똑같았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다. '(사회적 불만에) 어떻게 개인적으로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러니까 (때려도 된다)'라고 반응하면 폭력적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리면 안 된다)'라고 반응한 아이들은 비폭력적이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옆의 아이를 '갖고 노는 존재'로만 여기는 아이들"

프레시안 : '그러니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구분이 인상적이다

이남석 :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그러니까'라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때리고, 그러니까 맞았다는 게다. 피해자는 '처음에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친구가 이상해졌어요. 나는 자살할 용기는 있지만, (그 친구에게) 반항할 용기는 없다'고 한다. 지금 자살한 아이들의 문자 메시지를 보면 다들 이런 마음이다.

어른들은 모범생이 일탈하면 스트레스 해소라고 본다. 공부에 대한 대가로 뭐든지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 피해자인 아이들 대부분은 공부를 잘 못한다. 이 아이들이 '일탈'을 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존재 가치가 다 없어진 뒤다. '넌 공부 아니어도, 듬직하니까 나중에 뭐라도 될 수 있어'가 아니라, '너 나중에 뭐 되려고 그러니?'라고 이야기하는 사회와, 선생과, 부모만 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일탈'마저 (손에서) 놨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상태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생각밖에 없고 '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없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게 된다. 영화 같은 데서 본 '괴로우면 자살이잖아'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과거나 지금이나 길가다가 형들이 '돈 있느냐? 담배 있느냐?'라고 묻는 것은 같은데, 지금은 더 철저한 상납구조다.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친밀해져서 그 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옆에서 봤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의 욕망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 내가 왕따 안 당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대리물로 삼는 일회용이다. 학교 안에서 반 친구면 뭐하나, 학교 성적에 따라 다 나뉘는데…. 그래서 일탈 행위를 함께 할 친구도 없다. 내가 일탈할 때 힘이 좀 세면, 옆에 있는 아이를 갖고 노는 존재로 데리고 오는 것에 불과하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내가 좀 덜 다치려면, 내가 좀 덜 피해 보려고 이용하려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은 자기 이권(利權)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다. '신상털기'만 봐도 알 수 있다. 굉장히 집요하다. 예전에는 툭툭 치면서 '야, 꺼져'라는 것으로 끝났지만, 지금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일주일을 데리고 다니면서 때린다. (과거와) 다르다. 그런데 제시된 해법은 여전히 같다. 어른들은 '우리 때는 더 심했어'라고 말하지만 다 필요 없는 이야기다. 요즘 아이들은 안나푸루나 빙벽, 영하 40도에 맨몸으로 매달려 있는 것이다.

학교폭력과 '타이타닉 현실주의'

프레시안 :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처한 '객관적 현실'을 주로 얘기한다. '옛날에도 주먹 쓰는 애들은 있었잖아'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일 게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현실'만 들여다봐서는 요즘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이해하기 힘든 듯 하다. 아이들이 처한 '심리적 현실'을 봐야 할 텐데….

이남석 : 맞는 고통보다도 맞기 직전이 더 무섭듯이 지금 아이들에게는 가상의 공포가 더 무섭다. 주사 맞기 전 주사에 대한 공포가 더 심한 것처럼 아이들은 '이러다가 나 자살하는 것 아냐? 이러다가 나 일진한테 당하는 것 아냐?'라는 공포에 오히려 다른 아이를 더 왕따 시킨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특히 학기 초, 조금만 특별한 게 있어도 무조건 왕따 취급한다. 그래야 나에게 화살이 안 오니까.

그런데 정부나 사회는 '근본 대책'이라며 아이들에게 안 긁어내도 될 것을 긁어낸다. 지나치게 구조적인 접근은 부작용을 낳는다. 잠재의식 속에 '그러니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불우한 아이들일수록, 외로운 아이들일수록'이란 의식 속에 '그러니까, 나도 때려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자리잡는다. 왜? 화나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때리니까'가 작용하는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사실 어릴 때 읽은 위인전에 다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다.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폭력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환경문제와 같다. '우리 자연은 아직 파괴되지 않았잖아'라는 것. '우리 아직 빙하에 부딪히지 않았잖아'라는 '타이타닉 현실주의'와 같은 입장이다. 폭력이 곪을대로 곪아서 터진 뒤엔 이미 늦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에서 현대 문명 시스템 속의 인류를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승객들에 비유했다. 사람들은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일 만큼 들어 진부하다는 생각에, 이미 배가 빙산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엔진을 멈추고 배를 세우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주로 위기에 처한 환경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에 쓰인다. <편집자>)

정부는 폭력 문제 대책을 논의하자면서 폭력만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건 가장 급이 낮은 교육이다. 가장 안 좋은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주먹을 쓰는 대신 그림을 그렸더니 좋아졌어요' 같은 이야기를 얼마나 했느냐고 묻고 싶다.

과정과 결과 모두 행복이라는 것이 강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넛지(nudge, 팔꿈치로 살짝 찌르다)'다. 사람은 설계한 대로 살 수 없다. 반기문 총장이 중학생 시절 영어 공부할 때 유엔 사무총장을 바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이 좋게 가다 보니, 지금 그 위치에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자리에 오른 사람을 보면, 운이 좋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유는 설계한 대로 안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폭력 대책은 아이들이 미리 설계된 대로 살라고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자식 인생설계 좀 하지 마시길…"

프레시안 : 다양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고 들었다. 또 교사들도 많이 만났다고 했다. 폭력 문화에 젖은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충고할 게 있다면….

이남석 : 어른들은 자꾸만 설계하려 한다. 목표를 겨냥해서 백발백중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생각하는 목표는 너무 멀다. 아이들이 궁금한 것은 '내가 (폭력적인 행동을) 버렸을 때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제시한 위닝 포인트(winning point, 만족감을 느끼는 지점)는 너무 먼 곳에 있다. '너 지금은 참아. 공부 잘해서 대학 가면 예쁜 여자 친구 만날 수 있어'라는 식이다. 이래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내가 뭔가를 참았다면, 적어도 일주일 안에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 심리학 이론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대학에 간 뒤에야 보상이 있다? 아이들 입장에선 폭력 행위를 참을 만한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어른들은 아이들의 심리적 현실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 현실에만 관심을 둔다. 하지만 객관적 현실은 평온해보여도, 심리적 현실은 자살 일보직전인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하는 충고가 기껏 '나도 옛날에 그랬어' 수준이다. 이런 충고가 아이들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예술작품을 활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지식이 담긴 책은 한계가 있다. 내용을 이해하려면 중간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게 너무 멀다. 모든 예술작품에서 감동을 느끼길 기대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은 어차피 살아갈 날이 많고, 예술에서 감동을 느낄 기회 역시 많지 않은가. 엄마가 끓인 된장찌개가 매번 맛있어서 먹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맛에서 감동을 느끼는 한두 번은 있기 마련이다. 그거면 됐다. 아이들이 예술에서 감동은 한두 번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꼭 필요하다.

"세기의 천재가 노년에 내린 결론 '그냥 방황해'…자유의지를 믿어달라"

프레시안 : 어른들이 제시한 위닝포인트가 너무 멀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남석 : 어른들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과 아이들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이 다르다. 살아온 날이 많은 어른들에게 시간은 종적 개념이다. 인생이 한줄로 그어져 있다. '아이들이 이 지점에 오면 이걸 느낄 텐데' 하는 식이다. 반면, 살아온 날이 적고 살아갈 날은 많은 아이들에게 시간은 횡적 개념이다. 다양한 가능성이 수평적으로 열려 있다.

시간을 종적 개념으로 보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자꾸만 설계해 주려 한다. 이런 어른들에게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권하고 싶다. '그냥 방황해. 네가 그렇게 열심히 설계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설계한 게 꼭 좋은 것도 아니잖아. 그냥 방황해'라고 말하는 책이다. 세기의 천재라는 사람이 노년에 자기 삶을 돌아본 결론이다.

인생설계는 부질없는 짓인데, 많은 어른들이 그걸 모른다. '성공하려면 몇살에는 무얼 해야 하고, 또 몇살에는 무얼 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리고는 '아이들은 뭐가 중요한지 몰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걸 어른들이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오히려 폭력이다. 청소년기는 자아 주체성을 유연하게 가져야 할 때이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라'라고 권유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한번은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잘 봐준다고 하면서 교묘하게 설계하려 드는 것이다. 인생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 그것이 할리우드 영화처럼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학교폭력'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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