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교육과학기술부가 25억 원을 들여 실시한 '전국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뜯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 조사에서 포항의 한 중학교는 전교생 923명 중 단 1명만 '우리 학교에 일진이 있다'고 답을 했는데, 일진 인식비율이 100%로 처리됐다. 이런 사례가 부지기수다. 학교별 응답률이 20%대로 낮은 탓이다. 게다가 당초 학생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결과를 공개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앞으로 진행될 조사는 더욱 신뢰성이 떨어지게 됐다. 학생들이 솔직한 대답을 안 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전국 1만1500명의 초‧중‧고‧특수학교 교장을 대상으로 23일부터 실시되는 '학교폭력 근절 특별연수'만 해도 "전형적인 전시행정", "교육자치 훼손"이라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지난 3일 이명박 대통령이 "교과부는 교장 교육을 잘 시켜라"라고 지적하자 1주일 만에 전체 교장을 대상으로 급조된 계획이어서 "5,6공화국 때도 없던 전수(全數) 연수"라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한들, 이리 요란할까. 이런 가운데 <프레시안>은 "사과가 왜 썩을까요?"라는 물음을 던진 대안교육 전문지 격월간 <민들레>에 주목했다.
"사과가 썩었다며 말이 많습니다. 썩은 사과 때문에 나머지 사과까지 문드러질까 걱정들입니다. 썩은 사과만 골라내면 나머지 사과는 괜찮을까요. (…중략…) 문제는 썩은 사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썩게 만드는 사과 상자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토양이 부실하거나 비료만 줘서 쉬 썩어버릴 만큼 무른 사과가 된 것인지도. 사과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쯤 사라질까요."(<민들레> 79호, "표지 이야기")
학교폭력 문제는 '일진'이라는 '썩은 사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사과 상자와 흙, 비료 등 사과를 생산하는 근본에서부터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또 교육이 지향하는 가치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폭력이 학교에 난무한다면,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 학교가 서 있는 자리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가 아닐까. 학교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청소년들의 버팀목이 돼 왔던 <민들레>에 주목한 이유다.
현병호 <민들레> 발행인은 지금의 학교를 진단하며 '자존감'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는 "학교폭력의 밑바탕에는 아이들의 자존감 결여가 있다"고 말했다. 현 발행인이 말하는 '자존감'은 '자존심'이나 '우월감' 등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는 많은 아이들이 "우월감은 있어도 자존감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성적이 좋거나, 아파트 평수가 넓거나, 외모가 뛰어나서 한 가지라도 내세울 게 있으면 그나마 버티고,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으면 그야말로 (왕)따가 된다"라는 이야기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 자존감이 없는 아이들이 우월감으로 버티는데, 일부 아이들은 그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른다. 또 다른 아이들은 자신을 긍정할 근거가 모조리 허물어지면서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
상황이 이런데, 정부의 정책대로 '썩은 사과'만 골라낸다고 학교폭력 문제가 해결될까. 지난 20일 서울 동교동 <민들레> 사무실에서 현 발행인이 전한 우리 학교, 우리 아이들의 '슬픈 사과 이야기'를 정리했다. <편집자>
▲ 현병호 <민들레> 대표 ⓒ프레시안(이명선) |
"문제는 자존감, 자기 삶이 행복하지 않으니 폭력 휘둘러"
프레시안 : 학교폭력 문제가 다시 쟁점이 됐다.
현병호 :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시각이 없는 것 같다. 학교폭력의 가장 밑바탕에는 아이들의 자존감 결여가 있다. 지금 학교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자존감을 갖기 힘든 구조다. 우월감을 가질지 모르지만, 자존감은 없는 상태다. 못하는 애들은 못하는 대로 잘하는 애들은 잘하는 대로 열등감 아니면, 우월감만 있다.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10대의 꽃다운 시절을 잘 사는 아이들이 없다. 자기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성이 나오는 것이다.
학교 교육의 기본 패러다임이 경쟁구도이지 않나. '살아남으려면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세상은 어차피 적자생존이다'라는 논리가 교육의 패러다임이 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경쟁 논리를 옹호하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들이 추구하는 경쟁력이라는 게 과연 지금 이 경쟁 시스템으로 생겨나느냐'라고 말이다. 경쟁력은 경쟁으로 생기지 않는다. 해법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아이들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경쟁 시스템이 문제다. 한국 학생들이 '피사(PISA,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는 최상위권 점수를 받는데, 같은 조사에서 학업 만족도 부문은 꼴찌 수준이다. 다른 조사를 통해 드러난 행복지수 역시 꼴찌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교사 처우가 아주 좋은 나라로 꼽힌다. 그런데 교사들의 만족도는 역시 최하위권이다. 아이들의 상황과 교사들의 상황이 그대로 닮았다.
교사들도 자존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직업에 대한 만족감, 교사로서의 자존감은 바닥인 것이다. 그야말로 학교가 교사와 아이들과 삶을 낭비하게 하는 구조다. 아이들은 적어도 10년 가까운 세월을 낭비하게 하고, 교사는 교사대로 학교에서 평생을 보내는데 참 불행하다.
"자존감 없는 아이들, 학교만 나무랄 수는 없다"
현병호 : 아이들의 자존감이 바닥인 상황은 학교의 책임도 있지만, 가정의 책임도 있다. 아무리 학교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부모가 아이들을 지지해주고 존중해준다면 아이는 바르게 자란다. 민들레를 찾는 아이 가운데 (정규 교육과정) 12년을 마치고, 지금 21살인 친구가 있다. 학교에 짓눌린 흔적이 전혀 없다. '자존감이란 게 저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친구다. 그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부모님의 교육철학이 정말 단순하다. 그 친구 어머니는 "아이한테 정성스레 밥상을 차려준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것이면 자기 역할은 충분한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성스러운 밥상을 받아본 아이는 자기를 존중할 줄 알 것이라는 얘기다.
그 친구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정말 자기답게 살 수 있게 존중받은 것이다. 수학 성적을 20점, 30점 받으면서도 전혀 스트레스를 안 받았다고 한다. 그 친구는 대학 진학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며, 대신 '수유+너머' 등을 다니면서 공부하고 있다. 그 친구에게 지금 출판 인턴으로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상태다. 대학을 졸업한 친구보다 낫겠다고 생각한다.
좋은 삶을 살게 도와주는 게 부모가 하는 최선의 교육인 것 같다. 학원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가장 좋을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것을 못하고 있다. 학교폭력 문제를 놓고 학교만 나무랄 수 없는 것 같다.
'2011 OECD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조사 결과 OECD 23개 회원국 중 한국 청소년들의 행복지수는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특히 22위인 헝가리(86.7점)와 20점 이상 큰 차이가 났다. 2010년 OECD 국가의 자살률 현황을 보면 한국은 표준인구 10만 명당 28.4명으로 1위를 기록했다. 청소년 자살률도 상위 그룹에 속해 있는데, 한 해 동안 초등학생 3명, 중학생 53명, 고등학생 90명 등 전국적으로 청소년 146명이 자살했다. 지난해 12월 대구에서 친구의 괴롭힘으로 중학생이 자살한 이후, 지난 2월에는 강남 8학군 고교생이 성적 압박을 호소하며 투신 자살했고, 최근 4월에는 경북 영주와 안동에서 중학생 두 명이 잇따라 자살했다. 전문가들은 친구의 괴롭힘과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고 진단했다. 지난 21일 <서울신문>이 건강보험공단의 자료를 받아 분석한 결과, 서울시내 학생 1000명 중 5명이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서초구 7.4명, 양천구 7.2명, 강남구 6.8, 송파 6.1명 순이어서 학업열이 높은 지역수록 우울증에 걸린 학생 비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
"비실비실하던 아이가, 식물이 생기 찾듯 변한다"
프레시안 : 최근 청소년의 자살이 잇따랐다. 그 중 한 이유가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이다. 피해 학생 입장에선 지금 경험한 학교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현병호 : 민들레를 찾는 아이들 중에도 학교에서 겪은 괴롭힘으로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경우가 있다. 이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서서히, 확실히 변한다. 교사와의 관계가 달라지고 친구와의 관계가 달라진다. 그런 관계 속에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해 간다. 처음에는 비실비실하던 아이가, 식물이 생기를 찾아가는 것처럼 변한다. 자신감이든 자존감이든 결국은 사랑을 받으면서 변하게 된다. 사랑을 받으면서 자기를 조금씩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게 치유인 것 같다. 결국은 사랑이다.
사실은 부모가 제일 확실한 치유자인데, 부모가 그 역할을 잘 못하면 주면 다른 사람들이 해줘야 한다. 민들레에서는 부모 상담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부모도 조금씩 달라진다. 아이가 학교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주변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다른 관계를 경험하며 아이는 상처를 회복한다.
"학교를 '땡땡이' 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가 필요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은 과거와 달리 '학교를 안 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보편화됐다는 점이다. '학교가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에선 숨통이 조금 트인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가 있다. 학교를 예전처럼 절대적으로 여기는 이들은 아직도 많다.
의식이 있고 학력이 높은 부모들은 학교 교육을 상대화할 수 있다. 오히려 학교를 절대화하는 쪽은 소외계층이다.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먹고 살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깊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교 졸업장을 바라기 때문에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이 학교교육을 더 절대화한다. 딜레마다.
내가 지금 이 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뭔가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야 한다. 현재 위탁형 학교가 있는데, 퇴학 조치당한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가기에는 힘들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정말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력 인증이 되는 학교 밖 피난처 같은 곳이 생기면 좋겠다. 민들레에서 단기 1년 과정의 '틈새학교'를 제안했다. 최근 곽노현 교육감 인터뷰를 했는데, 서울시교육청에서도 그런 구상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피난처 공간이 절실하다.
민들레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를 자퇴하고 온다(민들레는 탈학교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운영해 왔다). 한 여중생은 학교 가기 싫을 때면 민들레에 왔다 가기도 한다. 학교를 땡땡이치고도 잘 보낼 수 있는 합법적인 공간이 만들어지면, 아이들 숨통이 좀 트이지 않겠는가.
곽노현 교육감은 <민들레> 80호 "대화_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 듣는다"에서 "학업중단 위기에 놓인 재학생들에게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고,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는 지자체, 지역사회와 연계한 지원체계 속에서 적절한 대안을 연결시켜 줄 필요가 있다"며 "이런 총괄적인 지원체계 구축이 '책임교육 네트워크'라는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94쪽) 곽 교육감은 특히 덴마크의 애프터스쿨에서 착안한 <민들레>의 '틈새학교' 제안에 "자존감이 낮고 실패 경험이 많은 아이들에게 좋겠다"며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정규교육 차원에서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는 입장을 보였다.(96쪽) |
"학교에 경찰 부르는 게 학교폭력 대책? 아이들 표정을 보라"
프레시안 : 폭력은 결국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라서 다른 좋은 관계를 경험하면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언론보도나 정부 입장 등을 보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진단하는 느낌이다. 오히려 학교폭력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학교폭력이 심한 학교를 인터넷에 공개한다는 게 정부 방침인데, 이렇게 되면 아이들의 자존감이 더 꺾이지 않을까. 학교폭력 문제를 대하는 언론, 정책 당국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듯하다.
현병호 : 학교 자체가 이미 폭력학교다. 시스템 자체가 폭력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물을 가지고 일부 가해자를 솎아낸다고 해도 (학교폭력 문제는) 또 나올 것이다. 지금 정책 방향은 그야말로 임기응변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꼭 해야 할 것를 꼽으라면, 솔직히 막막하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것 몇 가지는 좀 뚜렷하게 보인다.
우선, 학생들을 성적으로 서열화하지 말아야 한다. 성적 순위를 게시하는 것은 아주 잘못됐다. 또 학교 서열 매기는 것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 폭력 문제가 정말로 심각하다고 여긴다면, 서열화와 폭력이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진짜 문제는 교육 문제를 교육적으로 풀지 못한다는 점이다. 비교육적인 상황일수록 교육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비교육적 상황을 비교육적으로 풀고 있다. 학교가 교육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학교에 경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교 폭력 문제를 교육적으로 풀 생각은 안 하고, 아이들을 치안 행정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다고 학교폭력 문제가 풀릴까. 절대 아니다. 실제 교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고등학교 교사가 경찰이 학교에 와서 '이럴 때 신고해라'라며 교육을 했던 사례를 들려줬다. 당시 아이들의 표정이 정말 머쓱했다고 한다. 현실성도 없고, 오히려 아이들을 범죄자 취급해서 문제를 더 키울 뿐이다.
"대안학교에도 폭력 사건은 터져…비교육적인 것을 교육적으로 푸는 게 교육"
프레시안 : 대안학교에선 폭력 사태를 어떻게 푸나. 아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가벼운 주먹다짐은 일어나기 마련인데….
현병호 : 대안학교 아이들 사이에서도 폭력 사건은 일어난다. 차이가 있다면, 그걸 교육의 기회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온갖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입장은 교육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은 명백히 비교육적이다. 그러나 비교육적인 것일수록 교육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게 교육의 원칙이다. 그렇게 볼 때, 학교 폭력을 둘러싸고 요즘 나오는 주장들은 기본적인 교육 철학이 결여된 것이다.
물론 행정적인 조치가 필요한 대목도 있다. 한국 학교는 학급당 인원수가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교사 수를 대폭 늘려서 교사 대 학생수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학교 규모도 줄여야 한다. 행정 영역에서 필요한 건 이런 조치들인데, 엉뚱한 주장만 나온다.
ⓒ프레시안(이명선) |
"'인생 살아볼만 한 것이구나' 느끼게 하는 게 대책"
프레시안 : 학교폭력으로 상처를 받은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현병호 : 추상적인 얘기지만, '인생이 살아 볼만 하구나'라는 걸 어렴풋이라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아닐까.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게 나쁜 일이 아니구나'라는 걸 조금씩이나마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 결국은 '만남'이다. '교육은 만남이다'라는 말도 있는데, 꼭 교사가 아니어도 어른들이나 또래들과 좋은 만남을 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
그렇다면 만남이 가능한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런 기회를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인가 하는 게 문제다. 앞서 언급한 '틈새학교'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지금 다니는 학교 안에서 문제를 풀지 못하고 학교 바깥에서 해법을 찾으면, 학교에 돌아왔을 때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현병호 : '틈새학교'가 1년 과정으로 되는 게 낫다고 보는 것도 그래서다. 덴마크의 '애프터 스쿨(after school)'이 그런 예인데, 중3과 고1 가기 전에 가는 자유학교의 한 유형이다. 비교적 자유롭게 열려 있다. 지금 위탁형도 그런 유형이긴 하지만, 딱지(문제아)가 붙지 않게 해야 한다. 오히려 지금은 교류학습이나 현장체험 정도의 한 달 과정으로 잠시 응급조치를 할 수도 있겠지만, '틈새학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모델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주말학교, 방학학교 등 여러 가지 모델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덴마크 '애프터 스쿨'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가기 전 잠시 쉬어가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다. 주로 다양한 문‧예‧체 활동과 캠핑 등 야외활동, 그리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과 사귀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며 진로를 생각해 보게 한다. 두 달에 한 번 방학을 하고 주말에는 집에 갈 수 있다. |
"웹툰이 학교폭력 조장?…<조선> 논조가 오히려 폭력 키워"
프레시안 : <조선일보>가 학교폭력 문제의 원인으로 폭력 웹툰을 지적했다. 온라인 게임도 함께 도마 위에 올랐다.
현병호 : 1퍼센트 정도 영향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속 편한 소리다. '사과가 썩은 것은 사과 탓이다'라는 논리다. 오히려 <조선일보>가 학교 폭력에 기여하고 있는 바도 크다. (웃음) <조선일보>는 아이들을 서열화하도록 부추기는 논조다. 결국 5퍼센트를 위해서 95퍼센트를 들러리 세우는 구조를 찬성하는 것이다. 사실 그야말로 폭력적인 구조다. 그리고 학교폭력은 이런 폭력구조와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른들의 사회가 이미 서열화 돼 있다. 아파트 평수로 서열화 돼 있고, 입고 다니는 옷의 브랜드로 서열화되어 있다. 그게 아이들에게도 전이됐다. 아이들 역시 성적이 좋거나, 아파트 평수가 넓거나, 외모가 뛰어나거나 한 가지라도 내세울 게 있으면 그나마 버티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으면 그야말로 (왕)따가 되는 것이다. 자존심의 평수가 아파트 평수와 비례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자존감은 자존심과 다르다. 자존감은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없이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런 자존감이 바닥이고, (사회 구조가) 성적, 외모, 재산으로 자존심만 세우게 되어 있다. 그런 자존심조차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이 낭떠러지로 몰리는 것이다.
"싸움인가, 괴롭힘인가?"
프레시안 : 학교 폭력을 둘러싸고 나오는 온갖 진단과 처방을 접하며 답답했던 점 중 하나가 개념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학교 폭력이 뭔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학교 폭력이라면, 교사가 아이들에게 하는 체벌은 학교 폭력인가, 아닌가. 감정 조절이 서툴고 말과 글로 싸울 능력이 없는 아이들끼리 벌이는 주먹다짐도 학교 폭력으로 분류해서 단죄하는 게 옳은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단순한 주먹다짐과 물리적 폭력 없이 영리하게 괴롭히는 경우 사이에선 어느 쪽이 더 큰 문제인 걸까. 폭력에만 초점을 맞춘 담론은 후자을 방치하게 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 '싸움과 괴롭힘은 다른 것 아닌가'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아무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도 구성원 사이의 싸움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괴롭힘이 없는 사회는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할 바는 싸움이 없는 사회라기보다는 괴롭힘이 없는 사회일 것이다. 괴롭힘은 분명히 막되, 싸움은 잘 풀어내는 길을 가르치는 게 진정한 교육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다.
<민들레> 79호에 실린 현 발행인의 글을 읽고 반가웠던 것은 그래서였다. "학교폭력과 폭력학교"라는 글에서 현 발행인은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싸움과 괴롭힘으로 구별했다. 그리고 싸움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괴롭힘이라는 게다. 이런 접근 자체가 반가웠다. 당시 글에서 현 발행인은 알바니 프리스쿨의 사례도 소개했다. 이 학교에선 몸싸움 자체를 금기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병호 : 싸움은 일종의 대등한 방식 즉, 만남의 방식인 셈이다. 지든 이기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코피가 터진다면 자존심이 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존감에 상처를 입진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괴롭힘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과 괴롭힘은 다르다.
제대로 싸우는 일이라면, 오히려 교육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 나만 해도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비겁했던 거다. 겁이 나기도 하고. 스스로 비겁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아이들이 싸움을 경험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 전혀 해롭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괴롭힘은 심각한 문제다. 괴롭힘을 당하면 증오심이 쌓이고, 이 증오심이 아주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괴롭힘을 당한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가능성이 높다. 그냥 싸움을 한 친구는 이기든 지든 간에 그렇게 증오심을 갖진 않는다. 괴롭힘과 싸움이 다른 지점이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알바니 프리스쿨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몸싸움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두 아이가 서로 간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치고받고 싸울 때, 그 싸움이 공정하고 또 상대방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게 아니면 계속하도록 허용한다. 가까이에 어른 한 명이 있으면서 안전한지 확인도 하고, 필요하다면 그 결투에서 서로 완결의 느낌을 갖고 화해에 이르도록 도움을 준다"(<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48쪽) 프리스쿨 설립자 메이의 표현대로 '경험의 정치역학'이라 불리는 지점에 아이들 스스로 도달하도록 돕는 것을 중요한 교육과정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철학은 40여 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있다. 성장과정에서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한 번도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침 좀 뱉는 친구가 자존심을 건드릴 때도 피하기만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하는 말은 흔히 비겁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된다. 싸워서 코피가 터지더라도 제대로 싸워보는 것은 성장과정에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부당함과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자존감을 키워준다. 고등학교 시절 공설운동장에 전교생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서는 쌍욕을 해대는 교련 선생에게 분노하면서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뒷담이나 깐 것은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다. 힘없는 상대를 괴롭히는 것은 권력욕의 왜곡된 표출이다. 오른쪽을 때리는 자에게 왼뺨도 내어주라는 예수의 비폭력 가르침은 자칫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말이다. 맞짱 뜰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뺨을 때리는 자를 위해서도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보다 불합리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맞짱을 뜨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인간은 쉽사리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 못한다. (<민들레> 79호, "학교폭력과 폭력학교" 가운데 일부) |
ⓒ프레시안(이명선) |
맞으며 자란 아이는 결국 때린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을 이야기할 때면 보수 진영은 종종 학생인권조례를 문제 삼는다. 학생인권조례가 체벌을 금지하는데, 체벌을 막으면 거친 아이들을 단속할 수 없어서 학교폭력이 더 심해진다는 논리다. 이게 과연 옳은 주장일까.
현병호 : 아버지한테 맞으면서 자란 아이가 커서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높다. 교사한테 맞은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폭력이 익숙한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보다 약한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돼 있다. 위계를 당연시하고, 그걸 폭력으로 유지하는 구조가 문제다. 체벌로 아이들을 바로잡겠다는 발상은 군사문화의 산물일 뿐이다. 교사는 장교, 고학년은 병장쯤으로 여기는 것 아닐까.
프레시안 : 학교폭력을 둘러싸고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 초점이 '일진'인 가해자에게 맞춰져 있다.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춘 진단이 드물다.
현병호 : 성폭력도 마찬가지이듯 피해자를 우선적으로 돌봐야 한다. 그런데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학교 안에 그런 역량이 있다면 (학교폭력)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 문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일종의 치유센터가 필요하다. 치유 역량이 있는 현장에 피해자를 맡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한다.
가해자에게만 초점을 맞춘 담론은 분명히 위험하다. 대부분 '일진'이 누구인지를 찾아내서 그들을 솎아내자는 주장이다. '일진'끼리 모아놓으면, 그곳은 평화로울까. 또 '일진'을 솎아낸 자리에선 계속 평화가 유지될까. 그렇지 않을 게다. 새로운 가해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몸을 풀어줘야 마음도 풀린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폭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집단 괴롭힘 같은 것은 없지만 드물게 왕따도 생겨나고 주먹다짐도 일어난다. 그럴 때 흔히 묵언수행, 108배 등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수행으로 문제를 풀어가려 애쓰는데, 연좌제에 가까운 이런 문화는 일종의 전체주의 경향을 띠고 있어, 아이들로 하여금 공동체 문화에 질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폭력성의 뿌리는 아이들의 성장과정 만큼이나 다양해서 한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증오나 폭력성은 그 본질에서 사랑과 다르지 않은 에너지다. 어린 나이에 자기성찰의 힘으로 에너지 변환의 연금술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른들의 순진한 기대다. 자기혐오와 세상에 대한 증오가 뒤섞여 발효되는 폭력성은 다른 출구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파괴적인 에너지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알바니 프리스쿨에서 하듯이 어린아이들의 경우 발버둥치면서 분노의 에너지를 마음껏 표현하도록 어른이 끌어안고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십대의 경우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으므로, 에너지를 안전하게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스포츠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분노와 증오는 마음만 굳게 하는 게 아니라 몸의 근육도 경직시킨다. 몸을 풀어주는 게 마음을 푸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폭력적인 아이들의 경우 레슬링 같이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운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민들레> 79호, "학교폭력과 폭력학교" 가운데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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