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부 보수언론의 사설과 보수논객의 칼럼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지이자 부시 행정부의 의중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20일자 사설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대미인식을 문제삼았다.
그러면서 "부시 대통령은 노 당선자와 전화하면 미국은 주재국민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통보해야 한다"며 "한국민 보호를 위해 있는 주한미군을 한국민들이 더 이상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우리는 철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보수논객의 한 사람인 새파이어는 뉴욕타임스의 칼럼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 자유를 빚진 한국은 유권자의 과반수가 그들의 영토에 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데 대해 분노하고 있다"며 주한미군은 이제 철수를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의 위험한 핵시설문제를 다루는 데 훨씬 더 행동의 자유가 생길 것"이라는 위협적인 언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워싱턴의 보수신문인 워싱턴타임스의 "한국이 스스로를 방위하도록 해야 할 때가 됐다"는 제목의 독자 기고문은 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한국민들의 대응을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의 장기적 생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한국이 북한에 패퇴해도 이는 한국민들의 생존의지 결여 때문이며 한국을 위해 미국의 피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 새퉁스런 주한미군 철수론은 그 주장의 내용이나 어투로 볼 때 무엇인가 서로 조율되고 의도된 발언이라는 냄새가 난다. 주한미군 철수는 일부 보수 논객이나 신문이 느닷없이 주장한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 발언들이 노리는 바는 주한미군 철수가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이들 철수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주목해야 할 바가 있다.
우선, 무엇보다 가장 주목해야 할 바는 주한미군 철수론이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항의시위가 어제오늘이 아니건만 주한미군 철수론을 들고 나오기는커녕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이들 보수 신문이나 논객이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부터 한국 유권자의 절반이 미군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론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갑자기 들고 나온 것이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를 비롯한 보수세력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적극 동조하는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 기대했고, 또 당선되도록 은근히 돕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행동까지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에 대해서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부시 행정부를 비롯하여 미국의 보수세력은 당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 논객과 언론을 통하여 주한미군 철수론을 들고나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압박카드인 것이다.
이러한 시점의 문제는 부시 행정부를 비롯하여 미국의 보수세력이 한국에 대해 어떤 자세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한국민의 여론보다는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정권을 통해서 한반도 정책을 실현하려 한다는 점이다. 자기들의 입맛에 맞고 따라서 당선되기를 바랐던 이회창 후보가 낙선하고 대신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고 소파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을 표명한, 따라서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주한미군 철수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는 주한미군 철수론을 무기로 노무현 당선자와 그 정부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순치시키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주한미군 철수론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이들 주장이 한결같이 한국민의 보호가 주한미군의 존재이유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론적인 얘기이지만,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철저하게 국익에 따라 행동한다. 미국도 이 점에는 철저하다. 주한미군의 기본적인 목적은 과거에는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는 것이었고, 오늘날에는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지키려는 것으로 철저하게 미국의 국익을 위한 것임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게다가 주한미군의 방위의 일차적 목표는, 미 당국자가 언젠가 밝힌 대로, 일본이지 한국이 아니다.
미국의 군사, 외교의 책임자들이 의회에서 발언할 때는 주한미군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공산권의 몰락으로 해외주둔 미군의 축소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주한미군 축소 내지는 철수 문제도 거론되었고 그때도 미 군사책임자들은 의회청문회에서 주한미군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계속 존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남북이 통일된 이후에도 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것이라고까지 공언했다.
그럼에도 그런 발언들이 미 국민이나 외국에 대해서 표명될 때는 항상 미국의 국익이 아니라 상대국이 이익이나 보편적 가치가 강조된다. 예컨대, 한국에 주한미군의 존재목적을 말할 때 한국민의 보호와 한국 방위를 내세운다. 여기에는 미 정부와 언론의 협조가 작용한다. 미국이 관련된 국제문제에 있어서 미 언론은 미 정부와 거의 언제나 일심동체가 되어 미국의 행위를, 심지어 그것이 침략행위인 경우에도, 평화, 자유, 국제협력 등으로 포장하여 합리화한다. 이것이 국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미국 언론의 애국주의적 전통이다.
부시 행정부는 보수정권인 만큼 부시 행정부의 생각을 대변하기 위해 보수 논객이나 언론이 나설 것은 불문가지다. 그래서 그들은 짐짓 마치 주한미군이 순전히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한국민을 지키기 위해 주둔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진정한 존재이유를 숨기고서 부수적이고 결과론적인 것을 강조하면서 철수 운운하는 것은 정말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철수를 빙자하여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물론, 주한미군은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주었고, 한반도에 전쟁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미국에 고마워하고 있고 그래서 미국과 혈맹관계를 맺고 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는 주한미군 주둔비의 상당부분을 부담하고, 미국 무기를 사주고, 미국의 국제정책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주한미군의 일차적 목적이 한국민의 보호라고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외교적 수사에 속는 것이고, 우리의 자주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나아가 주한미군에 대한 우리의 정책을 올바로 수립하지 못하게 된다. 주한미군은, 6 25 전에 그러했듯이, 미국 정부가 철수해야 한다고 결정하면 우리가 떠나지 말라고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가차없이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철수론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 국민의 미국에 대한 요구를 과장하고 왜곡했다는 점이다. 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우리 여중생들의 압사사건과 그 뒷처리에 항의하기 위해 일부 국민들이 추모시위에 참여하여 소파개정을 요구하고 대등한 한미관계를 요구했다.
그런데 철수론자들은 이것을 우리 대선결과와 연결지어 엉뚱하게도 노무현 당선자를 지지한 유권자 모두가 마치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것처럼 왜곡했다. 추모집회에서 일부 미군철수 구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집회에서 나타난 우리 국민의 진정한 요구는 작게는 불평등한 소파개정, 크게는 대등한 한미관계라는 지극히 온건하고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그런 요구와 대선결과는 직접적인 인과관계도 없다.
그런데 주한미군 철수론자들은 우리의 이러한 진정한 요구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에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엄청난 반미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곧 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의미하는 것인 양 말한 것이다. 이것은 소파개정과 대등한 한미관계라는 온건하고 정당한 우리의 요구를 호도하기 위한 의도적인 과장이고 왜곡이다.
그런 정당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미국 보수세력은 사전에 그런 요구를 봉쇄하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엉뚱하게 보이지 않도록 한국에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여론이 지배적인 것처럼 과장하고 왜곡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한미군 철수론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그것이 한미관계에서 미국이 불리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일종의 해묵은 압박 카드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대미관계와 관련하여 조금이라도 자주적인 노력이 있거나, 비싼 무기판매와 같이 중요한 거래협상이 있거나, 어쩌다 반미운동이 일거나 하면 미국은 압박 카드의 하나로 곧잘 주한미군 철수론을 들고 나온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이 말년에 독자적으로 미사일을 개발하며 자주국방을 외치자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론을 들고 나왔다.
미국이 자기의 국제적 전략이나 필요에 의해서 제기하는 주한미군 철수론이 아니고 남한의 정국에 대응하기 위해 제기하는 주한미군 철수론은 이처럼 진정으로 철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압박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일 뿐이다.
작금의 주한미군 철수론은 여중생 추모집회와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미국에 불리해진 한국의 정국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단기적으로는 소파개정과 노 당선자의 한미간 대등관계 추구를 막고, 장기적으로는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주둔을 보장받기 위한 전술일 뿐이다. 그리고 미 정부의 정식정책도 아닌 단순한 압박 카드를 무책임하가 행정부가 공식적으로는 들고나올 수 없기 때문에 보수 논객이나 신문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주한미군 철수론이 압박 카드로서 효과가 있으려면 주한미군이 순전히 한국민의 보호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래서 주한미군 철수론을 주장하는 이들 보수 논객이나 신문들이 이구동성으로 주한미군이 한국민의 보호를 위해서 존재하는 양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간파해야 한다. 최근의 주한미군 철수론은 노무현 당선자와 그를 지지한 많은 국민들이 추구하는 소파개정과 대등한 한미관계의 실현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미국 보수세력의 작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당선자를 비롯하여 우리 정부는 이에 너무 구애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소파개정과 대등한 한미관계를 위한 항의시위와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미국 보수세력의 불만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 주한미군 철수론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주장에 구애받고 동요하면 할수록 우리는 본의 아니게 소파개정과 대등한 한미관계를 바라지 않는 미국 보수세력의 저의에 휘말리는 것이 된다.
우리 언론은 주한미군 철수론의 속셈을 지적하고 노 당선자와 정부에 대해 냉정한 대응을 주문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언론과 언론인이라면 대한민국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익은 소파를 개정하고 한미관계를 보다 대등한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 당선자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고무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특히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는 보수우익적 언론이라면, 우리 대통령과 정부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는 논조를 보여야 할 것이다.
우리 언론은 여중생 추모시위와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빌미로 미국의 일부 보수 논객과 신문이 주한미군 철수론을 주장한 데 대해서 그 논리적 비약과 부당함을 주장해야 마땅하다. 여중생 추모집회나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의미하는 바는 소파개정이나 대등한 한미관계를 요구하는 정당한 것이며 이를 미국 정부는 한미간의 건설적인 동반자관계의 유지를 위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진정한 대한민국 언론이라면 주한미군 철수론과 관련하여 미국을 압박하고 노 당선자와 우리 정부에 힘을 보태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우익지 조선일보는 속셈이 뻔한 주한미군 철수론을 반박하고 미국을 압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맞장구를 치면서 노 당선자와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조선일보 28일자는 "미국 내 '반한' 움직임을 주목할 때"라는 사설을 통해 "한미관계에 드리워진 불행하고도 불편한 매듭들을 풀어야 할 것"이라며 노무현 당선자를 코너로 몰고 있다.
게다가 김대중 칼럼은 "이대로 가면 '철수'로 간다"는 자못 묵시론적인 제목의 글에서 "과거 한국 안보상황은 아무리 불안해도 주한미군이라는 상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한미군 자체가 변수로 변하고 있다"는 원로언론인 답지 않은 순진한 인식과 함께 "미국과의 관계, 구체적으로는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정리에 즉각 착수해야 할 것"이라고 노 당선자를 다그치고 있다.
국민의 정부와 북한의 속셈은 잘도 지적하는 조선일보에게 미국 보수세력의 주한미군 철수론의 그 뻔한 속셈은 보이지도 않는가. 평소에는 음모론도 곧잘 제기하는 신문이 주한미군 철수론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동조하여 큰일 났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면서 미국 대신 노 당선자와 우리 정부를 압박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조선일보는 과연 어느 나라의 신문인가, 그리고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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