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건축사 사무소와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서 쉼 없이 10년을 일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적 여유 없이 월화수목금금금, 야근과 철야가 반복되는 삶을 살았다. 부양가족 없는 미혼의 직장인이었고 병원에 갈 일조차 별로 없던 나는, 당연히 복지 혜택을 누려본 일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10년을 보낸 후에야, '복지'가 나에게 다가왔다. 내 생활에 절박한 필요 급여이기보다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로서, 배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배움으로 시작한 복지
"헌법에서 규정한 '인간다운 생활 권리'를 제도적으로 실현한 최초의 법안. 개인과 가족에게 전가된 빈곤 문제 책임을 국가 차원으로 끌어올린 법안." 국민기초생활보장법(기초법)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다. 또박또박한 글씨, 단호한 문장으로 기억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기초법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활동가가 되고 나서의 일이다. 그것은 설명문구가 아니라 선배들이 앞서간 길 위에, 그리고 수급자들 속에 있었다.
'410만 명',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제 절대적 빈곤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숫자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바깥에 있는 시민들이다. 지금까지 선배들이 벌인 시민사회 활동의 기록은 이들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과 활동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어떤 글보다 생생하게 초보 활동가에게 전달되어 왔다.
내가 참여연대에 들어오기 전 2004년과 2010년 폭염 속에서 '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희망UP 캠페인이 진행되었었다. 나는 우선 이 행사를 담은 수많은 기록(체험 수기, 진행 과정을 담은 꼼꼼한 회의 자료, 사진 및 영상)을 통해서 비현실적인 최저생계비, 엄격한 부양의무자 기준, 수급자가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원받지 못하는 급여 체계 등 여전히 기초법 테두리의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기록은 내 머릿속의, 배워야 하는 어떤 것이었던 '복지'를 가슴 언저리로 끌어내려 주고, 복지가 제도가 아닌 삶을 일부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욕구가 허락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안에 속해 있지만 수급권자들의 일상과 기본적인 욕구는 제도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역설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 주겠다던 제도가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하고 있었다.
"최저생계비는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최소한의 비용으로서, 기초생활수급자 등 각종 복지대상자 선정 및 급여의 기준으로 활용된다." (보건복지부)
"현재의 최저생계비로는 '먹는 것 이외의 모든 지출은 모험이자 사치'였고, 최저생계비는 '사회안전망'이 아니라 생존의 극한으로 몰아넣는 '가난의 포획망'이자 '사회배제망'이었다." ('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희망UP 캠페인 체험단)
▲ '알바'생이 한 달 꼬박 일해서 버는 돈은 평균 89만 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기초수급자 14만 명 탈락시켜놓고 3만 명 추가했다고 강조하는 정부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받는, 제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현실도 이러한데 부양의무자 기준 등의 이유로 급여 대상에서 탈락한 사람들, 제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처지는 오죽할까?
기초생활보장제도로부터 배제당한 사람들, 즉 기초법 사각지대를 만들어 내는 핵심 요인이 바로 부양의무자 기준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부양의무자의 실제 부양 여부를 묻지 않고 수급자가 선정되고 수급자의 급여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부양을 하고 있지 않거나 부양을 할 수 없는 부양의무자라고 하더라도,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다.
현재 수급자와 부양의무자 두 가구 소득의 합이 각각 가구의 최저생계비의 130%(일부 185%)가 넘을 경우에는 수급자가 될 수 없다. 설령 수급자가 된다 하더라도 부양의무자 소득의 일부가 수급자 소득으로 '간주'되어 수급자의 급여에 반영된다.
또한 실제 부양을 받지 못하는 경우 부양 단절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수급자는 수급을 포기한다. 부양 능력이 미약한 부양의무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몇 십년간 연락을 끊고 지낸 부모 또는 자식에게 연락할 수 없어서, 부양의무자에게 가정 폭력 등을 당한 경우, 또는 부양의무자가 그 피해자인 경우, 수치스러운 개인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부담 등 수급자가 수급을 포기하는 사연은 다양하고 또 아프다.
특히 행정 편의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사회복지 통합 관리망은 기계적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을 적용해 빈곤층의 일부를 솎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부양의무자 기준은 삶을 지속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제도 밖으로 밀어낸다. 이로 인해 수급자 선정에서 제외된 사람은 2010년을 기준으로 117만 명에 달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정부가 "올해 기초수급 ○만 명 증가", "수급자 기준 완화", "기초생활 부정 수급"과 같이 제도 안에 새로 편입되는 사람들만을 기록하고 홍보한다는 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제도 안에서 큰 도덕적 해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제도 밖으로 밀어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정부는 올해 2013년 보건복지부 예산에서 수급자 선정 기준을 완화하여 지난해 8월보다 수급자 3만 명이 추가로 증가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지난해 상반기, 약 14만 명에 달하는 수급자가 제도 밖으로 밀려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탈락자 14만 명의 상당수는 실제 부양의무자로부터 생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절대 빈곤층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던 한 아버지는 장애를 갖게 된 아들의 수급권을 위해 자살했다. 제도 내에 있던 한 70대 노인은 왕래조차 없는 자녀의 소득이 드러나 수급자에서 탈락하자 끝내 목숨을 끊었다. 다른 70대 노인도 수급권이 박탈된 이후 농약을 마시고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이렇게 나에게 복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픈 배움으로 다가왔다. 제도 밖으로 내몰려 사라진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배움의 대상이었던 복지가 비로소 구체적 현실로 다가왔다.
▲ 2012년 12월 24일 대통령 당선 직후 기초생활수급자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
'복지' 단어가 사회를 뒤덮었지만, 현실은…
활동가라는 옷이 조금 익숙해질 무렵, 무상급식으로 촉발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정치권·언론·출판계에서는 다양한 복지국가 논쟁을 쏟아냈다. 하지만, 정작 빈곤층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복지 확대를 내뱉던 정치권은 올해 빈곤층 의료비 지원 예산 2842억 원을 삭감했다. 앞으로 빈곤층은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마저 받지 못할 어려움에 처했다. 사회 곳곳을 '복지'라는 단어가 뒤덮었지만, 정작 힘없는 사람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올해, 시민단체 활동가가 된 이후 첫 대통령이 선출됐다. 그간 내 삶에 몇 명의 대통령이 지나갔지만,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본의 아니게 출마부터 당선까지를 꼼꼼히 지켜본 '첫 번째 대통령'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대통령이 참으로 실망스럽다는 점이다. 그가 펼쳐놓은 약속의 꾸러미에는 겉으로만 그럴싸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실망스럽고 우려되는 기초생활보장제도
박근혜 정부에서 기초생활보장 제도는 어떻게 될까? 수급자를 부양하고도 중위소득 수준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부양의무자 기준을 개선'하고, 현재 기초법 급여 체계를 7가지 급여로 분리해서 별도의 선정 기준을 가지고 운영하는 '맞춤형 급여 체계로 개편'하겠다고 한다. 또한 '근로능력자를 수급대상자에서 제외'하고 근로연계형 소득 지원 제도인 근로장려세제(EITC)로 편입하여 일을 통한 빈곤 탈출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진정으로 빈곤층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보여주기에 급급한 정책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어려운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힘든 조건에 놓일까 봐 우려된다.
우선, 기초법 사각지대의 주범으로 꼽히는 부양의무자 기준에 대해서 새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그동안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수급자들이 받은 고통에 비하면, 너무 모호하고 소극적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화하더라도 비수급 빈곤층, 즉 기초법 사각지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 규모가 축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부양의무자 기준 개선'이 아닌,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발생하는 사각지대 중 몇 %를 줄일 것인지 등과 같은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또한 부양의무자가 부양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았으나 부양을 기피하거나 미흡한 부양을 제공하여 발생하는 사각지대에 대해서 수급신청자를 국가가 선(先) 보장하고, 후(後)에 국가가 책임지고 부양의무자로부터 부양비를 받아내는 등의 실질적인 방안이 필요한데도, 그저 완화하겠다는 말뿐이다. 이는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수급자들의 고통을 전혀 살피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근로능력자를 수급대상자에서 제외하는 방안은 세밀하게 제도를 설계하지 않으면 근로능력자 빈곤 가구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지 못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능력이 있는지 파악하지도 않고, 단지 서류상 일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급자를 제도 밖으로 내몰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근로능력자에게 근로 기회를 제공하고 자립을 유도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가구의 최저생계를 담보로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심지어 제도 밖에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동안 근로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사회에서 배제되고 짓이겨진 이들의 삶을 살펴보고, 질 낮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정비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또 다른 실패와 빈곤의 나락으로 이들을 떨어뜨릴 수 있다.
복지 '맞춤형'인가, 복지 '마침형'인가?
이뿐만 아니라 이들을 쫓아내 마련한 여윳돈으로 차상위 계층에게 교육, 주거 등 개별 급여를 지원하는 것이 '맞춤형' 복지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최저생계비를 인상하여 빈곤선 상위의 비수급 빈곤층을 수급자로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최저생계비를 현재의 수준에서 유지한 채 차상위 계층에게 부분적인 급여를 지급하는 것을 수급자 대폭 확대라고 홍보한다. 맞춤형 복지라고 하면, 수요자의 욕구를 면밀히 따져서 각각의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지만 내놓은 약속들은 한두 가지 혜택으로 모든 것을 끝마치는 '마침형' 복지에 불과해 보인다. '국민 맞춤형'이 아닌 '예산 맞춤형' 복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커졌지만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상태에서 빈곤의 사각지대는 커지고 있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근로빈곤층은 증가하고 있다. 아동수당·노인수당 등 계층별 수당 제도가 발달한 것도 아니고,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한 국민연금이 성숙되지도 않았다. 건강보험은 모든 의료비용을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 국공립어린이집, 공공병원 등의 공공 인프라는 현저히 부족하다. 아직 보편적 사회서비스가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공공 부조가 해야 할 몫이 큰데 이 역시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시민단체 복지 활동가의 또 10년의 다짐
또한 복지는 힘없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30대 활동가인 나에게도, 언젠가 태어날 나의 아이에게도, 과거 나와 함께 일하던 회사 동료들에게도, 정년 이후 삶을 살고 있는 70대 부모님에게도, 대한문 앞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도, 심지어 충분한 소득 수준을 보장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지는 말이 아닌 삶의 일부로서 누구에게나 곁에 있어야 한다. 보육, 교육, 의료, 노후, 주거, 고용 등 일상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보편적 서비스가 모든 이의 삶 속에서 제공되는, 보편 복지가 구현되는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참여연대 명함을 가진 지 이제 3년. 익숙하던 직장을 나와서 뒤늦게 복지를 만나 배울 것도 많고 배울수록 과제가 늘어난다. 지난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야근과 철야가 반복되는 삶밖에 모르는 직장인들이 우리나라 빈곤층의 삶을 비롯해, 여러 사회의 문제들을 돌아 볼 수 있도록 열심히 알려야 한다. 그렇게 내가 사회에서 10년 만에 가진 이 명함이 다시 또 10년이 될 때까지 계속 복지를 배워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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