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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묻는 자도 없이 묻힌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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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묻는 자도 없이 묻힌 자의 슬픔

김민웅의 세상읽기 〈238〉

전쟁문학은 고통의 기록인 동시에, 희망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건 그래서 그대로 마주보기에는 너무 적나라하면서 또한 아직 잡히지 않은 것을 탐색합니다.
  
  총성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고 승리를 약속하는 깃발은 나부끼며 사람들은 산과 들에서 이름 없이 흙이 되어갑니다. 묻는 자도 없이 묻혀 갑니다.
  
  전쟁문학은 죄의 증언인 동시에, 그 죄를 씻는 세례식입니다. 죄의 증언이 철저하지 못하면 세례는 무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자는 있지만 죽인 자는 없습니다. 죽인 자가 있어도 죽인 책임은 없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논리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그 살해명령을 찾아내면 됩니다.
  
  뉘렌베르크와 동경에서 파시스트를 재판대에 세운 나라 아메리카는 그의 손으로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았다고 떳떳해 했습니다.
  
  아메리카의 저 아름다운 나라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었고, 재판이 벌어져도 피고석에 앉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 나라가 앉는 곳은 재판장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나라는 피고석에 서 있습니다. 그 자신이 거부해도 이미 역사는 피고석에 누가 있어야 하는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허다한 전쟁문학이 나왔지만, 피고석의 아메리카를 기록한 문학은 아직 드뭅니다. 전쟁문학이 충분히 적나라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의 증언이 철저하지 못한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자는 적지 않건만, 죽인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책임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오랫동안 침묵이 강요되어 왔습니다. 입을 여는 자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재판장은 침묵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문학이 역사의 진상에 충실한 것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죽은 이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살인사건의 현장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 현장은 다만 시신이 있는 곳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총구를 겨냥하게 하는 힘을 발동하는 자리, 그곳 역시 살인사건의 현장입니다.
  
  역사는 게으르지 않습니다. 결국 들추어내고 말았습니다.
  
  아메리카의 병사들이 이라크에서 저지른 학살은 더 이상 은폐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가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휠체어에 탄 늙은 아버지도 그 땅을 점령한 외국병사의 눈에 이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절규는 하늘을 갈라놓았고, 쓰러진 자의 영혼은 땅위를 맴돌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도 평화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학살이라는 현실은 장소를 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세기 전 이 땅의 노근리는 바로 이라크이고 아프가니스탄이었습니다.
  
  명령이 마침내 발견되었습니다. 피고석에 선 아메리카는 명령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증이었습니다. 위증죄는 큽니다.
  
  얼마 전 파주의 농부, 그 가슴에 총을 쏘는 시늉을 한 훈련 중의 외국 병사, 그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노근리에서 억울하게 흙이 된 이들의 후예를 그렇게 겨냥하는 법이 결코 아니지요.
  
  노근리에서 피난민 학살을 하게 만든 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명령을 내린 자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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