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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약 사재기' 해야 하나…'멘붕' 언니들의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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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피임약 사재기' 해야 하나…'멘붕' 언니들의 수다

[좌담] '언니들', 피임약 전환이 불만인 이유는?

지난달 정부가 사후(응급)피임약을 약국에서 살 수 있게 한다고 발표했을 때, 언니들은 반겼다. 주말에 콘돔이라도 찢어지면 문 연 병원을 찾아야 하는 불안에 떨었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뒤이은 발표가 뜻밖이었다. 정부는 지금까지 약국에서 샀던 사전(경구)피임약을 앞으로는 병원에서 처방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전피임약이 사후피임약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

수년 간 사전피임약을 먹었던 한 언니는 '멘탈붕괴'에 빠졌다. 사전피임약보다 사후피임약이 몸에 더 나쁜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 50년 동안 약국에서 팔려왔던 사전피임약이었다. 언니는 고민한다. "내가 그렇게 몸에 나쁜 약을 먹고 있었던 것일까?"

재빨리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다. 산부인과 의사들 답변이 한결같다. 35세 이상 흡연자만 아니면 사전피임약은 별로 위험하지 않단다. 그러던 의사들이 요즘은 피임약의 부작용을 경고한다. 의사단체와 약사단체가 전혀 상반된 주장을 늘어놓고 싸운다. 무엇이 진실일까? 언니들은 환멸에 빠진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의견수렴과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자문 등을 거쳐 피임약을 비롯한 '의약품 재분류안'을 곧 확정할 계획이다. 시행 시기는 이르면 내년 초다. 그러자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피임약 사재기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는 댓글이 속출했다.

<프레시안>은 '의약품 재분류안' 결정즈음을 맞아, 세 미혼여성 A(26), B(30), C(22) 씨를 만났다. 직장인 A 씨, 취업준비생 B 씨, 대학생 C 씨는 생리불순 치료나 피임 등을 목적으로 피임약을 복용해왔다.

피임에 대한 생각은 각양각색이었지만, 언니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다. 지금처럼 산부인과 문턱이 높은 상황에서, 정부가 대책 없이 피임약을 막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것. 이들은 지금 한국의 사회문화·보건의료 맥락에서는 여성에게 피임에 대한 선택권을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A 씨와 B 씨는 같이 인터뷰했고, C 씨의 인터뷰는 나중에 따로 추가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편집자>

프레시안 : 사전피임약을 언제부터 왜 먹었는지 알려 달라.

A : 생리불순으로 사전피임약을 1년 반 동안 꾸준히 먹었다. 일반 호르몬제뿐만 아니라 피임효과가 있는 약을 먹으면 피임과 생리불순을 둘 다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살이 찌고 성욕이 감퇴했다. 사람마다 맞는 약과 안 맞는 약이 있는데, 맞는 브랜드 약을 찾은 뒤부터 부작용도 전혀 없고 컨디션이 오히려 좋아졌다.

B : 사전피임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한 지는 4개월 정도밖에 안 됐다. 학창시절에 여행을 가서 생리날짜를 미루려고 먹었던 적은 있다. 나도 생리불순을 치료하려고 산부인과에 가니 피임약을 처방해줘서 먹고 있다. 지금도 병원에서 처방 받아야 하는 사전피임약이 두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먹는다.

C : 2년 정도 됐다. 다낭성난소증후군 진단을 받고 처음에는 호르몬제를 처방 받았다. 하혈이 멈추지 않아서 자궁벽을 두툼하게 만들어주는 약을 처방 받았다. 그 후로부터 병원에서 피임약을 먹으라고 하더라.

프레시안 : 피임 용도로 피임약을 복용할 생각은 없었나.

B : 피임약을 피임용도로 사용하기 거부감이 든다. 내가 피임약을 먹어도 애인은 콘돔을 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치료 용도로 먹는다는 생각이 더 큰데, 애인이 피임약으로 인해 본인은 피임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진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게 싫다. 그리고 나와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피임은 여자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거나 여자들이 피임약을 먹으니 편하다고 무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할까봐 걱정된다.

피임약도 매일 같은 시간에 먹어야 효과가 있지 나는 덜렁거려서 가끔은 하루씩 빼먹기도 한다. 그러면 피임 효과가 떨어지니 불안하다. 임신에 대한 불안이 커서 요즘은 아예 관계를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웃음). 애초에 발생빈도를 줄이자는 게 위험을 줄이는 가장 큰 방법이다.

A : 나는 이 언니와 반대다(웃음). 피임만은 내가 조절하고 싶고, 남자에게 피임을 맡기고 싶지 않다. 주위에 콘돔을 사용했다가 피임에 실패하고 아이를 가진 경우가 많다. 나는 생리불순으로 고생했던 트라우마가 있어서 콘돔만으로는 불안하다. 관계 후에 생리가 없으면 피임 실패인지 생리불순인지 걱정된다. 콘돔이 찢어지거나 빠졌을 때 사후피임약을 먹는데,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피임 확률이 높은 사전피임약을 선호한다.

"약국서 처방받던 약, 3분 진료받으면 뭐가 달라지나?"

프레시안 : 사전피임약 재분류에 대한 방침이 곧 최종 확정된다. 지금까지 약국에서 살 수 있었던 사전피임약을 앞으로는 의사 처방을 받아야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피임약에 재분류 방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B : 이전에는 약국에서 사 먹었던 피임약을 병원에서 처방받으면 뭐가 달라질지 의문이다. 피임약은 기성품이다. 의사는 기존 피임약을 처방할 뿐이다. 나의 신체 상태를 고려해서 이 약을 특별히 조제했거나, 내 신체 상태를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단순히 내가 생리불순이니까 약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기계적인 처방을 내렸다. 한 달 뒤에 오라고 해서 갔다. '별 이상 없죠?' '네' 이 정도의 대화는 약국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나. 굳이 산부인과 갔다가 약국에서 약 타는 번거로움을 겪어야할까.

▲ 매일 외래 진료 환자수를 문자로 받는 대형병원 의사. '실적주의'는 의료인에게 3분 진료를 강요한다. 반대로 환자들은 진료받을 때 '약의 부작용이나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충분히 상담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이들이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료계의 논리를 불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의료인과 환자 모두 예방의료제도가 없는 한국 의료 체계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것. ⓒ송윤희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 감독

C : 포털사이트를 검색하면 사전피임약에 대한 의사들의 답변이 많다. 위험하냐고 물어보면 "안전하다, 괜찮다,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소문은 루머"라는 의사들의 답변이 많다. 위험하다는 얘기는 없었다. 정말 위험하다면 사전피임약이 처음 도입된 50년 전에 이미 조치했어야 했다.

내 경우에 처음 처방받았던 약에 부작용이 있었다. 구토하고 속이 안 좋았는데, 결국 약사를 찾아가서 부작용을 해결했다. 반면에 병원에 갔더니 간호조무사가 형식적인 질문만 하고 처방전을 줬다. 사전 피임약은 치료약으로도 많이 먹지만 생리주기를 조절하기 위해서도 많이 먹는데 이런 것까지 의사와 굳이 상담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설사 부작용이 있다고 할지라도 약사도 전문가인데 사전피임약 정도는 처방 가능하지 않나.

A : 피임약 전환 논란은 단순히 병원과 약국 중에 선택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감기약의 항생제처럼 피임약도 의사 처방이 필요하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정부가 획기적인 판단이나 논리적인 증거를 대지 않고 갑자기 왜 처방약품으로 바꿨는지 소비자로서 의문이 든다. 몇 년 간의 임상 결과로 장기간 사전피임약을 먹었던 여성들에게 부작용이 생겼다는 정확한 연구가 나왔다면 모르겠다. 지금까지 정부나 의료계는 피임약 먹으면 자궁암에 걸릴 확률 낮아진다는 말을 해 왔으면서 이제와 무슨 얘기인가? 그렇게 문제가 많았으면 지금까지 왜 약사들이 팔아왔나? 불신밖에 안 생긴다. 50년 동안 팔아왔는데, 그럼 몇 십 년 먹은 사람은 어떻게 되나?

"갑자기 바뀌었으니 시키는 대로 하라?"

프레시안 : 정부가 충분한 설명 없이 갑작스럽게 의약품을 재분류해서 오는 불신이 큰 것 같다.

B : 의학적 부작용 때문에 사전피임약과 사후피임약을 모두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했다면 일관성이라도 있다. 사후피임약은 1회밖에 복용하지 않으므로 덜 위험하다는 논리를 펼치는데, 그러면 복용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사후피임약을 한 달에 두세 번, 혹은 매달 계속 먹으면 어떻게 되나? 반대로 접근성을 넓히려면 일관성 있게 사후, 사전피임약 모두 일반약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느 쪽으로 봐도 이번 의약품 재분류 방향이 맞지가 않다. 의사단체와 약사단체가 나와서 토론하는 것을 봐도 서로 이해관계만 주장한다. 실제로 약을 먹거나, 먹어야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A : 이제 와서 빅딜처럼 사후피임약은 약사에게 주고, 사전 피임약은 의사가 가져가는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오래 먹어왔는데, 지금까지 의사 처방 없이 먹은 내가 잘못한 건지 의문이다. 정부나 의료계 관계자는 "갑자기 바뀌었으니 시키는 대로해. 우리가 전문가니까 전문가 알아서 할게"라는 식이다.

C : 피임약을 처방할 때 의사의 '전문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아이러니하기는 마찬가지다.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내과에서도, 원칙적으로는 이비인후과에서도 피임약을 처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강조하는 전문성은 어디 갔으며 어떻게 상담을 해줄지 의문이다. 그냥 잇속 챙기기로밖에 안 보인다. 물론 어떤 약이든 장기적으로 복용하려면 충분한 상담이 필요하다. 심지어 타이레놀도 장기 복용하면 간이 나빠진다는데, 호르몬 약은 어떻겠나. 그런데 건강을 상담할 전문가가 왜 약사이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프레시안 :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방침에는 동의하나?

C : 사후피임약은 급한 약, 응급피임약이라고 불린다. 응급 상황에서 먹는 약을 높은 문턱에 배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후피임약은 관계 직후에 복용해야 피임확률이 90%이고 48시간이 넘어가면 70%이고 3일째면 50%로 확률이 떨어진다. 만약에 주말에 성관계를 맺었다고 가정하면 사람들이 이 약을 병원에서 급하게 처방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사후피임약이 전문의약품이든 일반의약품이든 상관 없이, 의사나 약사는 환자에게 사후피임약을 안 먹이고 되돌려보낼 수는 없다. 누군가가 사후피임약이 필요해서 병원에 갔다고 하자. 의사는 부작용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당신은 이거 먹으면 위험하니 혹시 아이가 들어서면 낙태하세요"라고 말하고 돌려보낼 건가?

B : 응급피임약은 말 그대로 '응급'이 제일 중요하다. 응급할 때 바로 먹을 수 있는 접근성이 가장 우선이다. 그동안 의료계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사후피임약에 대해서만 언급하다가 이제 와서는 사전피임약이 누적되니 몸에 안 좋다고 한다. 그러니 소비자가 어떻게 신뢰하겠나.

"대놓고 '임신 가능성' 묻는 의료인, 하염없이 높은 병원 문턱"

프레시안 : 산부인과 문턱이 높은 것도 피임약 복용을 가로막는 한 원인이다. 현실은 어떤가?

A : 산부인과에 가면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도 "성관계를 한 적 있나요?"라고 물어본다. 굳이 산부인과가 아니더라도 배가 아파서 응급실에 가면 "임신 가능성은 없나요?"라고 크게 물어본다. 그럴 때 주위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다. "피임약 먹지 말란 얘기가 아니야. 왜 너흰 병원에 못가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B : 미혼 여성에게는 산부인과 문턱이 정말 높다. 나는 생리불순이라는, 이 사회가 미혼여성에게 용인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도 산부인과에 가기로 결심하는 데만 몇 달이나 걸렸다. 그간 산부인과에서의 경험이 스트레스로 누적됐기 때문에 생리불순으로 가는 것조차 심적으로 힘들었다. 하물며 미혼여성들이 피임 목적으로 피임약을 처방해달라고 하면 시선이 어떨 것 같나. "남자친구랑 자야 하는데 피임하려고?" 물론 이상적으로는 당연히 그런 시선에서 자유로워야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산부인과에 가는 젊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힘들었다. 처음 나는 거의 기혼 여성들만 가는 동네 산부인과에 갔다. 들어가자 느껴지는 시선부터가 달랐다. 병원이 너무 작아서 의사와 진료하는 내용조차 밖에 대기자들에게 다 들릴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지방 출신인데, 지방도시에는 한 동네에 산부인과가 하나만 있다. 의사가 동네에서 아는 사람이고, 동네 아줌마들이 다 있는데 어떻게 그런 데 가서 편하게 피임약과 관련한 상담을 받고 처방을 받을 수 있겠나? 심지어 내 친구는 자궁근종 수술을 했는데도, 산부인과에 입원하니 주변에서 쉬쉬하거나 안 좋게 보더라고 말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미혼여성이나 청소년이 병원에서 피임약을 처방받는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정부가 내놓은 방안대로 사후피임약의 접근성만 올리면,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피임을 못하고 사전피임약보다 사후피임약을 더 먹을 수도 있다. 직장인도 저녁에 여는 산부인과를 찾아야 하고, 학생들은 학교 끝나고 병원에 가야 하니까 문턱이 높다.

A : 못 가 못 가. 얼마나 눈치 보이는데….

B : 무조건 병원에 가라고 강요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미혼 여성들이 산부인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피임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이 사회적으로 용인됐을 때 처방받게끔 해야지. 현실적으로 가기 어려운데 무턱대고 의사 처방을 받으라면 오히려 피임하기 더 어려워진다.

"돈은 돈대로 더 들고, 직장인은 병원 갈 시간 부족하고"

프레시안 : 처방을 받으려면 처방비용과 조제비용을 두 번 내야 한다. 경제적인 문턱은 없나?

B : 한 달에 1만8000원, 두 달에 3만6000원이 든다. 처방까지 받으면 4만 원이다. '3분 진료'라서 물어볼 틈도 없는데 처방비용은 따박따박 든다.

C : 한 달에 약값은 1만7000~1만8000원인데, 처방전 받는데 1만 원이 더 든다. 간호조무사한테 "약 받아가세요"라는 말만 듣고 의사도 못 만난 채 1만 원을 낸다. 간호조무사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의사를 찾아왔고 그 대가로 돈을 지불했는데 의사를 만날 수 없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3분 진료가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전피임약이 전문의약품으로 바뀌면 환자들이 받는 혜택에 비해서 비용 부담도 커질 것이다.

A : 직장에 다니다 보니 경제 문턱보다는 시간 문턱이 큰 문제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출근하는 길에 약국에서 사전피임약을 산다. 사전피임약이 전문의약품으로 바뀌면 병원에 갔다가 약국에 가는 시간이 부담스럽다. 시간적인 문제 말고도 시선의 문제도 있다. 직장 가서 "피임약 처방받으러 가야 하니 산부인과에 다녀올게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내가 사전피임약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프레시안 : 그럼에도 다양한 피임방식 중에 반드시 사전피임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나?

▲ 지난달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화재보험협회에서 열린 '피임약 재분류(안)에 관한 공청회'에서 한국여성민우회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A :
나는 콘돔을 사용하면 여름에 염증이 생겼다. 질염이 생기더라. 친구들 중에서도 라텍스 재질이 몸에 안 맞아서 그런 피임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페미돔은 너무 비싸고….

피임시술을 할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비용도 들고 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약을 먹는 것과는 다르게 몸 안에 무엇을 설치하기는 부담스럽다. 다른 시술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 특히 자궁 내 피임장치인 루프를 시술한 사람에게서 허리가 아프다는 부작용이 있다고 들었다. 지금 생활에서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피임약밖에 없었다.

B : 어떤 피임법을 선호할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상대편이 콘돔을 선호하지 않을 수 있다. 애인 관계에서도 자기 의사를 확실히 표현해야 하는 게 맞지만, 돌발적 성관계의 순간에 애인에게 "콘돔 없는데 콘돔 사러 갔다 와"라고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청소년은 더 그럴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에게 피임을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분위기도 아니지 않나.

피임방식으로 꼭 사전피임약을 고집한다기보다는, 사전피임약'도' 쉽게 피임법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우리는 훈련된 사람이라 애인에게 강력하게 피임을 요구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최대한 많은 피임법을 열어줘야 여자들이 자기에게 맞는 피임법을 선택할 수 있다.

프레시안 : 피임약을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으면 청소년들의 성(性)이 통제가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B : 왜 사람들은 피임약을 풀어주면 무분별한 성관계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피임약을 통해 계획적으로 피임하는 것은 무분별한 성관계가 아니라 책임있는 성관계가 아닌가? 그리고 사실 관계만 따지더라도 청소년이 피임약의 1차 소비대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현실을 호도하는 행위다. 피임약을 제일 많이 먹는 사람은 바로 기혼여성이다. '기혼여성 > 미혼여성 > 청소년' 순인데, 많이 먹는 사람이 어떤 빈도로 용도로 이용하는지가 가장 먼저 고려돼야 한다.

C : 피임약의 주요 소비자는 기혼 여성이지만, 성 경험 연령이 낮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후피임약이 전문의약품이든 일반의약품이든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피임 문제를 지금처럼 쉬쉬한다고 해서 원치 않는 임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청소년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해결방안을 어떻게 제시할 건지 되묻고 싶다. 관계를 가졌다, 임신했을 것 같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당신의 자식이라면? 몸에 안 좋으니까 피임약을 먹지 못하게 할 건가? 아니면 생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임신 안 되면 다행이고, 임신이면 병원에 데려갈 건지 뚜렷한 대안이 없다. 모든 사람이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피임약을 허용해야 한다.

"주치의와 충분히 상담할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프레시안 : 정부는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일본에서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한다고 홍보한다(반대로 사후피임약은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스위스에서 일반의약품이다).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하는 것이 선진국의 기준이라는 주장이다.

B : 사실 나는 피임약을 선호하지 않는다. 피임약이 몸에 해롭다고 생각해서 약을 계속 먹기가 부담스럽다. 사전피임약이든 사후피임약이든 궁극적으로는 전문의약품이 돼야 한다고 본다. 다만 지금 한국의 사회적 환경에서는 전문의약품 전환에 반대한다. 제일 좋은 건 주치의가 있고, 충분한 상담 속에서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보건의료시스템은 그렇지 않다. 3분 진료다.

유럽에서 사전피임약이 전문의약품이라고 하는데, 그 나라의 산부인과 진료가 과연 한국과 같을까? 어떤 나라에서는 가족들이 첫 생리를 축하하는 파티하고, 엄마랑 손잡고 산부인과 가는 게 자연스럽고 병원 문턱이 낮다고 들었다. 한국에서는 딸이 데이트하면 엄마가 콘돔 챙겨준다던가 하는 분위기를 상상하기도 힘들지 않나? 한국은 피임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분위기와 의료시스템이 유럽과는 다르다. 전체적인 성문화나 사회적 시선이 달라지고 이를 위한 충분한 교육이 이뤄지기 전에, 피임약을 처방받으라고 강제하면 사람들은 병원에 더 안 간다.

물론 사전피임약이 일반의약품으로 바뀌면 남자들이 '피임은 여성만의 몫'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는 의견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이는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통제하기보다는 피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을 바꿔서 해결해야 한다.

A : 국민 주치의 제도가 있거나 병원 문턱이 낮은 현실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나는 사전피임약에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나에게 가장 적합한 피임방식을 찾은 셈이다. 그런데 나처럼 직장에 다니는 여성이 병원에 다니면서 사전피임약을 처방받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임신에 대한 불안은 온전히 내 몫인데 대책 없이 막기만 하면 어떡하나.

사전·사후피임약, 실제로 얼마나 위험할까?

"식약청이 제출한 피임제 부작용 종류별 보고건수를 보면 지난 50년간 국내에서 치명적인 혈전증이나 심장계 질환이 보고된 바는 없다."

민주통합당 남윤인순 의원(보건복지위)이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식약청 업무보고에서 한 말이다. 이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혈전증은 사전피임약을 복용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드물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부작용"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사전피임약은 실제로 얼마나 위험할까?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운영하는 '피임·생리 이야기' 홈페이지를 보자.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피임약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호르몬의 함량이 낮아지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완화되고 최근에는 부가적인 이점을 가진 피임약도 개발됐다"고 밝혔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또한 "현재까지 먹는 피임약과 유방암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며 "피임약을 5개월 이상 복용 시 40%의 난소암 예방 효과가, 50%의 자궁내막암 예방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산부인과의사회 스스로 사전피임약이 '안전하고 유용하다'는 모순되는 주장을 한 셈이다.

의료계 전문가들은 "모든 약이 그렇듯 사전피임약에도 부작용이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사전피임약이 아주 위험한 것도 아니다"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A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피임약을 장기간 복용했을 때 뇌졸중 등 심각한 부작용이 보고된 적이 있지만, 그런 경우는 원래 심각한 건강문제를 가진 여성에게 일어난다"라며 "건강한 여성들에게는 사전피임약이 거의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 전문의는 "심혈관계 가족력이 있거나 비만이거나 고혈압이 있는 등 여러 조건을 가지고 있을 때 사전피임약을 복용하면 혈전증이나 심혈관계 부작용이 높아진다"며 "의사들이 이런 여성들에게 피임약을 잘 걸러내는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반대로 사후피임약은? 사전피임약보다 호르몬 함량이 10~15배 많다. 구토, 어지럼증, 부정기적인 자궁출혈이라는 부작용이 있다. 장기간 복용했을 때의 사전피임약과는 달리, 사후피임약에서는 아직까지 치명적인 부작용이 보고되지는 않았다. 이는 언제까지나 용법대로 정확히 복용한다고 전제했을 때의 얘기다. 사후피임약은 한 달에 최대 한 번 넘게 복용할 수 없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사전·사후피임약이 모두 전문의약품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부작용 위험이다. 대한약사회는 반대로 두 약이 모두 일반의약품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접근성이다.

경실련은 "사전피임약의 전문약 전환은 여성의 안전하게 피임할 권리를 제한하고 약값을 높여 취약층의 의료 보장권을 침해한다"고 비판했다. A 전문의도 "피임약은 아직 비보험(건강보험 비급여)이라 약값을 전액 환자가 부담하는데, 심지어 의사 처방까지 받으라니 환자들이 반발한다"고 말했다.

이에 A 전문의는 "약국에서 피임약을 구입하려는 환자의 선택권을 존중하되, 앞으로는 피임약에도 건강보험을 적용해 환자에게 '병원 인센티브'를 주자"는 대안을 내놨다. 병원에 가면 약국에 갔을 때보다 더 싸고 안전하게 피임약을 복용할 수 있게 유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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