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담배를 끊으신 후 강냉이를 좋아하셨고 연구실 책상에는 늘 새 우편엽서가 쌓여 있었습니다. 원고청탁 등을 위해 녹차나 술병을 들고 오는 사람보다는 강냉이를 한 봉지 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훨씬 대접을 받았습니다. 평안북도에서의 유년시절 기억 탓인지 강냉이를 드시면서 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습니다.
잘 길이든 '고급' 만년필은 선생님이 분신이자, 무기이자, 사치품이었습니다. 누군가 저서를 보내주거나,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해야 할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그 만년필로 우편엽서에다가 빽빽하게 글을 적어 보내셨습니다. 나중에는 정보화시대에'편승'하여 백지에다 글을 적어서 팩스로 보내시기도 했습니다. 리영희식 국한문혼용체 서신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선생님 글의 내용이 그러했듯이, 꼿꼿하게 힘이 넘치면서도 물 흐르듯 유연한 필체도 선생님의 삶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1992년 가을 개강 무렵 오랜 옥살이 후유증으로 좌골신경통 증상을 호소하시며 한양대병원에 입원 하셨습니다.'국제커뮤니케이션'이라는 선생님 강의를 대신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막막한 마음으로 병실에 찾아가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쭈었습니다. "꼭 정장차림으로 들어가라우" 의관정제(衣冠整齊)! 한마디 뿐이셨습니다. 요즘 가벼운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으로 강의실에 들어가게 될 때마다 선생님 말씀이 귀전에 맴돕니다.
선생님은 2000년 11월 글을 쓰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십니다. 이후 군포 수리산에 다니시면서 놀라운 투혼으로 병마를 이겨내셨습니다. 2005년 오랜 구술과 교정고정을 거쳐 <대화>를 내셨고 2006년에는 12권짜리 <리영희 저작집>을 직접 교열, 출간하셨습니다.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시고'노신의 나라'에 가시기 위해 산본 중국어 학원에 최고령등록자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의 즐겨 다니신 곳은 둔터저수지 인근의 매운탕 집이었습니다. 햇볕좋은 날 오후 저수지가 보이는 평상에 지인들과 모여앉아 메기매운탕에 막걸리를 곁들인 '화려한' 파티를 벌이곤 하셨습니다. 사모님의 '윤허'를 받아 딱, 반잔만 드시면서도 무척 행복해하셨습니다.
성공회대 신방과에 발령을 받고 인사들 드리러 갔습니다. 별말씀은 없으셨고 떨리는 손으로 오랫동안 쓰시던 은장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직까지 선생님의 손때가 배어있는 그 만년필로 글을 써본 적은 없습니다. 지난 2009년 미디어법 파동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울 때는 불편하신 손으로 격려 전화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폭압적 파시즘 정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투정반보고만 이야기를 드립니다."이 사람아! 1960년대, 70년대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게나. 언제는 우리가 길이 있어서 갔는가, 불의와 싸우다보니 길이 하나 둘 생긴 것이지"
평북 운산에서 나서 삭주에서 성장하신 선생님의 선산이 남쪽에 있을 리 없습니다. 용인 쪽에 작은 터를 마련하시고 부모님을 모셨나 봅니다. 1993년 가을 무렵 선생님께서 용인에 벌초하러 가실 때 몇몇 친구들과 동행한 일이 있습니다. 일을 마친 후 착잡한 표정으로 이따금씩 북녘하늘 바라보시며, 조상님 무덤의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억새풀이며 잡목을 제거하는 일을 죄스러워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광주와 무관하면서도'광주소요 배후 조종자'가 되셨고, 1980년 5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으로 척추를 다치시는 등 평생 '가시관'을 쓰시고 사셨습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광주 국립 5.18묘지를 유택으로 정하신 뜻을 이제야 헤아려 봅니다. 선생님! 다 내려놓으셨으니, 민주화의 성지에서 편히 쉬세요. 이제 빛고을이 선생님의 고향이십니다. 사모님과 평화만들기, 죽향, 매운탕집, 수리산 동지들 손잡고 자주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김봉준 |
* 필자 최영묵은 한양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이수하며 리영희 선생님을 지근에서 모셨다. 현재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언론 현실에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하는 중견 언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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