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영결식 弔辭 전문 : 백낙청] 고 리영희 선생 영전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영결식 弔辭 전문 : 백낙청] 고 리영희 선생 영전에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리영희 선생님. 결국 이렇게 떠나십니까. 중풍으로 두 번씩이나 쓰러지고도 재기하셨고 간경화로 복수가 찬 상태로도 한참을 꿋꿋이 버티셨는데, 드디어 저희들과 인연을 마감하고 떠나시는군요.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황망하고 서럽습니다.

선생님은 겨레가 남의 종살이를 하던 시절에 태어나서 일제 말기의 험한 세월과 남북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로 이어지는 시대를 사셨습니다. 일단 민주화가 된 뒤에도 정의가 제대로 서지 못 하고 남북의 화해를 두려워하는 훼방꾼들이 선생님을 괴롭히기 일쑤였습니다. 한마디로 선생님의 시대는 의로운 인간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고, 시대와의 불화와 그에 따른 온갖 수난을 마다않은 분이 당신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감내하셔야 했던 거듭된 구속과 투옥과 해직의 이력을 여기서 굳이 나열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중년까지도 살림살이는 늘 쪼들렸고,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직위조차 당신께만은 안정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한 치의 타협 없이 올곧은 선비와 지식인의 길을 고집하셨으니 선생님 자신의 고난도 고난이려니와 식구들의 고생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떠나보내면서 그런 비통한 이야기만 하지는 않으렵니다. 선생님이 사신 세월이 비록 모질고 험난했으나 동시에 당신이 외치신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는 수많은 독자들과 당신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잇따라 나오는 감격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분단의 제약 속에서도 민주화를 달성하고 민간통일운동의 공간을 쟁취하는 한국 현대사의 일대 장관이 연출되었던 것입니다. 그 한가운데에 선생님이 계셨고 선생님의 고난이 보람을 찾았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은 고난의 행적과 서릿발 같은 바른말의 유산 외에 따뜻한 인간 리영희의 기억을 남기고 가십니다. 당신은 결코 맷집 좋은 투사가 아니었고, 우스개 잘하고 벗들과 놀기 좋아하며 다정다감하고 때로는 턱없이 천진한 자유인이었습니다. 단지 거짓과 속박과 폭력을 뼛속까지 싫어했고 거기에 눈 감고 입 다물지 못 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온갖 싸움에 시달리고 자유생활을 박탈당하기도 하셨습니다만, 싸움은 언제나 마지못한 싸움이요 빼앗긴 것은 누구 못지않게 즐길 줄 아는 생활이었기에 당신의 헌신이 더욱 값졌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목소리가 더욱 심금을 울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잘 모르는 선생님의 또다른 일면은, 이런 싸움과 즐김을 모두 여읜 종교의 세계로 깊숙이 찾아들려는 갈망을 늘상 품고 계셨던 점입니다. 민주화로 시대현실이 조금 덜 각박해지면서 당신께서는 불교계와 여러 인연을 쌓으셨고, 뇌출혈 이후 절필을 선언하시고는 종교적 성찰에 한층 골몰하셨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험난해진 현실은 선생님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아니, 현실만 탓할 게 아니라 우리 후진들의 책임도 반성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오래오래 살아 계시기만 해도, 병을 달래면서 의연하게 견디시기만 해도 우리 사회의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 되었으련만, 여전히 선생님이 앞장서서 세상을 꾸짖고 우리의 답답함을 달래주기를 바라는 후진들의 게으름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생님,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실제로 오늘의 현실은 선생님이 힘겹게 추구해 오신 길에서 너무나 엇나가고 있습니다. 병상에서도 파시즘의 복귀를 경고하고 나라가 다시 남의 식민지로 떨어질까 염려하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삶이 헛되지 않으셨기에, 못난 후학들이지만 저희 또한 당신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우리 사회는 백여 년 전과는 판다른 역량을 지녔고 파시즘을 그리워하는 무리가 적지 않아도 저들이 끝내 성공할 확률은 태무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히려 대명천지가 활짝 열릴 때를 앞두고 낮도깨비들이 활개 치는 마지막 굿판이 벌어진 형국입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너무나 큰 몫을 당신께서 해주셨고, 덕분에 밝은 세상 여는 일을 한결 수월케 해놓으신 것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이제야말로 온갖 시름과 애착을 다 여의시고 고이 잠드시옵소서.

2010년 12월 8일 불초 후학 백낙청 올립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