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전쟁위기 고조된 이때 리영희 선생님이 좀 더 계셨다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전쟁위기 고조된 이때 리영희 선생님이 좀 더 계셨다면"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진실을 추구한 참 언론인, 큰 언론인 리영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리영희 선생님이 별세했다. 리 선생은 언론의 정도를 온몸으로 실천한 언론인이셨다. 그는 혼탁한 세상에서 진리와 진실을 건져 올려 사자와 같은 목소리로 외치신 분이다. 그는 동시대 다수의 기회주의적 언론인, 지식인들이 외면하고 두려워 침묵하는 사실을 밝혀 세상에 알리는 고독하고 힘겨운 작업을 지속한 진정한 언론인의 상징이다.

▲ ⓒ프레시안
빈소의 리 선생님 영정 사진은 여전히 호랑이와 같은 강렬한 눈빛을 하고 계셨다. 리 선생이 편찮으시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듣고도 찾아가 뵙지 못한 것이 죄스러워 차마 눈빛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생전의 리 선생님은 범접하기 어려운 강직한 기를 온몸에서 뿜으시는 분이었다. 참 언론인의 길을 수많은 투옥과 해직의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걸으신 것은 후배 언론인들의 몸을 떨게 하는 강렬한 상징이 되고 있다. 리 선생님이 부당한 정치권력에 꿋꿋이 저항하면서 언론인의 기개를 굽히지 않고 생을 마감하신 것은 오늘의 혼탁한 언론 상황을 돌아볼 때 너무 안타깝다.

리 선생님이 80년 해직언론인 몇 명이 80년대 초 산행을 같이 하면서 들려준 소중한 말씀 일부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전두환 신군부의 탄압과 반정부 세력에 대한 사찰이 지독했던 80년 3월쯤으로 기억한다. 그때 합동통신(지금의 연합뉴스 전신) 해직기자들 몇 명이 리 선생님을 모시고 정릉 뒷산 산행을 했었다. 산 정상을 중간 쯤 올랐는데 비가 왔지만 큰 바위 밑에서 리 선생님에게서 당신의 기자 생활 등에 대한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꽤 쌀쌀한 날씨였지만 리 선생님과 우리들은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그 날 리 선생님께 들은 말씀 가운데 기억나는 것 두어 가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리 선생님이 통역장교로 근무할 때 미군 병사가 북한군 포로에게 정맥주사를 놓은 뒤 사살하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 투옥되었다. 그 때가 최초의 감옥살이였다.

- 리 선생님은 합동통신 기자로 정부 부처 출입 시 항상 관리보다 앞서 탐구하면서 관련 사실을 확인해 기사를 쓰셨다. 선생님은 외교 부처를 출입하면서 정책 입안을 할 움직임을 느낄 경우 정부 도서관에서 해당 도서를 빌려 참고했다. 그러면 담당 공무원이 그 책 반납을 좀 해줘야 자신들이 일을 할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정권에서 몇 번 정부로 들어와 일해보라는 회유가 몇 번 있었지만 다 거절했다.

리 선생님은 산행 다음날 시국사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으셨다.

그 날 산행에서 내려온 뒤 리 선생님은 정릉 부근의 정남기 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집에 가셔서 집에서 담가놓은 막걸리를 같이 마셨다. 리 선생님은 그 때 막걸리를 집에서 담가 먹는 것을 무척 부러워 하셨다고 지금도 정남기 전 이사장은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산행 등에 동행했던 김태홍 전 한국기자협회장은 지금 루게릭병으로 투병중이라 빈소를 찾을 수 없는 딱한 입장이다.

리 선생님은 <한겨레신문> 창간 후에 뵙고 말씀을 들을 기회가 많았지만 80년 초의 산행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리 선생님은 송건호 선생님과 참 언론인의 쌍벽을 이룬다. 두 분의 분위기는 다르지만 언론의 정도를 걸었다는 공통의 교훈을 남기셨다.

리 선생님이 많은 역저를 펴내시면서 시대를 깨우신 업적은 길이 빛을 발할 것이다. 리 선생님은 냉전시대의 비뚤어진 지성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올바로 세계와 한반도를 바라볼 수 있는 참다운 지식을 큰 목소리로 우리 사회에 전하시는 일을 계속하셨다. 그 가운데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핵무기에 관한 것이다. 리 선생님은 1983년에 <한반도는 강대국의 핵 볼모가 되려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우리 사회 반핵 평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미국의 핵무기가 다수 남한에 배치되어 있었고 핵사용을 전제로 한 팀스프리트 훈련이 매년 계속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냉전 논리에 찌든 언론들은 북한에 대해 핵공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사설 등을 통해 공공연히 주장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리 선생님이 핵 무기의 가공할 폭발력과 반인륜적인 살상력에 대해 경고했고 이후 종교계 등에서 활발한 반핵 평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80년 해직언론인 몇 명도 리 선생님의 반핵 논리에 자극 받아 1985년 '핵과 한반도'라는 제목의 책을 정동익 전 동아투위 위원장이 경영하던 아침 출판사를 통해 출간하기도 했다.

리 선생님이 가시면서 우리 사회의 한 곳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이 느껴진다.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가 전쟁 위기감이 고조될 만큼 어려운 상황이라서 더욱 그러하다. 리 선생님이 좀 더 계시면서 이명박 정권의 어처구니없는 대북 정책 등에 대해 참다운 말씀과 함께 우리 사회에 큰 교훈을 주실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 간절하다. 리 선생님이 광주 망월동에서 영면하시면서 민주화와 평화통일에 큰 힘을 주실 것을 굳게 믿으면서 거듭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