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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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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 언니

[한윤수의 '오랑캐꽃']<269>

말수 언니,
이제는 그리운 이름이다.

3년 4개월 전,
목사가 되고 나서 처음 한 일은 화성으로 탐색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은 도시.
하지만 아무 연고가 없으니 어디 가서 누구를 붙잡고 얘길 해보나?
고민하다가 화성시청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보건소에 외국인 담당 직원이 하나 있다. 이름이 전말수다.
나는 그 남자를 찾아 화성보건소가 위치한 발안으로 떠났다.
만나보니 웬 걸?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그녀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말을 할 줄 아는 간호사로, 담당 업무는 외국인 진료였다. 하지만 이 도시에 외국인을 도와주는 기관이 없다보니 진료 뿐 아니라 인생 상담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을 다 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하소연했다.
"보건소 찾아와 돈(체불 임금) 받아달라는데 죽겠어요."
"그래요? 돈 받는 건 내가 잘하는데."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와! 잘 됐네요. 돈 좀 받아주세요."

옳다, 됐다 하고 제안했다.
"우리 품앗이하죠."
"어떻게요?"
"보건소에 찾아오는 환자들 돈은 내가 받아줄 테니까, 나한테 찾아오는 노동자들 병은 보건소에서 고쳐주는 거죠."
"좋습니다!"

그 말대로 되었다.
노동자들 병은 그녀가 고쳐주고,
환자들 돈은 내가 받아주고.

보건소는 우리 센터에서 도보로 10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업무 협의차 서로 자주 왕래했다.
그녀는 봉사 마인드가 풍부한 사람이라 치료라는 본연의 업무 외에도 우리 센터를 물심 양면으로 도왔다. 내가 직원을 못 구해 쩔쩔맬 때 자원봉사자를 구해주고, 재정이 어려울 때 후원자를 연결해 주는 식으로.
더구나 붙임성이 좋아서 우리 직원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일부러 찾아와 점심도 사주고. 그녀의 나이가 한두 살이라도 위였으므로 직원들은 그녀를 '말수 언니'라고 불렀다.

화성보건소는 외국인 치료시스템이 잘 갖춰진 곳이다. 환자를 보건소에서 직접 치료하기보다는 수원이나 서울의 2차, 3차 진료기관에 보내 좀 더 나은 치료를 받게 해주고 일부 비용을 지원하는 형식이다. 이런 합리적인 방식 때문에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외국인 노동자가 돈 걱정 안하고 최신 의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합리적인 치료 시스템과 말수 언니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지난 3년 여 동안 병들거나 아픈 노동자가 찾아와도 나는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언니의 도움으로 수술한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달, 혹시 오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보건소에 혈압 약을 타러 가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데, 말수 언니가 다가왔다. 그녀는 내 옆에 가만히 앉더니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저 그만 둘 거예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와서는 안 될 일은 꼭 오는가?

7월 마지막 금요일,
송별 점심을 나누는 자리에서 내가 물었다.
"그만두는 이유 중에 정식 공무원이 안 된 것도 포함되나요?"
말수 언니는 유능하고 헌신적이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계약직으로만 일했었다.
"한때는 그랬었죠."
그녀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상황이 바뀌어도) 그만두는 데는 변함이 없어요."
지친 걸까?

말수 언니는 8월 첫 주까지 일하고 그만두었다.
애석하다.
나와 직원들도 상실감이 크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더 큰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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