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영(가명, 36세) 씨는 영남권의 한 지방지에 몸을 담은 지 5년이 갓 넘은 기자다. 난립하는 군소 지방지 중에서도 제법 판매부수를 유지하고 있는 매체지만 임 씨의 임금은 입사 초기에서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지방 경제의 침체와 맞물려 회사의 부채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까닭이다.
임 씨는 스스로를 "1년 후를 기약할 수 없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감시하는 파수꾼이라 할 수 있는 기자를 직업으로 선택한 긍지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버텨나가고 있지만, 기자라고 다른 이들이 겪는 생활고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그보다 앞서 입사한 '고참 기자'들도 임 씨처럼 고민하다 회사를 떠났다.
늦깎이 기자의 인생 역경
임 씨는 30살에 늦깎이 기자가 되기 전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여러 대학에 낙방하고 한 전문대의 호텔관광학과에 입학했다. 마지막 학기가 끝날 무렵 한 호텔에 취업할 기회가 있었지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 제안을 거절했다.
"사실 너무 어릴 때 내린 결정이어서 나중에 가끔씩 아쉬울 때도 있었죠. 당시 받기로 한 연봉이 1800~2000만 원이었는데 1990년대 중반에 그 정도 액수면 엄청난 거였죠. 하지만 지금은 원래 해보고 싶었던 언론 쪽에 몸담게 되어 후회는 없어요."
임 씨는 졸업 후 친구의 권유로 다시 수험공부를 시작해 지방 국립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바로 입대해 1998년에 재대, 98학번과 함께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후 기회가 다시는 없을 거란 생각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외국으로 나갔고 뉴질랜드와 일본에서 1년을 보냈다.
2003년 귀국한 임 씨는 전공을 살려 서울의 한 시사어학원 출판국에 입사했다. 광고부에서 광고 문구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첫 월급이 120만 원이었다. 고된 업무에 비해 부족한 월급으로 서울에서 생활을 꾸려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10개월을 '백수'로 보내다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의 일을 돕다가 2005년 초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 한 가족의 가장이 됐다는 부담이 생길 즈음 이 지역 신문사의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 기자가 됐다.
"서울에 있을 때도 학교 동기, 선후배들이 언론사에 입사하거나 외주제작사의 PD라도 되는 것을 보면서 약간 자존심이 상했어요. 광고업 역시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일이어서 더 힘들었죠."
▲ 권력 감시의 파수꾼이라는 자부심이 크지만 생활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에 전직을 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기자 역시 그들이 속한 매체에 따라 받는 임금 차가 크다. 공중파 방송사와 일부 중앙일간지를 제외하고 기자들의 임금 수준은 결코 높은 편이 아니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의 여파로 많은 언론사들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
"고객님은 700만 원까지 대출이 가능합니다"
임 씨는 현재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전세 7000만 원의 21평형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다. 은행 대신 부모님께 돈을 빌려 다행히 이자 부담은 없다. 부모님 집에서 한 칸에 네 식구가 살다가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다.
"대출 이자나 월세가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식의 살림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어요. 대출 자체도 힘들었죠. 어느 날 거래은행 출금기에서 돈을 뽑았는데 '고객님은 700만 원까지 대출 가능합니다'라고 뜨더라고요. 적은 월급에서 두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부담이 상당하죠. 저축 역시 꿈도 못 꾸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늘어날 비용은 정말 큰 부담이죠."
입사 6년차인 임 씨는 현재 기본급 86만 원에 가족수당 등 각종 수당을 더해 125만 원을 받는다. 소득세에 4대 보험료, 노조와 기자협회 회비를 제하면 손에 쥐는 돈은 110만 원 남짓이다. 입사 초기와 비교해 20만 원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기자직군에서 10년차까지 임금이 급격히 상승하는 경우는 일부 종합 일간지에만 해당할 뿐이다.
근무연속이 비슷한 동료들 중에는 미혼도 많지만 임 씨는 적지 않는 나이에 입사했고 아이까지 딸려 씀씀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6살인 첫째 아들은 지난달 유치원에 들어갔다. 35만5000원인 유치원비의 일부는 국가에서 보조한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여성가족부에서 지원금이 나왔지만 유치원비 보조는 교육부에서 맡고 있다. 아직 심사가 끝나지 않았지만 어린이집과 비슷한 15만 원 가량의 보조금을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유치원비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입학하고 2주이 지나자 교재비 명목으로 15만 원의 고지서가 날아왔다. 여윳돈 없이 빡빡하게 짜인 지출 계획은 고지서 한 장에 크게 흔들린다.
"더군다나 아이를 종일반에 맡기면 영어수업 같은 일종의 보충학습을 들어야 해요. 말로는 선택사항이라지만 종일반에서 아이 혼자 수업을 안 듣게 할 수는 없으니 실제로는 의무적으로 듣는 거나 마찬가지죠. 설사 생활보호대상자라도 종일반 보충수업엔 100% 지원금을 받지 못해요. 저 역시 10만 원 이상 더 나갈 각오를 해야 하죠."
아직 2살인 둘째 아들에게 들어가는 교육비는 없다. 첫째와 달리 모유를 먹여 키워서 분유 값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출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필수 예방접종은 보건소에서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받을 수 있지만 다른 예방접종의 경우 10만 원짜리 예방주사를 4번씩이나 맞아야 하는 것도 있다.
"생활수준으로 보면 그런 주사를 맞는 게 말도 안 되겠죠. 하지만 부모 마음이 그렇지 않잖아요. 게다가 예방접종을 과하게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게 그 주사는 외국에서 필수 예방접종으로 분류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아닌 거죠. 이것 말고도 아이는 아플 때마다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니 항상 예상치 못한 의료비를 생각하고 있어야 해요."
가스비 부담에 집 옮길 생각도
임 씨는 유난히 추웠던 지난해 겨울 큰 곤욕을 치렀다. 추위를 잘 타는 부인과 아이들을 위해 보일러를 자주 켤 수 밖에 없었는데, 한 달 가스비가 20만 원이 나왔다. 집이 고지대에 있어 도시가스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겨우내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서 잤어요. 돈을 생각하면 보일러 켜는 시간을 줄여야 하지만 부인이나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하는 건 마찬가지죠. 가스 요금 부담이 너무 심해 집을 옮겨보려고도 생각했어요. 다행히 지난달부터 도시가스가 연결돼 요금이 절반 수준으로 내려갔죠."
임 씨의 월급에서 아이들 교육비와 각종 공과금을 제하면 남는 돈은 70만 원 남짓. 여기서 보험료가 빠져나간다. 임 씨와 부인이 각각 11만 원과 9만 원, 아이들이 각각 3만 원씩이다. '투자'라고는 하지만 원금만 보장될 뿐 저축성 보험은 아니다. 아플 경우를 대비해 마련한 가족들의 유일한 대비책이다. 보험료를 뺀 나머지 40만 원이 한 달 생활비가 된다.
"말이 40만 원이지 사실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에요. 아이들은 평소에 과일도 많이 먹어야 하고, 주말이 되면 데리고 나들이도 한 번씩 가야죠. 저축은 꿈에도 못 꿔요."
아이들에 대한 지출은 임 씨에게 가장 큰 걱정이다. 첫째가 글을 깨치고 나니 집에 책을 살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아동용 전집 한 질에 50만 원씩 하는 걸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꼭 해줘야 한다는 부인과 몇 차례 언쟁도 벌였다.
"몇 번 싸우다가 어느 순간 비참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무슨 고액 과외도 아니고 책을 사는 문제에 이렇게 고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요. 인터넷서점에서 할인하고 있는 책들도 좀 살펴봤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아이들에게 질 낮은 책을 사주기도 뭣하고…."
임 씨는 지금 당장은 그럭저럭 버텨나가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낙관은 없다. 2년이 지나면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야하고 아이들 교육비는 갑절로 불어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학원에 보낼 여유는 없다. 회사의 임금 상승폭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액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영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사측을 상대로 임금 협상에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힘든 상황이다.
"몇몇 선배 기자들도 버티고 버티다 결국 회사를 떠나기 시작해요. 나중에 보면 별정직 공무원으로 가 있는 선배도 있더라고요. 공무원을 상대로 취재하다 공무원이 되고 싶겠어요. 다 생활 때문이죠. 기자가 천성인 선배들이 월급 때문에 그렇게 나간다는 게 참 착잡하죠."
지방지에 대한 고정관념 중 하나는 관언유착이다. 기사와 광고를 맞바꾸거나, 기자가 직접 광고영업을 해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본사의 영역이 닿지 않는 지역에서 주재기자의 영향력 또한 오랜 지적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실태가 지방지 기자의 생활고에 주목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임 씨의 생각은 단호하다.
"기자로서의 자존심도 있는 문제고, 모든 언론이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다니는 회사 역시 편집국과 광고국의 활동 영역이 구분되어 있어 기자가 '영업'을 하고 다니는 일은 없습니다. 윤리의식 여부를 떠나, 돈 때문에 서로 경쟁하다보면 문제가 커질 거니까요."
임 씨 역시 아이들이 좀 더 성장하고 가계의 압박이 심해지면 직장을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향에서 나오는 신문을 만드는 보람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길 즈음이 되면 부인이 직장을 얻어서 추가적인 비용을 부담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힘든 삶이지만 지방에서 꾸려나가는 삶에도 조금씩 행복을 느낀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동기나 친구들도 다들 고향으로 내려오고 싶어 해요. 저 역시 서울에서 직장을 잠깐 다닐 때 적응이 잘 안되더라고요. 출근길에 종점에서 출발한 지하철은 금새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리고, 수시로 연착하고, 그렇게 길 위에서 낭비하는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죠. 지방이 살기엔 더 좋고 사람 사는 맛도 나지만 경기가 너무 침체돼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죠."
서울의 비싼 주거비용, 교통의 혼잡함과 물가 등으로 인한 비용을 고려하면 지방에서의 소득은 실제보다 100만 원 정도 더 받는 셈이라고 임 씨는 설명한다. 하지만 서울과 지방의 일자리의 질은 그 이상으로 격차가 벌어진 것 또한 현실이다.
지방지, 영세성 못 벗고 예산 삭감까지 미디어 산업의 위기론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특히 신문의 경우 1990년대 70%에 육박하던 구독률이 지난해 40% 미만으로 하락하면서 다른 매체보다 더 빠른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 지방지는 1990년 대 이후 지역 내에서 늘어난 군소 신문들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중의 문제를 안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의 타격을 정면으로 받은 것 역시 지방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2009년 지역일간지 종사자 수는 2008년보다 약 23%가 줄어든 5506명이었다. 지방지보다 재정구조가 탄탄한 전국일간지나 경제지는 종사자수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늘어난 것과 비교된다. 지방지와 마찬가지로 영세 매체가 대다수인 인터넷신문 역시 2009년 종사자수는 1년 전보다 약 35% 줄어든 2930명을 기록했다. 기자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노사 갈등도 심화되었다. 지난해부터 <인천일보>, <충청투데이>, <경남일보> 등에서 노사협상이 파행을 겪었고 <충청투데이>의 경우 결국 기자 22명이 일괄 사직서를 내는 결과를 낳았다. 민영 통신사인 <뉴시스>의 경우 지난해 4월 임단협 조정안을 놓고 제작거부에 들어가기도 했다. 일부 종합일간지마저 임금을 삭감했고 종합순위 10위권 이내의 한 인터넷 매체는 휴간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부는 올해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난해 151억 원에서 38억을 삭감한 113억 원을 책정해 언론사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지원 대상을 확대해 지역신문의 난립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언론 장악' 논란이 첨예한 시점에서 지방지들이 갈 길은 멀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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