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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조약 비준과 한국음료 노동자들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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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ILO 조약 비준과 한국음료 노동자들의 투쟁

[기고] 촛불 이후에도 여전한 망언의 시대

바야흐로 망언의 시대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등의 망언으로 토착왜구라는 비난을 받던 야당 원내대표는, 여론의 포화를 맞자 뜬금없이 정체불명의 '반문특위'를 운운하며 어처구니 없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국민들의 국어실력을 탓한다.

이 당의 망언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전신 새누리당을 거쳐 최소한 1980년 민정당까지만 올라가도, 혹세무민 조삼모사 이장폐천의 망언 궤변 왜곡선동을 전부 열거하자면 27권짜리 백과사전이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망언은 어떤가?

어떤 고아가 있다고 하자. 조실부모하는 바람에 친척 어른이 고아에 대한 후견권을 주장하며 이 고아의 집을 강제로 빼앗아 안방을 차지하고, 정작 고아는 문간방에서 곁방살이를 하며 온갖 구박과 설움 속에 머슴 노릇을 하며 컸다고 하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공권력도 이 친척 어른의 편이기에 어린 고아는 속절없이 이 횡포와 불의를 견뎌야만 했지만, 세월이 흘러 청년으로 성장해 이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게 됐다고 하자.

그런데 재판에서 그 친척이 '그 대신 내가 보는 손해를 조카가 금전으로 보상하면 집을 돌려주겠다'고 주장한다면?

나아가, 이런 어처구니 없고 파렴치한 망언, 궤변을 판사가 받아들여 청년에게 합의하라고 압박하고, 항의하는 청년에게 자기 욕심만 부린다고 오히려 비난한다면..?

우화 속의 가정이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 조약 비준을 놓고 이 정부가 하는 처신이 지금 딱 그 짝이다.

이 정부가 적폐청산과 개혁에 대해 의지나 능력도 없다는 건 이제 새삼스럽지 않은 얘기지만, 최소한 한반도 문제에서는 그래도 대통령의 진정성에 기대어(기대에는 못 미쳐도 그나마)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는 받는다.

마찬가지로 최소한 이전 정권에서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거부해온 ILO 조약 비준에 대해, 인권 노동 변호사였던 대통령이 이 정도는 바로 추진하리라는 기대를 걸었건만, 공약으로까지 내걸어놓고는 차일피일 미룬 채로 집권 3년차를 맞고 있다.

대선 당시 내걸었던 공약 중 안 지켜지는 게 하나둘이 아닌지라 '공약이니 지켜라'고 하기조차 민망한 상황이지만, ILO 조약을 둘러싼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이전 적폐정권들과 아무런 차별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

입으로는 노동자 친화적 정부라고 선전하면서도 정작 철저하게 기업 친화적으로 노동문제에 접근하는 이 정권의 한계가 단순히 인식의 불철저함과 능력 부족에 기인한 건지, 뼛속까지 실제로 자본친화적인 모피아 관료들에게 속절없이 휘둘리고 있는 탓인지도 별도로 꼭 확인해봐야 할 문제겠지만,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정부는 마치 ILO 조약을 하나 통과시키면, 그만큼 역으로 자본가들에게도 뭔가 선물(?)을 줘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희한한 망상에 빠져 있는 게 아닌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마치 구한말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우리나라에까지 쳐들어와서 문화재를 약탈해갔다가, 이제 돌려달라고 당연한 요구를 하니 돌아온다는 말이 ‘돌려줄 수는 없고, 상응한 가치를 지닌 유물을 새로 빌려주면 일시적으로 교환해서 빌려주겠다’고 우겨대는 제국주의의 여전히 후안무치한 민낯을 보는 듯하다.

영국 프랑스 등 구 식민종주국들은 자신들이 당사자라 그렇다고 한다면, 당사자도 아닌 정부가 나서서 노동자의 기본권보다 기업가들이 잃게 될 부당한 기득권을 더 걱정해주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말난 김에, 최근 노사문제에서 자본권력이 내놓는 억지는 마치 무슨 산업혁명 초기의 야만적 원시자본주의 시대로 타임슬립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게 만든다.

촛불 정부라니까 잠시 눈치 보고 엎드렸던 자본권력이 외려 박근혜 정부 때도 언급 못 하던 주장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이 정권의 실체를 가장 먼저, 속속들이 파악한 때문이다.

최저임금 논쟁에서 아예 휴식시간, 휴일에는 무노동무임금으로 임금을 주지 말자는 적나라한 속셈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내놓아 할말을 잃게 만들더니, 당연한 기본권적 권리이자 국제 기준인 ILO 조약 비준으로 자기들이 누리던 비정상적 기득권, 노동자들에 대한 전근대적 착취와 수탈을 못 누리게 되는 보상을 내놓으란다.

여기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이 정부는 도대체 무슨 철학, 능력, 비전을 갖고 있는 건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물론 답은 안 하겠지만, 답을 안 하면 국민들이 그 답을 모를 것이라고 믿는 걸까.

국제 기준인 ILO 조약이 박물관 수장고 속에 잠자는 동안 이 땅의 노동자들이 당해온 피해와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조차 없다. 구체적 사례를 보자.

촛불로 정권이 바뀐 이후, 그래도 노동계에서는 보통 10년이 훌쩍 넘는 오랜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하나씩 승리의 소식이 들려왔다.

KTX 여승무원 노조, 쌍용자동차, 파인텍(스타플렉스)에 이어 장투사업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을 둘러싼 투쟁까지..


누구는 이게 다 정권이 바뀐 덕분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대통령에게 감사하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정권이 바뀐 영향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업장은 그야말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참담한 죽음까지 포함한 피눈물 나는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투쟁 끝에 마침내 작은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대통령의 시혜가 아니라 촛불로 그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게 만드는 데 앞장선 것도 거리의 민중과 노동자들이고, 거저 앉아서 시혜를 받아먹은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제대로 된 정권, 사회였다면 그런 싸움까지 내몰릴 이유가 없었던 고공농성, 무기한 단식, 한여름 염천 또는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길바닥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기어가는 오체투지. 그 외에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희생과 헌신으로 얻어낸 소중하고 값진 성과인 것이다.


싸움 하나를 끝낼 때마다, 승리의 기쁨보다는 마치 빼앗겼던 고지들을 지난한 백병전을 거쳐 동료의 죽음을 딛고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하나씩 되찾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바로 어제(2일)도 반가운 승리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 역시 이 사회의 상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ILO 기본 조약이 비준되고 그에 따라 법 제도가 정비되었다면 애초에 할 필요도 없는 소모적 싸움이었다.

보신 분들, 알고 계신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벚꽃축제로 인파가 넘쳐 흐르는 여의도 북단, LG그룹 본사 앞에 웅장한 쌍둥이 빌딩(트윈타워)의 위용에는 어울리지 않는 천막 하나가 몇 달을 지키고 있었다. 코카콜라를 생산하는 남원 ㈜한국음료 노동자들이 반 년째 계속되는 파업에도 모기업인 LG생활건강이 무성의한 대응으로 일관하자, 급기야 상경해 노숙 농성을 불사하던 끝에 30일 가까이 단식 농성까지 벌여온 거점이었다.

30일이면 아무리 효소를 섭취한다고 해도 건강은 물론 생명도 위험한 수준인데, 언제부턴가 노동자들은 기본이 무기한 단식이고 2~30일 정도로는 사회(언론)도 정부도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 최근 며칠 사이에 단식 농성하던 조합원 중 두 사람이나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급히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했다.

(주)한국음료는 (주)코카콜라 자회사로서, 흔히 알려진 코카콜라 외에도 토레타, 씨그램, 미닛메이드, 조지아 커피 등 코카콜라 브랜드 음료수를 생산하는 사업장이다. 한국음료는 지난 2010년 코카콜라에 인수되었으며, 코카콜라는 LG생활건강의 자회사로서 즉 한국음료의 모든 업무와 관련한 결정이 LG생활건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수 시 약속과는 달리 인수한 지 9년이 다 되도록 근로조건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입사 3~4년차 노동자들의 급여가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에 그치는 등 같은 LG그룹 소속의 다른 사업장에 비해서도 거의 절반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결국 지난해 4월 노동조합을 결성해 권리를 찾으려 했지만, 회사는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공장 곳곳에 노동자 숫자보다 몇 배나 많은 CCTV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 탄압에만 열을 올렸다.

한진 조양호, 조선일보 방씨 일가 등 수많은 재벌, 자본가들이 악덕기업을 넘어 가정사에서까지 추악한 갑질 폭력으로 지탄을 받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LG는 오너 일가가 상대적으로 점잖고 교양 있다는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알려져 왔고, 그룹 이념도 '정도(正道)경영'을 내세우고 있다. 최근에는 전국 초중고교 교실마다 공기청정기를 지원한다는 발표로 세간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LG의 정도경영은 대외적인 이미지 조작일 뿐, 뒤로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들의 기본권조차 무시하고 탄압하는 두 얼굴의 모습은 여느 다른 대기업 재벌들과 아무런 차별성을 찾을 수가 없다.

이미 지난해에도 LG 유플러스 소속의(형식적으로는 하청 파견기업 소속이지만) 비정규직 설치기사들이 살인적 노동환경과 열악한 대우에 항의해 전면파업에 들어간 전례가 있고, 당시에도 LG는 인간 존중의 '정도경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대체노동력 투입과 해고 위협 등으로 일관하다가 노동자들이 고공 철탑에 올라가는 등 극한적인 투쟁 끝에, 결국 여론의 지탄을 받은 LG 측이 정규직화에 합의한 바 있다.

LG의 두 얼굴은 이처럼 앞으로는 거액을 쏟아부은 이미지 마케팅으로 국민들을 현혹하면서, '노조할 권리'라는 최소한의 요구에 목숨까지 내건 단식투쟁마저 내몰라라로 일관해오더니, 마침내 시민사회에서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기자회견이 언론에 소개되고, 분노한 시민들의 성의가 모아져 일간지 1면에 규탄광고가 나고서야 비로소 부랴부랴 교섭에 나서 노조가 요구하는 조합 사무실과 타임오프 600시간을 제공하겠다고 합의한 것이다.

생각하면 조합 사무실과 타임오프는 이제 노조가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일 뿐이고, 구체적인 노동조건 개선 등 앞으로의 과제는 하나도 합의된 것이 없다.


조합원 본인들 말을 빌려 촌구석의 순박했던 노동자들이 서울 한복판에 두 차례나 집단 상경해 여의도 노상에서 몇 달을 노숙 농성을 하며 급기야는 30일 가까운 단식 끝에 급격한 건강 악화로 두 사람이나 응급실로 실려가는 기가 막힌 투쟁 끝에, 임금인상 100%를 얻어낸 것도 아니고 대단한 성과도 아닌, 법에 보장된 노조할 권리 하나를 회사 측으로부터 동의받은 것이다.

그야말로 작은 시작에 불과한 이 승리조차도 이토록 노동자들의 진을 빼고서야 간신히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즉 21세기 촛불정부 시대의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자본 측이 이 법에 정해진 권리를 당연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선심 쓰듯이 동의해주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발상은, 전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발상이 되어버린 상식 파괴, 가치 전도의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외침과 함께 자신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 이후 50년이 지나도록 세상은 근본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다.

노동자들은 왜 가장 기본적인 노동권인 노조 할 권리조차 목숨을 걸고 요구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하면서도, 그 민낯을 한 꺼풀 벗겨보면 내용적으로는 전혀 민주주의의 내실을 채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식에서 헌법상 기본권인 노동권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을 두고, 한쪽에서는 이런 비정상을 하루 속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ILO 조약 즉시 비준을 외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이런 비정상이 상식인 현실에서 ILO 비준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비상식이 상식인 세상에서는 상식을 말하는 자체가 비상식이라는 것이고, ILO 조약 비준은 상식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는 궤변이 버젓이 행세하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고 썼다.


촛불 이후에도, 대통령은 바뀌었을망정 망언과 궤변의 시대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코카콜라를 만드는 한국음료는 LG생활건강이 지분 90%를 가진 회사다. 이 회사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한 지 128일, 단식을 한 지 28일만에 노사합의에 도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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