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여의도통신>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는 질문을 던지며 2주 동안 17대 국회의원 29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백범 김구가 79명으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반면, 현실 정치에서 그를 이긴 라이벌 이승만은 단 한 명의 의원으로부터도 선택받지 못했다. 2위는 이순신(31명), 3위는 정약용(16명), 4위는 세종대왕(10명), 그리고 아버지(8명), 링컨(7명), 간디(6명)의 순으로 나타났다. 전직 대통령 중에서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각각 3표를 받았는데, 박근혜 의원이 답변한 '부모님'까지 포함시킬 경우 박정희는 4명의 선택을 받은 셈이 된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을 꼽아 달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시민 대다수는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을 꼽을 것이다. 569년 전 오늘인 1450년 3월 30일은 세종대왕이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음력 2월 17일).
2009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 동상이 광화문광장에 세워졌다. 동상의 얼굴과 의복은 표준영정과 이성계 어진, 1만원권 지폐의 모습 등을 참고했다고 한다. 왼손의 책은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세종대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한글, 곧 훈민정음이라는 점이 반영된 것이다.
세종어제(世宗御製) 서문(序文)과 한글의 제작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訓民正音)』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록되었다. 독일의 언어학자 하스펠마트(Martin Haspelmath)는 한글날인 10월 9일을 '세계 언어학의 날'로 기념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첫 만남: 지폐와 교과서 속의 세종대왕과 노회찬
지금 중년층의 경우 세종대왕이 누군지 잘 몰랐을 어린 시절 그를 만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지폐에 그려진 그의 얼굴을 통해서. 초등(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린 시절의 노회찬도 아마 세종대왕과의 첫 만남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나라의 지폐인 천원권부터 오만원권에는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역사적 인물들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천원권에는 퇴계 이황, 오천원권에는 율곡 이이, 만원권에는 세종대왕, 오만원권에는 신사임당. 최장수 모델인 세종대왕이 화폐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8월 15일, 당시 최고액의 화폐였던 1000환권이었다.
이후 1961년 4월 19일 500환권, 1965년 8월 14일 100원권, 1973년 6월 12일·1979년 6월 15일·1983년 10월 8일·1994년 1월 20일·2000년의 만원권과 현재의 만원권(2007년 1월 22일)에 세종대왕이 등장한다.
표준영정(국가가 공인한 선현의 초상화)에 기초한 1만원권 지폐 및 광화문광장 동상과 관련해 '친일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은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화가 운보 김기창(1913-2001)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초상화가 한 점도 남겨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역사학자들의 의견과 기록, 그리고 자신의 상상을 통해 그린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세종대왕 표준영정을 그린 운보 김기창 화백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로,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동상이나 화폐 도안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문제 제기가 있어왔다. 또한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얼굴이 많이 닮았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표현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제일 좋아하던 책이 사실은 교과서였거든요."
교과서를 가장 좋아했다는 어린 시절의 노회찬. 그는 교과서 속의 한글을 통해 자연스럽게 세종대왕과 만난다.
해방 후 첫 한글 교과서는 미 군정청 학무국과 조선어학회에 의해 편찬된 <한글 첫 걸음>(1945)으로 가로쓰기로 판을 짰다는 특징을 지녔다. 본문 용지는 갱지였고, 판크기는 5×7판, 분량은 50쪽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만들어진 최초의 초등 국정 교과서는 <바둑이와 철수>다. '어린이의 말하기를 사회화하기 위하여 자연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편찬된 이 책은 '철수, 영이, 바둑이'라는 주인공들의 일상을 보여 주는 이야기 형식을 통해 글자나 단어가 아닌 문장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 참고로 10월 5일은 '교과서의 날'이다. 1948년 10월 5일 정부 수립 후 최초로 학교교육에 사용할 교과서 '초등국어 1-1'을 발행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철수야 놀자 영이(이후에 영희)야 놀자"로 알려진 이른바 <바둑이와 철수>본이다.
그런데 교과서에 등장하던 반가운 이름 '철수'와 '영희'는 처음부터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교과서에 처음 등장할 땐 '철수'와 '영이'였고, 친구 사이가 아닌 남매 사이였다.
10월 9일 '한글날'과 노회찬
한글날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국경일이다. 한글날은 훈민정음 곧 오늘의 한글을 창제해서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이다. 1926년에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로 지정된 '가갸날'이 그 시초이며 1928년 '한글날'로 개칭되었다. 한글날을 양력 10월 9일로 확정한 것은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였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 서문의 "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 十一年 九月 上澣)"에 정인지가 썼다는 기록이 그 근거가 됐다.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되기 때문이다.
※ 북한에서는 1월 15일을 '조선글날'이란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다. 한글을 만든 시기와 반포한 시기가 다르기 때문인데 우리의 한글날은 반포한 날, 북한의 조선글날은 글을 만든 창제일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북한의 경우 1961년까지는 1월 9일을 조선글날으로 지켜오다가, 1963년부터 지금의 1월 15일로 변경했다.
한글날은 1949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정 당시 공휴일로 지정됐다가 1990년에 들어서면서 2012년까지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노는 날이 많아서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한글날을 '국군의 날'과 함께 제외한 것이다. 이후 각계각층에서 한글 창제의 중요성을 점차 인정받으면서, 그리고 적절한 휴식과 여가는 오히려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내수 진작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가 힘을 얻으면서, 2012년 11월 1일 국회에서 '한글날 공휴일 지정 촉구 결의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채택(재석 197명, 찬성 189명)되었고, 12월 24일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되었다. 연말에 통과됐기 때문에, 대다수의 2013년 달력에는 10월 9일이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2012년 11월 7일 노회찬은 트위터에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 기념으로 한글 넥타이 매고 나왔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곤 한글넥타이를 매고 나온 이유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한글일 공휴일 지정을 반대한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고 밝힌다.
11월 1일 경총은 국회 본회의에서 한글날 공휴일 지정촉구 결의안이 통과되자 행정안전부에 "한글날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경영계도 충분히 공감하지만, 일을 쉬어야 한다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의견서를 전달한 바 있다.
노회찬의 한글 사랑, '한글 국회'를 만들다
노회찬의 한글 사랑은 의정활동을 통해 빛을 발한다. 2004년 국회 입성 이전에도 그의 한글 사랑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기사가 하나 있다. 1998년 5월 1일 동아일보 <독자의 편지>에 '노회찬(서울 강서구 등촌3동)으로 '올픽림대로'라고 잘못 쓴 표지판을 '올림픽대로'로 바로 잡는 짧은 현장 고발 글과 사진을 실은 것이다.
노회찬의 한글 사랑은 2004년 그가 국회에 처음 입성하던 때로 되돌아가 확인할 수 있다. 초선의원 노회찬은 여의도에 입성하자마자 국회의원 배지가 한글화될 때까지 착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17대 국회 개원 이후 국회의원 배지가 한자 '國(국)'자가 들어있다는 이유로 착용을 하지 않았던 노회찬은 2004년 6월 30일 한글문화연대와 한글사랑 대학생 동아리 학생들로부터 한글로 '국회'라고 쓴 배지 100개를 전달받아, 등원 한 달만에 처음으로 배지를 단다.
국회의원 선서문, 한글로
개원 첫날의 첫 서명을 하는 문서가 국어기본법의 정신을 위배하지 않는 문서이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의식으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선서가 모든 국민이 읽을 수 있는 자랑스런 우리 민족의 한글로 쓰여지길 간절히 기대한다.
19대 국회 개원일인 2012년 7월 2일 노회찬은 국회의원 선서문의 절반가량이 한자로 돼 있다고 지적하며 국회 개원식 선서문의 전면 한글화 시정을 요구한다. 9일 뒤인 7월 11일 노회찬의 트위터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자투성이 국회의원 선서문을 한글로 바꿔 달라는 저의 요청을 국회가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의원 선서하는 서기호 의원이 한글로 선서하는 최초의 의원이 되었습니다." "국회의원 선서문이 이제 한글로 바뀌었기 때문에 내용을 몰라 (선서를) 못 지켰다는 변명은 통할 수 없다."
7월 11일 오후 2시 본회의. 서기호 의원은 앞서 사임한 윤금순 의원으로부터 의원직을 승계받아 본회의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한글로 된 선서문을 낭독한다.
'국회의원 선서문' 한글화에 이어 2012년 7월 19일 노회찬은 '한글 국회 만들기 2탄'으로 국회기와 의원배지의 한글화를 추진한다. 국회기와 국회의원 배지에 적힌 한자 '國'자를 한글화하기 위해 「국회기 및 국회배지 등에 관한 규칙개정안」을 마련한 것이다.
노회찬은 "한글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문자"라며 "국어인 한글에 대한 존중과 국어기본법의 취지를 반영해 국회기와 국회의원 배지 등의 한글화를 추진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미 한글로 '정부'와 '법원'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정부 및 법원 기구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한다.
2012년 10월 6일 한글단체인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공동대표 김경희 박문희 이대로 허홍구)이 노회찬과 소설가 이외수, 출판사 <황소와 걸음> 등을 우리말을 가꾸고 빛내는 데 힘써 온 '우리말 사랑꾼'으로 발표했다. 으뜸 사랑꾼으로 뽑힌 노회찬에 대해 단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분은 평소에도 우리 말글을 남달리 사랑하고 잘 못쓰는 것을 걱정하는 정치인입니다. 17대 국회 때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 데도 앞장을 서고, 일본 말투로 된 법률 문장을 쉬운 우리 말글로 바꾸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그런데 19대 국회가 등원하자마자 국회의원 선서가 한자혼용으로 된 것을 바로잡아서 앞으로 한글로 쓰게 되었습니다.
이 일에는 강창희 국회의장께서 협조해서 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회 휘장과 깃발, 보람(배지)에 쓰인 國(국)자를 한글로 쓰자는 법안을 냈습니다. 입법부인 국회가 행정부인 정부나 사법부인 법원보다 우리 말글을 업신여긴다는 국민의 소리를 다시 듣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분이라 으뜸 지킴이로 뽑았습니다."
2014년 10월 9일 568돌 한글날을 맞아 노회찬은 한글학회로부터 '한글나라 큰별'로 선정된다. 한글학회(회장 김종택)는 "의원님께서는 평소 우리 말글문화 정립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오셨고 우리글이 잘 못 쓰여지는 것을 걱정하는 정치인이다. 특히 19대 국회의원이 되어서 국회의원 배지와 휘장을 한글로 바꾸는 데 온 힘을 다해 앞장서 오셨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년 뒤인 2015년 10월 9일 노회찬의 트위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한다는 국어기본법의 정신에 따라 국회의원 명패도 한글로 써야 한다. 집권당 당대표를 위시해서 한자표기를 고집하는 분들은 선거구를 중국으로 옮기든가 명패를 한글로 바꾸든가 선택을 해야 한다. 국경일 한글날 아침에 권한다.
※ 참고로 '한글국회 만들기'를 위한 노회찬의 노력 과정을 일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2004.05.30 국회배지 한글화될 때까지 의원배지 착용하지 않겠다고 선언
- 2004.06.30 한글문화연대 한글배지 만들어 노회찬 의원에게 전달
- 2004.07.01 국회의원에게 한글배지 배부하며 한글국회 운동 전개
- 2004.07.15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안' 공동발의
- 2005.06.21 '한글문화세계화를 위한 의원 모임' 활동
- 2005.12.08 한글날 국경일 지정 법안 통과
- 2006.01.19 '한글을 빛낸 큰별' 선정
- 2012.07.02 한자로 된 '국회의원 선서문' 한글화 요청 공개서한 국회의장에게 전달
- 2012.07.11 '국회의원 선서문' 전면 한글화 시행. 헌정 사상 첫 한글로 된 선서문 정의당 서기호 의원 낭독
- 2012.07.30 한글관련단체 주요 대표자와 국회의장과의 간담회 진행(국회기 등 전면적인 한글화추진 청원서 전달)
- 2012.08.03 '국회기 및 국회배지 등에 관한 규칙 일부개정 규칙안' 대표 발의
- 2012.09.23 한글날 공휴일로 재지정
- 2012.10.09 한글날 기념 제10회 전국문해한마당축제 '늦깎이 청춘들'의 글쓰기 대회 및 시화전 개최(국회의원 동산)
- 2012.10.9 '우리말 으뜸 사랑꾼' 선정
- 2014.05.02 국회기, 국회배지 등 한글화 일부개정규칙안 국회본회의 통과
- 2014.10.09. 한글학회, '한글나라 큰별' 선정
2017년 9월 2일에는 트위터에 이런 글과 함께 이맹연 할아버지의 작품을 올리며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나라에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성인이 264만명이라 합니다. 이분들 중 용기를 내어 뒤늦게나마 한글을 깨친 분들의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그 중 할아버지 한 분이 쓴 시를 읽고 목이 메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속의 세종과 노회찬
2006년 노회찬은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위원으로 활동한다. 사실 노회찬과 <조선왕조실록>의 인연은 꽤 깊다. 말솜씨만큼이나 글솜씨도 뛰어난 노회찬이 인민노련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할 때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어, 그래"하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 99편의 이야기를 골라 1997년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으로 펴낸다. 노회찬이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한 후 책을 찾은 이들이 많아지자 오랜 친구인 일빛출판사 이성우 대표의 권유 속에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일빛, 2004)으로 재출간된다. 첫판의 제목이 '어, 그래?'인 까닭은 상식을 뒤엎는 조선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담았기 때문이다.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는 출간 3주만에 인문과학 베스트셀러 순위 4위에 올랐으며(경향신문 1997년 2월 28일) 당시 3만 부나 팔려 나갔다.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미시적인 것들을 좋아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자그마한 삶의 이야기들을 모아본 거죠. 책이 잘 팔리자 출판사 사장하고 2부를 쓰겠다고 약속했는데 민주노동당을 만들면서 그 약속을 못 지켰어요. 제가 국회의원이 된 뒤 그 책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해서 개정판을 내게 된 겁니다. (<여성동아> 489호, 2004년 9월)
"노동운동, 진보정치 운동을 하면 당연히 적자 인생이다. 그 전에 빚을 정리해보니 한 2000만원 되더라. 2004년엔가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이란 책을 냈는데 운좋게 많이 팔렸다. 빚 싹 다 갚았다." 그는 지금(물론 빚이 있다. 구체적인 액수는 기자들 말로 '오프 더 레코드'라고 했다)도 모 출판사와 책 내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귀띔했다(경향신문, 2008년 4월 26일).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백72년 동안의 기록으로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회찬은 실록이 보여주고 있는 역사정신에 대해 연산군의 예를 들면서 "누구도 역사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엄정하고 투명한 역사기록의 정신 앞에서는 그 어떤 권력도 힘을 잃었다"는 말로 정리한다.
방송에서 공개된 노회찬의 4학년 일기장에는 "학교에 다녀온 누나가 활짝 핀 민들레처럼 방글방글 웃으며 방안에 들어왔다, 4월에 경주 수학여행을 간다고 기뻐하며 말했다"며 "1년이 하루처럼 빨리 지나 갔으면"하는 바람이 적혀 있었다.
"저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고 있을 뿐"
조국: 이 사건(삼성X파일 사건)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는 아마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저는 법학교수니까 법리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호 기자 등 제가 참고인으로 출석한 재판에서 패소했습니다. 노회찬 대변인 건에서도 전합판결(전의 판례를 뒤집고 판결이 남)에는 다수의 논쟁이 있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지금은 국정원이라 하는 안기부와 삼성, 중앙일보가 불법으로 공모하여 대선에 개입을 했습니다. 이를 법원에서는 공소시효 등의 이유를 들어 불기소 처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폭로한 노회찬 대변인은 처벌 판결을 내렸습니다. 명백한 법률적 부조리입니다. 이 사건은 마지막까지 법리적으로도 싸워야 하는 판결입니다.
최광기 - 노대표님께서는 어쩜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셨어요? 대표님이 걸어오신 길이 일관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회찬 - 저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45년 전 4학년 11반 저의 담임선생님인 도경자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저기 나와 계십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일어서자 청중이 박수로 화답했다.
노회찬 -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싸우라고 가르치셨지, 봐서 어려울 것 같으면 싸우지 말고...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 아직까지도 법조계에 종사하고 있습니다(좌중웃음).
2012년 1월 10일 노회찬은 트위터에 한 장의 사진이 올리며 이렇게 적고 있다.
부산 초량초등학교 6학년 때 사진입니다. 입학시험 치고 중학교 진학한 마지막 세대이죠.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초등학교 때 저를 가르치셨던 여섯 분의 선생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두 분은 찾았습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세종의 즉위교서 중 한 구절로, 사랑하는 백성들이 굶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백성들이 모두 생업에 종사하며 삶을 즐거워하는 생생지락(生生之樂)을 꿈꿨다. 이 백성 가운데는 여성들도 포함된다. 물론 세종을 성평등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민고소금지법'(지방 수령의 전횡을 백성이 고소할 수 없게 만든 법)이 보여주는 유교적 가부장 사회와 남존여비 풍토라는 시대적 구속성, 조선시대의 임금이라는 존재적 구속성이 있었음에도 세종은 나름 여성의 권익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하나는 한글 창제이다. 대표적인 한글 예찬론자 중 한 명인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로버트 램지(Robert Ramsey) 교수는 한글 창제의 목적과 관련해, "문자 해독 능력이 기득권층인 양반에 위협이 될 수 있음에도 일반 평민은 물론 가장 권익이 낮았던 여성들까지 600년 전에 글을 읽게 하려 했다는 점에 한글 창제의 보편적인 의미가 있고, 인간 지성의 두드러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 이와 관련해 다른 의견도 있다. 심용환의 <단박에 조선사>(위즈덤하우스, 2018)는 세종대왕이 까막눈인 백성들을 위해서 양반들의 반대와 방해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한 것은 아니며, "'남성-양반-관료'가 주도하며 '하급 관료-일반 백성-여성'이 이를 따르는 구조처럼 한자의 '보완재'로 한글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돼요."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의녀 제도의 지방 확대다. 봉건주의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거의 무에 가까웠다.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는 일에 여성이 종사하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다만 사람의 몸을 돌보는 의사와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역할을 맡는 여성이 일부 있었는데, 이는 그 직업의 특수한 필요에 따른 것으로 아주 드문 일이었다. 조선 시대에 여자 의사는 '의녀'라 불렀고, 여자 형사는 '다모'라 불렀다(노회찬,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일빛, 2004, 43쪽).
세종은 여성의 질병을 진료하기 위해 '의녀 제도'를 지방으로 확대 실시한다. '의녀'란 조선 시대에 여성의 질병을 진료하기 위해 두었던 여성 의원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자기 집안사람이 아니면 남녀가 함부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부녀자들은 병에 걸려도 남자 의원에게 치료받지 않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를 딱하게 여긴 세종은 각 지방마다 관청의 노비 중에서 의녀를 뽑아 제생원(조선 시대 의료기관)에서 기본 의술을 가르친 뒤 부녀자들을 치료하게 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호주제 폐지', '성평등'과 '차별 금지'에 앞장 선 노회찬
2005년 3월 2일 민법 개정안의 8차 국회 본회의 통과와 3월 31일 법률 제7427호의 공포 과정을 거쳐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2004년 노회찬이 국회의원이 된 후 처음 발의해 통과시킨 법안은 '민법개정법률안'이었다. 2004년 9월에 발의해 2005년 3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 개정안은,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하지 못한 채 호주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를 종적이고 권위적인 관계로 규율한 호주제를 폐지해 개인의 존엄과 성평등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284-285쪽). 즉 아들이 우선 승계하는 호주제가 남녀차별을 조장하고 호주와 가족 구성원 간의 가부장적인 관계를 고착시키므로 이를 폐지하고, 자녀가 아버지의 성과 본만을 따르도록 했던 것을 어머니의 성도 따를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다.
이에 앞서 2004년 12월 27일 152명의 여야 남성의원들이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개정안을 2004년을 넘기지 말고 반드시 통과시킬 것을 결의한다"고 밝힌다. 이 자리에서 노회찬은 "호주제와 국가보안법은 세계 유례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흉물"이라며 두 법의 연내 폐지를 촉구한다.
김용갑 등 당시 한나라당 남성 의원들이 호주제 폐지 반대에 앞장서는 상황에서 노회찬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인 노회찬은 열린우리당 이은영 의원과 함께 법사위 소위원회와 전체 회의에서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의원들의 목소리를 압도했다.
'3.8세계여성의 날' 노회찬의 장미꽃과 편지
2005년 3월 8일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은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장하진 여성부 장관, 김선옥 법제처장,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등 여야 여성 국회의원과 여성단체, 국회 출입 여기자들에게 장미꽃과 편지를 전달한다. '3.8 세계여성의 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현재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여성 차별 해소, 여성의 권리 확대, 성평등 문화 실현에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기 위해 매년 각계 각층의 여성들께 장미꽃을 전달했던 것이다. 그의 장미꽃 전달은 2018년까지 1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된다. <여성신문> 2005년 9월 9일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아내인 김지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내는 여성의전화를 통해 노동문제에서 여성과 연관된 사회문제로 옮겨갔다. 본인은 이를 스스로 '발전'이라 말한다. 난 특히 아내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아내의 활동을 보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실태를 알게 된다.
2015년 3월 7일 꽃과 편지를 받은 진선미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린다. "이맘때쯤이면 기다려지는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이 그 맘을 알아주시려나 노심초사하던 중....드디어 도착! 만세!만세! 잊지 않으셨군요^^ 정성어린 편지와 장미 한송이! 노회찬 의원님! 짱!"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노회찬은 '정의당 여성당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여성 후보자들의 당선을 위해 노력한다. 위원회 발족식에서는 그는 "제가 태어나서 맡은 직책 중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맡게 됐다"면서 "나라다운 나라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성평등한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이어 "여성의 가사부담, 폭력으로부터의 위협, 경력단절, 차별 등 무수한 문제가 바로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성평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여성신문>, 2018년 7월 25일).
노회찬의 장미꽃 전달은 2019년 3월 8일 노회찬재단의 1,150송이 장미꽃 전달과 성평등 메시지로 이어진다. 노회찬재단은 메시지를 통해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노회찬의 뜻을 이어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관련한 이야기는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의 소식지(준비4호)의 "3.8세계여성의날을 '로즈데이(ROH'S-day)'로!"에 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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