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1926년 할아버지는 홀로된 증조할머니를 고향에 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면학을 목적으로 했지만, 식민지 조국의 젊은이라는 엄정한 현실은 면학 대신 항일 운동의 길로 할아버지를 이끌었다. 제국 대학의 법대생, 현실에 순응한다면 출세가 보장될 수도 있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과 양반 지주로서의 기득권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형극의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재일본 조선청년동맹 오사카(大阪)지부 상임위원 겸 조직 선전부장이자, 비밀결사단체였던 고려공산당청년회 오사카시 지부의 '야치에-카(세포조직)' 구성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두 번의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죄목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 활동을 했다는 것. 첫 재판에서 2년6개월 형을 받았지만 병(炳)을 이유로 일본인 변호사 집으로 거주지가 제한되는 조건으로 석방됐고, 할아버지는 이내 도주해 다시 항일비밀결사활동을 하다 2년 뒤 다시 체포돼 1934년 6월 동경공소원에서 징역 2년의 확정판결을 받고 수감됐다.
가족의 수난사
옥고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만나 당시에는 매우 드문 연애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은 길지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그랬듯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일경의 감시를 피해 먼 타국(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남은 가족의 수난사가 시작되었다. 증조할머니는 때마다 찾아와 겁박하는 일본 순사와 싸워야 했다. 할아버지가 몰래 다녀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일경의 겁박은 더욱 심해졌다. 겁박은 폭력과 고문으로 이어졌다. 나어린 아버지도 수시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그때 고문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노년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일경의 폭력과 겁박을 피해 할머니는 증조할머니만을 고향집에 남긴 채 어린 아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떠돌며 도피 생활을 했다. 그리고 이 일은 가족들에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자식과 며느리, 손자들이 떠난 텅 빈 집에서 홀로 아들을 기다리던 증조할머니가 굶주린 채 돌아가신 것이다. 당시 아들을 경성(서울)이며 일본으로 유학 보낼 정도로 부유하던 재산은 일경의 폭력과 방조 속에 주변인들에 의해 모두 빼돌려졌다. 광(창고)은 텅 비어 먹을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웃이며 친척들의 도움도 받기도 어려웠다. 일제의 서슬 퍼런 겁박에도 당당히 맞섰던 증조할머니는 결국 텅 빈 집에서 굶주림에, 또 기다림에 지쳐 쓸쓸히 돌아가셨다.
피신해 있던 할머니와 아버지, 삼촌의 사정도 증조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일경에 발각될까 하는 두려움보다 더 큰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2살 남짓 어린 삼촌도 세상을 떠났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무렵 일이었다.
해방되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던 할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오고 싶어 배편이 아닌 육로를 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38선이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당시로써는 드물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그래서 나름 이름이 알려졌던 할아버지는 결국 북에 억류되었다.
조만간 통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버티던 할아버지는 인편을 통해 할머니에게 '나 좀 데려가 달라'고 몰래 연락했다. 하지만 연락을 받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할아버지를 마중하러 갔던 할머니 역시 돌아오지 못했다. 요주의 인물이었던 할아버지가 삼엄한 감시를 뚫고 탈출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할머니는 한참 후 고향에 돌아왔지만, 옆에는 할아버지가 없었다. 전쟁 틈에 감시를 피해 귀향을 시도한 할아버지는 불순분자로 몰려 총알 세례를 받고 돌아가셨다. 그 장면을 숨어서 지켜본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평양 인근 숲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비록 가난했지만, 공부에 전념해 전매청(현 KT&G)에 입사했다. 안정된 일자리 덕분에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렸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찾은 이 행복은 할아버지로 인해 비극으로 변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직장에서도, 집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사건의 전말은 며칠 후에 반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 편에 알 수 있었다.
1970년대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귀순용사(현 탈북자)'라고 불렀다. 그렇게 북한에서 넘어온 귀순용사 중 한 명이 증언을 했는데, 김흥섭(金興燮, 할아버지의 성함)씨가 북한에 생존해 있으며. 그것도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는 남한에 있는 가족이 보고 싶다며 고향으로 간다면서 사라졌다고 했다. 이 증언으로, 아버지는 출근길에 정부 기관(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었고 당시 악명 높던 남산에 끌려가 며칠 밤낮으로 고문을 당했다. 아버지에게는 할아버지가 가족을 찾아오지 않았느냐는 강압적인 질문이 반복되었다. 수십 발 총알에 벌집이 된 할아버지 시신을 직접 묻어줬다는 할머니의 말을 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일은 수시로 반복되었다. 아버지는 출근길에, 퇴근길에, 또 친구와의 술자리 중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고, 며칠 뒤면 여기저기 고문 받은 흔적이 역력한 채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직장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직장에서 나와야 했다. 이후 우리 가족은 아주 오랜 기간 가난 속에 시달렸다.
모든 비극은 할아버지에게서 시작되었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증조할머니와 어린 삼촌은 굶주려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끊임없이 고통을 당했다.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던 할아버지 본인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타향에서 비명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을 겪었어도,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고,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이루었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마 대부분의 독립투사와 가족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보답은 없어도 잃었던 주권을 되찾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보상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일련의 흐름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일까? 우리는 진정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진 조국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이상화 선생이 노래했던 '빼앗겼던 들판'을 되찾고 그 들판에 우리는 온전히 주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인가?
지금 글을 쓰는 이유이다. 자칫 푸념처럼 들릴 가정사까지 길게 털어놓으며 글을 쓰는 이유이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근 수년 사이 소위 보수 일각을 중심으로 독립투사에 대한 폄훼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조선의 패망을 찬양하고, 일본의 식민지배 덕분에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가혹한 착취나 폭력이 존재했다는 주장은 허위이며, 대부분의 당시 조선인은 편안하게 잘 살았다고 주장한다. 일본군 성노예나 강제징용, 일제의 폭력과 패악은 날조된 거짓이라는 서적과 주장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암암리에 퍼져있다.
방송과 언론에서는 내란죄로 수감생활까지 한 전직 대통령에게 꼬박 꼬박 대통령이라 존칭을 붙이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투사나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에게는 '김구가 어떻게 했네, 윤봉길이가 어떻게 했네, 이순신이가 이런저런 일을 했네'라며 동네 아이들 이름을 부르듯 하대하며 저들의 폄훼에 동조한다. 심지어 일부 역사학계나 교육계에서는 외세에 대해 너무 적대적인 태도로 기술되어있다며, 임진왜란을 비롯해 기타 외세의 침략에 대한 기술을 역사 교과서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된 악역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다루더라도 일제의 잔악성보다는 조선인의 행패에 초점을 맞춘다. 강제 징용을 다룬 영화에서도 일본군이나 일경은 대부분 주범이 아니라 조선인들끼리 싸우고 속이는 것을 규제하는 합리적 인물이거나, 부수적인 종범 역할로 묘사된다. 일제 강점기를 다루더라도 일경이나 일본군의 행패와 폭력을 가급적이면 회피하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 미디어가 일제 강점기를 다루는 방식이다. 역사의 해석을 다르게 하자며,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을 합리적 근대인으로 평가하는 등 친일 매국노를 미화하는 움직임까지 있다.
이런 일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지만, 지식인 사회 그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지적을 하지 않는다. 뭐라고 지적이라도 하려면, 국수적인 민족주의라고 또는 '국뽕'이라고 공격한다.
소위 자생적 친일파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 한번 말해보자. 일제 강점기 공업시설과 발전시설 대부분은 지금의 북한 지역에 세워졌다. 현재 남한(대한민국)에 세워진 공업 시설은 많지 않다. 그나마도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6.25 한국전쟁으로 국토 전체가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지난 수십 년간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노력해서 일군 결과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교육에서 조선인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당시 친일 매국노의 후예나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에게만 허용되었다. 기술 교육을 한다고 해도 잡일만 허용되고 중요한 일은 조선인에게 알려주지 않아 일본 패망 후 공장을 가동하지 못 하는 일이 벌어졌다. 유형의 자본이건, 무형의 지식이건, 일본이 남긴 것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것도 전쟁 통에 모두 잿더미가 되었는데, 어떻게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한 덕분에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될까.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런 간단한 반박조차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식민지 근대화론, 일본의 전쟁범죄 미화 내지 합리화, 역사 왜곡 등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일반 국민의 반발과는 달리 소위 지식인 그룹에서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뽕'은 잘못된 것이라며, 반대의 목소리가 우세하다. 역사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젊은층 일각에서는 소위 자생적 친일파 주장에 동조하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우리는 정말 주권을 되찾았는가? 주권을 되찾은 독립된 조국에서 살고 있는가?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의 주장도 문제가 있지만, 심각한 위협으로까지 발전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보수 일각에서 주장하는 '건국절 논란'이다. 이들은 전 세계에 건국절이 없는 나라는 없으며, 현재 '대한민국 정부수립일'로 되어있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일'과 '대한민국 건국일'. 혹자가 보기에는 단어 하나의 차이처럼 보이지, 그 단어 하나로 의미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말에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정부의 형태만 바꿔가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조선 이래 역대 정부(또는 국가)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에는 바로 직전 정부였던 대한제국(조선)은 물론이고, 망명정부인 임시정부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권한(국토 영유권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이어받는 대한민국이라는 의미가 있다.
반면,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말은 신생국가이자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의 수립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건국(또 건국절)'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고조선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사와는 단절된, 1948년 8월 완전히 새로 생긴 독립국이라는 뜻이다. '대한민국 건국절'을 주장하는 소위 보수 일각(친일의 이력과 관련된)에서는 이런 점을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1948년 미국의 도움으로 새롭게 탄생한 신생 독립국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 고려와 발해, 조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별개의 국가가 된다. 고조선으로 시작해 현재로 이어지는 수천 년의 역사가 아닌, 1948년에 시작한 고작 70여 년의 역사로 축소된다. 소위 보수진영에서 말하는 대로, 1948년을 건국절로 정하면 '전통과 오래된 가치를 이어받고 계승한다'는 보수의 원래 의미와는 반대로 이전까지의 전통과 역사가 공식적으로 부정된다.
결국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지정하자는 주장은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보수 진영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면서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친일 매국의 과거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건국절 주장
그 이면에는 소위 보수 진영 일부에 존재하는 친일매국의 역사라는 오점이 존재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고조선부터 조선까지의 연속선에 있는 한, 조국과 민족을 외세에 팔아먹은 매국노(또는 매국노의 후예)라는 낙인을 지울 길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과거의 한반도 역대 정부(고조선~조선)와 단절하고 싶어 한다. 대한민국이 과거의 역사와 단절된 1948년 새로 건국된 신생독립국가가 되면, 과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일제에 부역하면서 민족과 국가를 배신한 매국 행위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전혀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된 신생 독립국이 되면, 친일 부역세력의 친일매국 행위는 대한민국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과거의 국가 조선을 배반하고 매국 행위를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저들은 5000년 역사를 고작 70년짜리 신생 국가로, 전통도 역사도 일천한 국가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건국절 제정이 단순히 역사가 축소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보다 큰 문제는 역사가 70년으로 축소되면,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지배해온 이 땅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의 영유권 역시 1948년부터 현재까지로 축소된다. 그리고 이것은 주변 국가와의 사이에 심각한 외교 분쟁 및 국익의 침해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영유권 다툼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 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누가 가장 먼저 그 영토를 지배했는지 또한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명명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규정하면, 대한민국이 현재의 한반도를 지배한 시점은 1948년부터가 된다. 그리고 이 시점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시기인 1910년에 비해 38년이나 뒤처진 시기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이 대한민국보다 한반도 영토에 대한 우선적인 권리가 생겨난다. 현재 일본과 다툼 중인 독도는 물론이고, 한반도 전체를 일본이 요구하며 전쟁을 걸어도 명분에서 밀린다. 진보 진영 일부에서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삼자는 주장도 나오지만, 1919년으로 일본의 영토 강점 시기인 1910년보다 9년이나 뒤처진다.
단순한 우려라면 좋겠지만, 과거의 역사를 근거로 영토를 통째로 빼앗긴 사례가 이미 존재한다. 바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다. 이스라엘은 과거 수천 년 전 자신의 땅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수천 년간 그 땅에서 살아온 팔레스타인 민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차지했다. 국제 사회는 '구약성서'라는 명백한 근거를 가지고, 영토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속수무책으로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에는 과거의 땅을 되찾는다는 명백한 명분과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국절 논란은 자칫 영토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이 과거 고조선 이래 조선까지의 역사를 단절하고 1948년 탄생한 신생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순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졌던 분쟁이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일각에 따르면, 과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당시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일부 열강을 상대로 내세웠던 주장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침략이 아닌 과거 영토를 되찾는 일이라고 설득했다. 일본이 끈질기게 과거사, 특히 고대사 왜곡을 시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일본만 위협이 되는 게 아니다. 중국은 수십 년 전부터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고조선과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역사 왜곡 작업을 하고 있다. 단순히 역사 해석의 문제만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 역사가 영토 문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1948년을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규정짓는다면, 동북공정을 마무리한 중국이 유사시 한반도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해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북한의 정식 국호는 '조선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국호에 '조선'이라는 명칭을 넣어 '조선을 계승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은 정치적·역사적으로 자신들이 고조선에서 조선까지의 역대 한반도 중심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입만 열면 '종북'을 외치는 보수 진영은 건국절을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북한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진짜 종북'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건국절 제정은 일본과 중국에게 현재 영토(한반도)에 대한 우선권을 빼앗기고, 북한에게 정통성마저 넘겨줘 영토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다.
더군다나 자칭 보수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한민국에는 이미 건국절이 존재한다. 바로 단군이 고조선을 개국한 시점을 기념한 '개천절'이다.
신화를 바탕으로 한 기념일이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옆 나라 일본의 건국기념일(건국절)은 2월 11일이다. 이날은 일본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의 생일을 기념해서 정해진 날이다. 진무천황은 신화 속 인물로, 일본은 괴물과 신이 존재하는 말 그대로 신화 속 무대이다. 따라서 일본 학계에서도 진무천황은 실존 자체를 의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신화 속 인물의 생일을 법적으로 건국기념일로 제정했다. 국가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국가의 기원을 최대한 오래전으로 늘리기 위해서다. 이탈리아도 로마를 자신들의 최초 기원으로 규정하고 로마 건국 신화에 기초해 로마의 건국일을 건국기념일로 삼고 있다.
반면 단군왕검이 개국한 단군조선은 주변 나라에 의해 그 기원과 성격, 법규 등이 기술되어 있는 실체가 있는 국가이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건국을 기원으로 삼은 개천절은 일본이나 이탈리아 등과 비교해 단순히 신화에 근거한 건국절도 아니다. 더구나 신화에 근거해 건국절을 기념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부 국가에서는 아예 논란의 소지(주변국과의 영토분쟁 등을 포함하는)를 만들지 않기 위해 건국절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도 있고, 일본이나 이탈리아처럼 신화에 근거해 만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국절이 존재할 경우, 현재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영토의 점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시점은 가능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유리하다.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의 진정한 건국절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것을 기념한 10월 3일 개천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을 포함한 그 이후 국가 또는 정부는 고조선을 승계한 국가이자 정부로 규정되어야 한다. 한반도 역대 정부(또는 국가) 또한 계승한 국가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대한민국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와 관련한 국가적 정체성이 명백해지고, 주변 국가와의 분쟁 소지를 방지할 수 있다.
친일매국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스스로 얻기 위해 시작된 건국절 논란, 지금까지 써왔던 칼럼의 주제와 전혀 동떨어진 주제를 다룬 이유는 하나이다. 조국의 국권을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뛰어든 할아버지,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잃고 아사한 증조할머니와 어린 삼촌, 일경의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런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지켜보는 현실은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광복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정말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아 진정한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유력 정치인이 친일매국노를 단죄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반민특위'를 대놓고 비난하는 말을 하는 나라, 외세의 식민지 지배를 축복이라 대놓고 주장하며 외세에 저항해 싸운 독립운동가를 비하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라, 비리와 부정도 모자라 내란죄까지 저지른 전직 대통령에게는 꼬박꼬박 존칭을 붙이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내걸고 싸운 선영(先塋)은 동네 강아지처럼 하대하는 나라.
우리는 정말 광복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빼앗긴 들을 되찾고, 그들에서 진정한 독립을 누리고 있는가?
이 물음을 던지는 것조차 두렵고 조심스럽지만,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가난과 핍박을 겪고 버티며 살아온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묻고 싶다.
우리는 정녕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 진정한 독립을 이룬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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