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유럽에서는 6월부터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다. 6월 22일 스페인 안두하르의 기온은 45.1℃까지 올랐고, 다음 날 프랑스 피소스에서는 44.3℃를 기록했다. 프랑스 곳곳에 폭염 적색경보가 내려졌고, 파리에서는 에펠탑의 운영 시간까지 조정됐다. 한낮의 뜨거운 공기를 피해 관람객의 출입이 오후 4시부터 중단됐다. 세계적인 건축물의 운영 시간마저 기온에 따라 달라진 셈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8월 2일 경남 양산의 기온이 42.5℃까지 올라 기상관측 이래 최고기온을 기록하는 등 전국 곳곳에서 폭염이 이어졌다.
세계를 뒤덮은 폭염은 그저 갑자기 닥친 자연현상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대기와 해수면, 토양과 식생, 도시의 구조, 에너지 사용과 인간의 생활방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기후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인간이 환경을 바꾸고, 달라진 환경은 다시 인간의 몸과 생활을 바꾼다. 에펠탑의 운영 시간이 달라진 것도 그 관계 속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이다. 인간이 만든 도시의 공간이 기후에 반응하고, 기후의 변화가 다시 인간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유기체지향 존재론>(리투아니아 철학자 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 지음)은 바로 이처럼 서로 얽혀 움직이는 세계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묻는다.
책을 읽다 보면 유기체에 대한 익숙한 이미지가 조금씩 달라진다. 유기체는 자신을 유지하는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스스로를 조직하면서 환경과 관계를 맺고 변화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그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다른 존재들과 얽히고, 공생하고, 서로의 조건을 바꾸면서 살아간다. 한 생명체의 경계를 어디까지 그을 수 있는지 묻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기체를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보기보다 여러 관계가 만나 형성되는 회집체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칸트의 유기체 개념에서 출발해 풀어나간다. 칸트에게 유기체는 스스로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자연목적이다. 유기체의 부분들은 전체를 이루면서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산출한다. 조직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조직하는 존재라는 점이 핵심이다. 책의 흥미로운 점은 이 오래된 문제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 데 있다. 뤼예에게서는 스스로 형성되는 유기체와 동등잠재성이 등장하고, 시몽동에게서는 아직 개체로 굳어지지 않은 전개체적 잠재성과 개체화의 과정이 중요해진다. 시몽동이 주목하는 것은 완성된 개체가 아니라 개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뤼예 역시 살아 있는 형태가 지닌 변화의 가능성과 그것이 실제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을 탐구한다. 말라부에게서는 이 문제가 가소성과 잠재성, 후성발생과 결정 사이의 긴장으로 이어진다.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과정성, 다수성, 잠재성으로 모인다. 살아 있는 존재를 경계가 닫힌 하나의 개체로 바라보면 변화는 부차적인 현상이 된다. 반대로 존재 자체를 계속해서 변화하고 변형되는 과정으로 바라보면 변화는 존재의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저자는 유기체 개념을 내부의 생물학적 구조에만 묶어두지 않고, 서로 다른 생명체와 종, 환경과 기술이 만나는 관계까지 넓혀간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생과 생성에 관한 논의는 이 흐름을 한층 넓힌다. 서로 다른 생명체는 만나면서 서로의 잠재성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계보나 종의 경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가 생겨난다. 감염과 전염 역시 생명이 이어지고 변형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생명은 혈통과 성적 재생산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접촉과 결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기관 없는 신체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체를 이미 정해진 기능과 조직에 묶어두지 않고 새로운 연결과 접속에 열어놓는 개념이다. 회로와 층위, 문턱과 접속이 달라지면 신체가 할 수 있는 일도 달라진다. 여기서 질문은 '이 신체는 무엇인가'에서 '이 신체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로 옮겨간다. 인간 역시 하나의 완결된 단위로 설명하기 어렵다. 바렐라가 보여주듯 인간의 몸에는 세포적·면역학적·인지적 자기생성의 여러 층위가 겹쳐 있고, 동시에 사회적 회집체에 속해 있다. 몸 안에서도 여러 과정이 동시에 작동하며, 몸 밖의 환경과도 계속 관계를 맺는다. 유기체의 경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저자의 시선은 자연과 환경을 지나 인류세와 가이아로 뻗어간다. 인간은 지구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이 됐고, 자신이 바꾼 환경의 영향을 다시 받는다. 가이아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라기보다 생물학적·지질학적·환경적 과정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행성적 관계망으로 설명된다. 라투르 역시 가이아를 하나의 거대한 전체로 보기보다, 서로 얽힌 행위자들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사유한다. 자연과 인간을 서로 마주 선 두 영역으로 나누기보다, 서로의 조건을 바꾸며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존재들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기술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스마트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시몽동의 기술적 개체화에서 스티글러의 일반 기관론, 그리고 후이의 논의로 이어지면서 기술적 객체 역시 발달과 재귀성, 우연성, 변화의 잠재성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유기체라는 개념은 처음보다 훨씬 넓어진다. 한 생명체의 내부에서 시작한 질문은 다른 종과의 공생으로, 무기적 환경으로, 기술적 객체와 행성적 관계로 확장된다. 들뢰즈의 다양체 개념이 이 흐름에서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의 사물을 이미 완성된 통일체로 바라보기보다 계속 분화하고 다른 관계를 만들어가는 존재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유기체 역시 자신의 유래를 따라 바라보는 수직적 시선과 환경과 관계 맺는 수평적 시선을 함께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던지는 "유기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하나의 일탈일까, 유기적인 것에 관한 사유로의 전회일까"라는 질문은 책 전체를 압축한다.
유기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철학의 연구 대상 하나를 늘리는 일이 아니다. 존재를 고정된 실체로 바라보던 시선을 움직이고, 생성과 개체화, 공생과 잠재성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으로 불러오는 일이다. 철학은 완성된 존재를 설명하는 데서 벗어나,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달라지는지 묻게 된다. 저자는 이 질문을 하나의 결론으로 서둘러 마무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철학적 사유를 불러내고, 그 사이에 놓인 간격과 접점을 살피면서 유기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조금씩 넓혀간다.
이 책의 의미는 각각의 철학자를 얼마나 많이 소개했느냐에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사유들이 하나의 질문 안에서 만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독자는 그 길을 따라가면서 '유기체'라는 하나의 개념이 철학의 여러 영역을 가로지르며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생각들을 한자리에 놓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질문을 열어주는 것. <유기체지향 존재론>은 좋은 철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건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좋은 철학은 세계를 대신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하게 바라보던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팬데믹과 기록적인 폭염을 지나, 다음에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유기체지향 존재론>은 살아 있음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 서둘러 답을 내놓기보다, 독자가 그 질문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한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를 건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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