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슬롭(slop)이라는 단어가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익숙한 사람들이거나 기술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정확한 의미는 모르더라도 어떤 느낌인지는 와닿을 것 같다. 2025년 말 미국의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웹스터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슬롭을 선정했다. 1700년대에는 진흙을, 1800년대에는 가축에게 주는 음식찌꺼기를 뜻하는 단어였는데 21세기에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대량생산된 저품질의 디지털 콘텐츠라는 의미가 추가되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그럴싸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비용이 굉장히 저렴해졌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가짜뉴스나 정체불명의 동물 영상 같은 합성영상을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용어가 어느 순간 게임에도 들어왔다. 생성형 AI를 사용하여 어느 정도 수준의 이미지나 음악, 효과음 같은 자원들을 제작할 수 있게 되자 게임 개발에 AI 활용이 빠르게 퍼졌는데, 이에 대한 반발도 상당하다. 그 결과 세계 최대 PC게임 유통 플랫폼인 스팀은 게임 개발에 AI를 사용했는지 여부의 표시를 강제하였다. 실제로 이것이 유의미하게 잘 동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이머와 개발자들 모두 이런 현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이러한 강제는 흥미로운 관찰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최근 핀란드의 개발자 술카 하로는 2023년 7월부터 2026년 7월까지 스팀에 출시된 게임 5만 3597개를 대상으로 AI를 얼마나 사용하였는지 조사하였다. 개발자 스스로 제출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엄밀한 조사결과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이 결과에 의하면 2026년 들어 스팀 신작 3개 중 하나가 AI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건 이렇게 만들어진 대부분의 게임들이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결과가 AI를 사용했다고 공시하는 게임을 모두 AI 슬롭으로 규정해야 함을 뜻하진 않는다. AI로 만든 게임이기 때문에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속단하기도 어렵다. 원래 게임 생태계는 AI가 나오기 전부터 대부분은 돈을 벌지 못하는 시장이었다. 유니티 등의 게임엔진이 발전하고, 게임 개발의 대중화(Democratization)를 가져오면서 출시되는 게임의 양은 계속 증가추세에 있었다. 또한 애셋스토어나 애셋의 외주 작업이 일반화되면서 판매되는 애셋 등을 조합해서 게임을 출시하는 경우도 이미 존재해왔다. 이미 2024년만 하더라도 스팀에 나온 게임의 개수가 1만 8천 개가 넘고, 그중 80%가 사람들이 거의 플레이하지 않았다는 조사가 존재한다.
AI는 이러한 게임 개발의 최적화 파이프라인을 더욱 가속화했을 뿐이다. '슬롭 게임'의 출현을 가속시켰을 뿐, AI 도입으로 인해 '슬롭 게임의 범람'이 새로 일어난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 환경은 아직 영상이나 이미지처럼 프롬프트만으로 고품질의 결과물을 한번에 얻기는 힘든 상황이다. 그저 AI 도입으로 바이브코딩(AI가 사람을 대신해 코드를 짜는 작업. 사람은 일상어만을 이용해 AI에게 명령할 수 있으니,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몰라도 코드를 생성할 수 있다)을 사용하거나 다른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개발을 조금 더 가속화하는 정도다.
게임을 AI에게 지시만 해서 만들기는 이르다는 점에서 일부 게임을 두고 'AI 슬롭'을 논하기는 이르다. 앤트로픽 클로드의 최신 모델인 페이블(Fable)같은 고급 모델이 나오면서 HTML5에서 돌아가는 게임은 쉽게 나오지만, 정말 간단한 수준의 게임이 아니라면 아이디어를 증명하는 수준에 그치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할 만한 수준의 것이 나오려면 시간을 들여 LLM과 핑퐁을 하고 꽤 많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한 리소스들을 골라내고, 사람이 끝없이 테스트를 하며 어색한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AI의 도입을 쓸모 없는 시도로 여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지금 같은 모델이 나오기 전에는 복잡한 아이디어를 한번에 구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AI를 이용해 핀볼 게임을 구현해보고는 했다. 페이블 이전에는 기본적인 물리는 구현하더라도 핀볼의 구성요소들이 만족스럽게 배치되지 않았지만, 페이블에 이르러서는 꽤 그럴싸하게 구성요소를 배치한 핀볼 게임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만 이 상태의 html을 그대로 웹에 올려서 다른 사람이 플레이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웹개발 지식이 조금 있거나 LLM을 이용한다면 공개 자체가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게임은 플랫폼 위에 올라가야 이용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인데 플랫폼에 게임을 올리는 작업은 AI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복잡하다.
즉 개발한 게임을 출시가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폴리싱 작업을 고려하면 아직 AI에만 의존해 게임을 출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광을 내다'라는 의미의 폴리싱(Polishing)은 게임 개발의 마무리 단계에서 품질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뜻한다. 폴리싱 작업을 건너뛰고 게임이 바로 이용자에게 닿는다면, 그것은 'AI슬롭'이라고 해도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AI 시대 이전에도 폴리싱이 충분히 되지 않은 게임은 슬롭처럼 이용자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잊혔다. 재미만으로 밀어붙여서 충분하지 못한 품질임에도 인기를 끈 경우가 있지만 그런 게임은 정말 예외일 뿐이다.
많은 의견을 들어보면 AI가 개발 과정에 도입되면서 프로토타입과 재미검증을 하기 쉬워졌다는 부분에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출시에 어울리는 퀄리티로 다듬는 작업은 아직 AI만으로는 무리라는 평가가 많다. 아직 AI가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보고 그 게임이 재밌는지 재미없는지를 평가할 수준은 아닌 만큼, 결국 이 부분은 온전히 창작자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사실 대부분 창작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이 개발한 게임에 내린 평가를 백퍼센트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AI가 주는 의견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 부분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생겨난다. 게임의 개발을 주도하는 디렉터는 개발에 참여하는 다른 작업자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AI를 사용한다면 지난한 시간을 요구하는 의견 조율 과정 없이 온전하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밀어붙여 테스트하는 것이 가능하다. 프로그래머를 설득할 필요 없이 바이브코딩만으로 오류를 검증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반복적인 작업을 되풀이할 수 있다. AI를 이용한다면 기획회의를 통과하기 힘든 아이디어라도 어느 수준의 단계까지는 어렵지 않게 직접 개발해 그 결과를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나홀로 개발'한 작업물은 대체로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할 줄 아는, 여러 재능을 겸비한 일부 사람의 몫이었다. 혼자 만들려면 게임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전부 갖춰야 했으며, 그 조건이 모두 갖추어졌더라도 오랫동안 고독을 견디며 버텨야 한다는 높은 문턱이 존재했다. AI는 이 여러 조건 가운데 적어도 기술의 문턱만큼은 낮췄다.
10년 전쯤으로 돌아가보자. '인디포칼립스'라는 단어가 있다. 인디게임의 인디와 종말의 아포칼립스를 합친 단어다. 인디게임이 범람해서 오히려 인디게임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어쨌든 인디게임 개발자들은 아직 인디게임을 만들고 있고, 인디게임 시장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슬롭이 게임을 죽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과장이 될지 모르겠다.
다만 AI를 이용한 게임이 넘쳐나면서 게이머가 게임을 발견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스팀의 게임 매출은 반기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지만, 그해에 나온 신작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21%로 2년 연속 하락했다. 시장은 커지는데 돈은 이미 검증된 오래된 게임으로 몰리고 있다. 생성형 AI는 결국 평균값에 수렴하는 결과물을 낸다. 이를 그대로 개발에 이용한다면 그 게임은 AI가 일반화하기 전부터 나온 그저그래보이는 게임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이미 그런 게임이 살아남기는 힘든 시장이다.
결국 게임을 슬롭으로 만드느냐 마느냐를 AI의 사용 여부가 결정하지는 않는다. 개발자가 온전히 그 결과물이 낳는 재미를 책임지느냐가 중요하다. AI는 게임을 만드는 비용을 낮췄지만, 무엇을 만들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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