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맴돌고 있다.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라는 유령이. 윤석열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아무 생각 없이 외쳤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필리핀 이모'(가사관리사)라는 당황스러운 제도를 급하게 시범 도입하면서 논쟁을 자극했다. 일하는 사람 국적에 따라 최저임금을 안 줘도 된다는 논리에, 당시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헌법과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 위배되기에 신중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사관리라는 이유로 최저임금을 덜 주다가는 세상이 우습게 여길 거니 선을 넘지 말자는 뜻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준석은 일관되게 초법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지자체에서 최저임금을 지역별, 업종별에 따라 ±30% 조정할 수 있도록 하겠단다. 무려, 대선공약이다. 더 주는 거야 그냥 더 주면 그만이기에, 저 말은 최저임금 안 줘도 문제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과 진배없다. 지역이라, 이 무슨 논리인가. 시골에 산다고 열차 요금 할인이라도 해 주는가. 오히려 역까지 가는 시간과 돈은 시골이 더 든다. 야간에 일을 마치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가능성만 따져봐도 교통비가 덜 드는 곳은 서울이다. 지방 어디에서든 서울로 돌아오는 심야버스 한 대는 있기에, 서울 살면 숙박비도 덜 든다. 서울시 최저임금을 20% 정도 줄이는 게 타당해 보이는데, 누가 납득하겠는가.
주거비용이 더 들기에 안 된다고? 그럼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 한쪽의 돈을 깎아서 내 집 마련에 걸리는 시간을 서울과 지방 사람들 비슷하게 만드는 게 평등인가? 지방 사는 사람이 월세 지출과 대출 상환이 더 버거워지면, 서울 사람들은 집을 빨리 마련하는가? 똑같이 편의점에서 일했는데, 집값이 싸다고 임금이 줄어드는 걸 수긍할 수 있을까. 그때,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게 대선공약이라니, 세상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는가.
지역과 업종, 이 두 가지를 조합하면 이 피해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집중된다. 하지만 역사는 경고한다. 최저임금조차도 안 주겠다는 이 유령은, 여기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면서 노동의 가치를 후려쳤다. 여기가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는 수많은 이민자를 괴롭혔다.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매사추세츠주 로렌스 시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연대 파업이 그 이유로 시작되었다.
1912년, 로렌스 시는 이탈리아, 벨기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유럽의 수십여 개 나라에서 건너 온 이민자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한두 세대 먼저 온 영국과 아일랜드 이민자들에 비해 숙련공도 아니었고 영어 소통도 어려웠다. 그 이유로 돈을 더 적게 받았다.(1900년대 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 한국인들도 같은 차별을 받았다.) 노동자의 절반은 여성과 아이들이었는데, 이들은 여성과 아이라는 이유까지 추가되어 돈을 적게 받았다. 버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이민자들의 절박한 심리를 이용해 고용주들은 비용을 절감했다. 적게 받으니 더 일하지 않고선 살 수가 없었다. 당시 매사추세츠주 주 최대 노동시간이 58시간이었지만 이민자들은 60~70시간을 일했다.
과잉 노동이 문제가 되자 주정부는 노동시간을 주 56시간으로 단축하는데, 고용주들은 딱 그만큼의 임금을 삭감했다. 이에 분노한 2만 명의 노동자들은 인간다움 삶을 위한 투쟁을 결의해, 훗날 '빵과 장미의 파업'으로도 불리는 9주간의 강력한 연대와 집단행동으로 임금 인상과 초과수당 지급을 이끌어 낸다. 이 여파로 그해 매사추세츠주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최저임금제를 도입했고 1938년에는 미국 전역에 최저임금에 관한 기준이 마련되는 공정노동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 FLSA)이 제정됐다.
제도는 변했지만, 문화는 따라가지 못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논리는 약자가 등장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차별받던 이민자들은 힘들게 자리를 잡은 후, 새로운 이민자들을 차별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면서 조국을 떠난 한국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세탁공장에서, 봉제공장에서 묵묵히 버텼다. 말도 안 통하고,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당신처럼 절박한 사람은 널렸다는 게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이유였다.
1990년대부터는 성공한 한인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임금 착취가 발생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피해자들은 주로 멕시코,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태국, 베트남 쪽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이었다. 사업주는 노동자들에게 고정 임금이 아닌 옷 생산량에 따른 차등임금(piece-rate)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것으론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노동자들은 초과노동을 해야만 겨우 먹고살았다.
잘못된 유산은 끈질기게 부유한다. 지독한 고생 끝에 성공한 이민자의 경험은 다른 이민자의 저임금을 정당화하는 연료로 사용된다. 1999년에 제정된 캘리포니아 주법 AB 633은 의류 제조업에서 노동자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기존 노동법을 대폭 수정한 법안이었지만, 봉제공장의 변화는 느렸다. 2023년 9월, LA 카운티 검찰은 임금 착취, 최저임금 위반, 초과근무 수당 미지급 등 노동법 위반을 전담하는 노동정의부(Labor Justice Unit, LJU)을 신설하고 첫 기소를 두 명의 한인업주를 상대로 했을 정도다. 관행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더 비굴해지는 게 어찌 미래인가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최저임금이 현실적이지 못한 것보다 더 나쁘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덜 받아도 되니' 일만 하게 해 달라고 할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연대는커녕 노동자들끼리 분열될 게 뻔하다. 다급한 사람은 최저임금보다 적게 받아도 된다는 각오로 자신의 경쟁력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월급이 계속 최저임금인 직업은 지금도 무수하다. 노동자들이 버티는 이유는, 최소한 국가는 이 최저임금을 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니던 회사 계속 다니기 위해서 최저임금을 거부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비굴해지면, 최저임금만 맞춰달라는 것도 지나친 요구가 된다. 아무리 항의한들, '싫으면 관두면 된다'는 빈약하고 투박한 폭력의 문장만이 부유한다. 이런 추임새가 어찌 없겠는가.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신다고, 최저임금을 달라는 건지." 그 세상에선, 최저임금 지키는 것만으로도 고용주는 대단히 착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나쁜 작업환경을 문제 삼지 못한다. 더 나쁜 고용주도 있는 것에 비하면 별 게 아니니, 최저임금 받는 것만으로도 무한 감사를 해야 한다.
차등 적용은 단순히 금액의 차이가 아니다. 영국,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영어를 못하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천대했다. 이탈리아, 벨기에 이민자들은 문화가 미개하다면서 새로운 이민자들을 차별했다. 한국 이민자들은 천성이 게으른 인간들 때문에 화가 난다며 새로운 이민자들을 무시했다. 즉, 차등 적용은 사람을 수직적으로 분류하는 버릇을 유도한다. 끊임없이, 어떤 인간들은 최저임금조차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논의조차 되어선 안 된다. 이 문제가 이주노동자들로 좁혀지면, 인종차별에 가까운 말들이 한치의 부끄럼 없이 등장한다. 그 사람들 어떤지 말해주겠다는 글들은 보면, 개고기 먹는 한국인들의 실상을 알려주겠다면서 저임금을 정당화했던 논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런 편견을 한인들은 어떻게 견뎠는가? 적응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조금도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겨우 인정받았다. 어떻게? 다른 아시아인들보다는 착하고 성실한 아시아인으로. 그래서 다행인가?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그렇게 버티고 있다. 억지로 김치를 먹으며, 억지로 감사하다는 말을 남발하면서, '한국 사람 다 됐네'라는 말을 한번 듣기 위해 자세를 낮춘다. 자존감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는 우주의 기운이 지역별, 업종별로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아이고 이런 시골에 사는데, 최저임금이 굳이 필요하진 않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이고 하는 일이 단순한데, 최저임금 안 받아도 충분하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겨우 일자리를 구할 거다. 좋은 사회인가?
최저임금엔 그 사회를 인간답게 살아갈 빵과 장미가 정당하게 포함되어야 한다. 매일 잘 먹는 사람이라면 물에 밥 말아서 김치를 곁들이는 한 끼가 평소보다 소화도 잘 되는 기분 좋은 순간이겠지만, 매일 그것만 먹어야 한다면 곤욕이다. 최저의 기준을 올려야만 반찬이 늘어난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가족들끼리 한 달에 한두 번 피자 먹는 게 대단한 사치는 아닐 거다. 50년 전이라면 피자 못 먹는다고 박탈감 느끼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그게 지금에도 그림의 떡이라면 그 사회의 최저임금은 문제가 많은 거다. 그 피자, 이주노동자에겐 더 저렴한가? 시골 거주자들은 할인이라도 받는가? 단순노동 업종 종사자들에게는 1+1 특혜라도 있는가?
돈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 장난을 사람 가려 하는 걸 차별이라 한다. 차별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혐오라 한다. 최저임금 차등 지급은,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며 어차피 모두가 존엄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차별은 개인의 몫이라는 편견이 가득해야지만 상상할 수 있다. 더 차별하겠다는 게, 어찌 정책인가. 더 비굴해지는 게, 어찌 미래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다른 일을 하면 된다는 게 불평등 문제의 유일한 해법인 사회를 희망할 순 없다. 참고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는 이준석의 캐치프레이즈는 '압도적 새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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