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첫 '4.28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일하다가 사고나 질병으로 죽어간 전 세계의 노동자를 기억하고, 더 이상 산업재해로 고통받는 노동자가 생기지 않도록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자고 약속한 날이다. 1984년 캐나다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확대되었고 2003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이 날을 '세계산업안전보건의 날'로 지정했다. 1988년 문송면 군의 수은중독 사망을 계기로 산재추방운동을 해왔던 한국 노동계에서도 오랫동안 국가기념일 제정을 촉구해왔다.
많은 사람이 일하면서 살아가는 '시민'이자 '노동자'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지만, 한국사회는 이 두 가지를 철저히 분리하고 노동자의 권리와 건강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대해 불온함을 덧씌워 왔다. 이처럼 뒤늦은 국가기념일 지정은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문제에 대한 체계적 비가시화와 배제의 결과이다.
2024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산재사망 노동자는 935명이었는데 이는 200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던 경향이 반전된 수치이다. 취임 첫해부터 화물노조와 건설노조의 정당한 파업을 강경대응으로 철회∙위축시키고, 건폭몰이 단속으로 건설노동자를 억울한 사망에 이르게 했던 윤석열정부의 노동 혐오와 노동자 탄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만큼 산 자들의 노동현장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이달에만도 울산 이수기업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투쟁문화제와 홈플러스 대주주 사모펀드의 일방적 구조조정에 항의하는 마트노조의 농성장을 사측이나 행정구청측 용역들이 기습침탈하고 참가자들을 폭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서울정부청사 앞에서는 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가 학교급식을 담당하는 여성노동자의 고강도∙비정규직∙저임금 노동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21일부터 단식농성 중이다. 오늘도 'LCD 편광필름' 검사원이었거나 호텔조리사였거나 배를 만들던 우리 곁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각각 477일, 75일, 45일째 고용승계와 노동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위태로운 구조물 위에서 고공농성 중이다.
그밖에도 배달∙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와 플랫폼 기업의 착취,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위험노동 전가, 청년∙여성∙중고령 노동자들의 취약성, 비정규직 증가로 인한 임금불평등의 심화와 노동안정성 악화 등 일하면서 살아가는 노동자 시민의 안전과 삶이 잘 보호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관련자료).
금속노조의 최근 보고서는 시민들의 탄핵집회 참여가 단지 윤석열정권의 정책에 대한 불만과 실망의 표출 이상으로 민주주의와 공정성의 가치를 지키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데 보탬이 되고 싶다는 고도의 '가치 지향적인 집단적 저항' 이었다고 진단했다. 광장시민들이 꼽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현안은 노동시장의 불평등과 양극화, 젠더 갈등과 성별 불평등이었다(☞관련자료).
그러므로 윤석열 정부에서 거부권에 가로막혔던 노조법 2∙3조 개정을 비롯하여 약화된 중대재해처벌법의 입법 취지를 살리고 미조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며 노동시간과 임금에서의 불평등을 개선하겠다는 노동정책이 마땅히 시대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이 당내 대선후보 경선 중인 국민의힘은 제외하고라도) 그렇다면 압도적인 지지로 확정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와 민주당이 추진하는 정책들은 광장시민들의 기대나 시대적 과제와 방향을 같이 하고 있는가.
대통령 탄핵심판 중에 더불어민주당은 반도체 연구개발(R&D) 노동자들이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있다는 '특별연장 근로제도' 개편안을 냈다가 노동계의 반발로 한 발 물러섰다. 이후 민주당은 '경제성장'을 핵심 비전으로 내세우며 지난 17일 해당조항을 우회할 수 있는 반도체특별법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산업과 인구, 생태환경의 조건이 달라진 지금, 과거와 같은 경제 '성장'이 가능할 것인지 또 그 '성장'을 위해 일하는 사람과 지역자원의 불평등한 희생, 민주적 절차위반을 동원해도 되는 것인지 답해야 한다(☞관련자료). 이젠 더 이상 국가권력이 자본과 결탁하여 언제든 기회를 틈타 노동자들을 더 약삭빠르게 수탈하고 기만하는 방향으로 노동정책이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
유럽의회 선거가 있던 작년 6월 유럽경제사회위원회(Europe Economic Social Commission)는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고 개선하는 노동자 친화적 입법에 대하여 극우정당이 어떤 입장을 보였는지 분석한 보고서를 냈다(☞관련자료).
검토기준은 1) 기업의 공정한 노동관행 유지 책임 2) 노동빈곤 퇴치 3) 괜찮은 일자리와 생계조건에 필수적인 적정 최저임금 보장 4) 성별 임금 격차 해소 5) 탄소제로 경제전환을 위한 지역사회와 노동자에 대한 지원 6) 에너지 또는 교통빈곤 취약계층 지원 7)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 8) 다국적 기업 최저세율 설정 등 여덟 가지였다. 분석 결과 극우 정당들은 이런 내용을 담은 입법안에 대하여 압도적인 반대 또는 기권을 표명했다.
보고서는 많은 극우 정치인이 국민의 진정한 이익을 수호하고 자본주의 횡포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고 자처하지만 그것은 단지 포퓰리즘 전략일 뿐이며 그 본질은 노동자들의 노동 및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로 이어지지 않는 반노동자(anti-worker) 선전이란 점을 지적했다.
지금 한국 정치에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 평가해보면 어떨까. OECD 국가 평균보다 높은 저임금노동자 비율, 물가인상율에 미치지도 못하면서 해마다 '경제를 망친다'는 오명을 쓰는 최저임금 인상 논의, 좁혀지지 않는 성별임금격차, 준비되지 않은 발전노동자 일자리 전환 등의 상황은 한국 정치가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뿐만 아니라 노동을 토대로 하는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조기대선에 참여하려는 정치세력은 단지 정치권력을 바꾸는데 멈추지 말고 탄핵을 주도했던 노동자와 시민들이 요구했던 노동개혁의 의제들을 윤석열정부가 지체하고 역행했던 것보다 더 멀리까지 더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현재 민주당과의 연합정치에 선을 그은 노동당∙정의당∙노조∙노동사회단체의 독자적 노동자 민중후보 경선이 진행 중이다. 이들은 노동현장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민주당이 민감한 이슈라며 발언을 자제하고 있는 '여성의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관련기사).
지난 토요일 1000명의 시민들이 희망버스로 달려갔던, 3년 전 화재로 불탄 구미 한국옵티컬하이테크의 공장 외벽에는 이런 글이 걸려있다.
"한국옵티컬하이테크에 준 무상임대 50년 혜택은 닛토덴코 본사가 한국 공장을 50년 지키라는 의무이며, 한국옵티컬하이테크에 준 법인세 취득세 원재료 수입관세 면제혜택은 닛토덴코 본사가 노동자들의 일터와 고용과 복지를 지키라는 의무입니다. 모든 혜택을 노동자들이 주었으니, 이 공장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철산, 대구경북작가회의)
4.28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 그리고 다가오는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일터와 내가 맺은 관계와 책임에 대해 생각해자. 그리고 노동자이자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보호하는 정치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시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움에 나선 사람들에게 뜨거운 지지와 연대를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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