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계엄은 시민들이 위임한 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보여주었다. 건강 역시 마찬가지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조건, 권력, 구조와 이들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강을 전문가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우리는 건강의 당사자로서, 건강을 결정짓는 요인에 개입하고 관여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만약 국가가 우리가 민주적 권력을 행사하는 통로 중 하나이고 정책이 이러한 권력이 구체화된 개입이라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 건강 정책의 정당성은 시민의 목소리를 얼마나 담고 있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건강 영역, 특히 건강 증진에서는 전문가주의, 보호자주의, 하향식 권력 구조에 반대하며 시민의 역량 강화와 참여를 강조해 왔다. 다양한 시민참여형 연구와 실천이 시도되었고 시민 권력이 강화된 사례도 드물지만 발견된다. 하지만 크고 작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둘러싼 지식을 살펴보면 시민의 경험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건강 정책의 바탕이 되는, 당연하게 가정되는 지식들이 시민의 관점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건강 정책의 대상과 당사자가 시민이라면 그 기반이 되는 지식 속에서도 시민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관련연구 바로가기).
오늘 소개하는 연구는 건강 정책의 핵심인 '건강' 자체가 시민의 경험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건강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의미를 얻으며, 경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재구성된다. 하지만 서구 중심의 생의학적 모델은 질병 유무에 입각한 고정된 건강을 보편적 정의로 내세우며 건강 영역을 지배했다. 예를 들어 연구진이 속한 남아프리카에는 건강에 대한 고유한 의미가 존재했지만 이는 미신이나 후진성으로 간주되며 배제되었다.
현재의 생의학적 모델은 몸과 삶을 둘러싼 사회, 정치, 문화적 배경을 담지 못하고 우리의 경험과 해석이 들어설 자리를 제거한다. 연구진은 건강을 둘러싼 다양한 의미를 찾는 과정 자체가 인식론적 인종주의에 맞서는 탈식민화 운동이라 주장한다. 이 연구는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된 잠비아에서 당뇨와 고혈압을 함께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건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탐구했다(☞논문 바로가기: 건강—체화된 몸의 경험: 당뇨와 고혈압을 가진 잠비아 사람들이 부여한 건강의 의미).
건강은 체화된 몸의 경험이다. 건강은 단순히 질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실제로 개인이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여부, 즉 기능적 역량과 관련된다. 특히 원하는 행동을 고통 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건강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의학적으로 정의된 질병의 존재 유무가 아닌, 그 질병으로 인해 어떤 행위에 제한이 생기는 지가 핵심이다. 건강은 역량과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질병 검사가 아니라 삶과 경험을 통해 확인된다.
건강은 자유다. 건강한 상태란, 내가 원하는 것을 두려움 없이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먹고 싶은 음식을 별다른 걱정 없이 먹고 원하는 활동을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상태가 건강한 상태다. 하고자 하는 일을 고민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자유다. 만성질환을 가진 사람들은 식단 등 다양한 생활 습관과 방식에 변화가 생긴다. 따라서 만성질환에 걸리기 전과 비교하면 이러한 자유가 제한된 것으로 인식된다. 건강은 시간과 경험에 따라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건강은 보상이다. 건강은 도덕화되기도 하는데 자신이나 타인에게 친절하게 행동하고 신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앞선 의미들과 달리 외적인 요인에 근거하여 건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자기 감시, 개인화된 책임, 자책 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연구진은 여기서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건강을 종교적 믿음과 연결지어 더 상위의 존재에 의존하는 것은 다양한 불평등으로 인해 자신의 건강을 통제할 수 없다는 권력 부족과 절망감의 표현일 수 있다. 이들 모두 생의학적 건강으로는 확인될 수 없는 것들이다.
건강 정책은 시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건강'을 반영하여 수립되어야 한다. 의료 전문가, 정책 전문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정책은 효과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고, 역량 강화와 참여라는 건강 증진의 가치를 담을 수 없다. 우리 삶에 소중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강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정책의 모습은 어떠할지 함께 상상해보자.
*서지 정보
Touray, T. A., Woodall, J., & Warwick-Booth, L. (2025). Health—Embodiment of Corporeal Experiences: Meanings of Health among Individuals Living with Comorbid Type 2 Diabetes Mellitus and Hypertension in the Gambia. Social Science & Medicine, 367, 117806. https://doi.org/10.1016/j.socscimed.2025.117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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