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해보니 알았다. 공화국에 산다는 것을
공화국을 이토록 사랑하는 줄 몰랐다. "파면한다"라는 말과 동시에 지금껏 느끼지 못한 기쁨 가득한 울컥함이 내 몸에 휘몰아쳤는데, 사랑의 감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치기야 수천 번이지만 'I love republic'은 장난으로도 떠올려보지 못한 조합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다 보니 고백할 만큼 절실하지 않았나 보다.
'공공의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res publica'에서 나온 단어 republic은 주권이 모두가 평등한 국민에게 있음을 뜻한다. 그 시민들은 서로의 의견을 지혜롭게 모아가는 공론장 안에서 공동체를 위한 여러 결정들을 한다. 그래서 함께 조화를 이루는 공화국(共和國)이다. 우리가 합의한 그 조화의 목적과 방향은 민주주의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맹세도 한다. 예전처럼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게 아니다. 그건 강압적 조화였다. 그 시절의 유산은 지금도 '독재자인 게 어때서? 경제만 발전하면 됐지!'라는 논리로 부유한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다운지를 내가 감시한다. 내 나라가 과연 자유롭고 정의로운지를 따져 묻는다. 공화국이 한 번도 완벽했던 적은 없지만 어제보다는 진보하는 이유다.
1978년에 태어난 나는 공화국 안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다. 1987년까지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혼돈의 시기였지만, 초등학생 내 기억엔 최루탄 냄새뿐이다. 몇 번 눈물 흘린 게 다인데, 나는 87년 체제 속에서 시민 주권을 온전히 누리는 중이다. 1초도 쉬지 않는 심장 박동처럼, 내게 민주공화국 정신은 알아서 심장 뛰는 것과 같았다. 그 심장을 윤석열이 쥐어짜는데 왜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인간이길 포기하라는 포고령의 글귀가 어찌 무섭지 않단 말인가. 따분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당해보니 알았다. 공화국에 산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이 감정, 절대 같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자유, 평등, 정의 등의 공화국 기본 개념들이 인간 본성과 매우 가까운 게 사실이지만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해석의 지평은 천지 차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지난 4일까지, 같은 본성의 다른 발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우리는 목격했다. 그걸 접하면서 기다림이 길어지니 불안했다. 유의미한 여론은 아닐 거라 믿었지만, 인권 강연에서 계엄의 부당함을 말하다가 정치적 발언이라면서 제재를 몇 번 당하니 여론의 덩어리가 제법 큰 느낌에 겁이 났다. 재판관 만장일치가 참으로 고마운 이유다.
나도 저리 될 수 있었을 거다. 태어날 때부터 원래 그런 사람이란 없으니. 나는 공화국을 정확히는 몰라도, 그게 어그러질 때 내 심신도 찌그러지는 기분을 느낀다. 민주주의가 위협받으면, 정말 아프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 감정이 있어야지만 분노하고 연대하며, 정치인을 압박하고, 언론을 감시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게 다가온 조각들, 내가 만드는 조각들
운이 좋았다. 나는 역사를 아래의 시선에서 배웠다. 잘 배웠기에 이를 민중사관이라면서 비판하는 뉴라이트의 맹공을 잘 방어했다. 특히나 일제강점기를 수탈의 관점이 아닌 '덕분에 잘 살게 되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접근하는 게 어떤 논리적 비약으로 이어지는지를 잘 알았다. 저 '덕분에' 논리는 제주 4.3을 말할 때 이승만에게 달라붙고, 광주 5.18을 따져 물을 때는 전두환에게 달라붙곤 했다. 나는 윤석열이 어찌 계엄을 할 생각을 했냐는 질문의 답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국가폭력을 부수적 피해 정도로 보았을 거다.
운이 좋았다. 나는 왜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빨리 깨달았다. 저널리즘을 지키려는 미디어의 도움이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추적한 MBC 시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회를 보게 된 건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도와서다. 1999년 9월의 어느 일요일, 당시 21세로 군 복무 중이었는데 당직 근무 중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멈췄다. 제주 4.3에 관한 이야기였다. 17세 때였던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만큼 충격적이었다. 천운인지, 함께 근무 중이던 상황병이 제주 출신이었다. 그는 말했다. 아버지에게 들었다고. 할아버지가 저 때 실종되셨다고. 이때 알았다.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세상을 비꼬아서 보는 게 아니라 은폐된 진실을 파헤쳐 억울한 사람들의 편에 선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빨갱이, 종북, 좌파, 반국가세력 등의 단어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았다. 지난 3개월을 생각해 보면, 이런 내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운이 좋았다. 나는 기계적 중립의 위험성을 말하는 교수들을 종종 만났다. 그들은 사회가 이미 기울어졌는데, 무슨 중립 타령이냐면서 꾸짖었다. 줄타기를 하다가 몸이 기울면 그 반대편으로 날갯짓을 목숨 걸고 해야 하는데, 이런 의견이 있으면 저런 의견도 있다면서 균형 어쩌고 그러면 원래 기울어진 쪽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그걸 누가 원하는지를 생각하라 했다.
이 모든 운은, 필연적으로 '연대의' 운으로 이어진다. 나는 국가의 폭력을 비판하는, 사회의 편견을 깨자는 글을 쓰면서 세상과 연대했다. 그러다 보면 서로 손을 직접 잡지 않아도 내가 광장과 연결되어 있고, 그 광장의 의미를 제대로 보도하려는 언론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많은 이들이 상식의 힘을 믿고 버틴 이유는 민주공화국을 살아가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영화 <1987>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87년의 민주화 쟁취는 자신의 위치에서 옳은 일을 선택한 조각들이 모였기에 가능했다. 독재권력은 박종철의 죽음을 덮으려다가 실패한다. 쇼크사 운운하다가 실패한다. 부검 결과를 조작하려다가 실패한다. 사건을 축소하려다가 실패한다. 어떤 기자, 어떤 검사, 어떤 의사, 어떤 정치인, 어떤 교도관, 어떤 종교인들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가 정말 천운이지만, 그 사람들의 선택은 절대 운이 아니다. 87년 훨씬 이전에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누군가의 꿈틀거림을 우연히 만났을 거다. 어릴 때는 수업하다가 갑자기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교사의 넋두리를 들었을 거고, 대학생 사촌 형의 가방에 불온서적이 들어있음을 보았을 거다. 성인이 되어서는 친구 아무개가 시위하다가 잡혀갔는데 소식이 없다는 소문을 접했을 거다. 그 우연들 없었다면, 그때 그 선택을 할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만난 우연도 다 시대의 조각들이다. 제주 4.3을 접하던 내 앞에 제주 출신의 후임이 있는 건 우연일 거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며 집안의 비극을 내게 건넨 건 우연이 아니다. 다들 감추고 살아가길 강요받던 시대에서도 그의 부모님은 감추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자신 앞의 고참이 방송을 보면서 빨갱이 어쩌고라고 하지 않은 것도 용기를 낼 이유였을 거다. 이념의 역사가 얼마나 비극인지를 알려준 역사 선생님을 내가 만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 선생님에겐, 또 다른 우연 같은 조각들이 있었을 거다.
이런 조각들이 모이고 모였기에, 나는 민주주의가 유린당하면 아프다. 느끼니, 꿈틀거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방법을 선택해 세상에 보탠다. 그 용기가, 각자의 자리에서 상식을 택하는 이들을 연결시켜 거대 악과 맞서는 광장의 힘을 완성한다. 그렇게 고비를 넘겼다. 선고문의 표현처럼 "국가 긴급권 남용의 역사"가 재현되었지만 우리는 그 역사의 조각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고, 이미 민주공화국 시민이라는 하나의 조각이었다. 윤석열은 전혀 몰랐을 거고 지금도 모를 거다. 그 조각이,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이었음을.
다시 일상이다. 오늘 하루,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누군가에게 어떤 조각으로 다가간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평론가로서, PD로서, 팀장으로서, 거래처 직원으로서, 가게 주인으로서, 손님으로서, 댓글 다는 네티즌으로서, 수다 떠는 사람으로서 등 어떻게든 '연결되어서' 말이다. 그 스쳐 가는 순간 모두가 역사이고, 그게 모이고 모여 훗날 강력한 시민의 무기가 된다. 그 뿌듯한 순간에 나의 오늘이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럴 수 있는 삶을 살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