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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박석률, '남민전' 전사들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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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박석률, '남민전' 전사들을 추모하며

[기고] 홍세화 선생의 '맑은 지혜'를 가슴에 새기며

홍세화 선생이 타계하셨다니 황망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선생의 떠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누구로부터도 들을 수 없는 '지혜의 맑은 이야기'를 더는 듣지 못하게 된 때문일 것입니다.

생전에 선생이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의 몇 가지를 옮겨 적는 것으로 추도사를 대체하고자 합니다. 이 추도사는 <말> 1999년 7월 호에 실린 '홍세화와 그의 벗 박석률이 나눈 대화'에 의존하여 작성합니다.

1999년 6월 16일 낮 광화문의 한 음식점에서 '파리의 망명객' 홍세화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전사 박석률이 만났다. 둘은 경기고의 교문을 함께 넘은 사이였다. 1979년 헤어져 20년만 재회하였는데, "이게 얼마만이냐?" 흔한 인사말도 나누지 않았다. 둘은 웃기만 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화야, 이제 보니 너도 많이 늙었다."(박석률)

한 잔 술에 불그레해진 홍세화의 얼굴에 엷게 웃음이 번졌다.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며, 말을 아끼는 법이다.

홍세화와 박석률은 '남민전의 전사들'이었다. 1978년 박석률의 권유로 홍세화는 대뜸 남민전에 가입했다. 1978년 여름 어느 날, 홍세화는 동대문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애드벌룬을 들고 걸었다. 애드벌룬으로 삐라를 살포하는 야심찬 기도였다. 물론 박정희 유신 독재를 타도하자는 삐라였다.

홍세화가 망명한 것은 남민전 때문이 아니었다. 1979년 10월, 프랑스에 잠시 체류하고 있었는데, 남민전 사건이 터졌고, '대남적화테러단'의 명단이 공개되었고, 거기에 홍세화의 이름이 들어 있었고, 이후 홍세화는 조국에 올 수 없는 불귀의 망명객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박석률은 꼬박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5년인가. 또 감옥에 들어갔다. 홍세화는 1995년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썼고, 장안의 지가를 올리는 화제의 작품이 되었다.

"나보다도 집사람이 무척 들어오고 싶어 했어. 오니까 좋다. 그런데 좀 창피해. 한 일도 없이 이름만 팔게 되었으니 말이야."(홍세화)

"구리에 있던 네 신혼집, 기억 나? 우리가 벽지 도배해주고 자장면 먹고 참 좋았잖아."(박석률)

이날 홍세화는 식당에서 '불낙전골'이 무엇인지, '생비(생고기 비빔밥)'가 뭐고 '익비(익힌 고기 비빔밥)'가 무엇인지 몰라 당황하였다. 20년 동안 변한 것은 강산만이 아니었다.

"공항에서 한강을 따라 들어오는데 서울이 참 많이 바뀌었더라. 삶의 공간은 편리하게 바뀌었는데, 인간적인 색채가 안 느껴져. 서울은 빠른데,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곳이 보이지 않아."(홍세화)

어눌하게 천천히 귀국의 소감을 피력하는 홍세화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철학의 빈곤'을 지적하고 있었다. 박석률은 동동주로 목을 축였고, 홍세화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박석률은 세 차례의 옥살이를 한 전사답게 급진적이고 원칙적인 체제 변혁을 주장하였고, 파리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들어온 홍세화는 의식의 변화와 점진적인 개혁을 강조하였다.

"난 파리에 머물면서 소외라는 걸 많이 생각했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아실현에서 소외되어 있는 거야. 생존 때문에. 지식인들, 예술가들은 소외된 삶을 사는 이들을 배려해야 해. 엄청난 사회적 책무를 느껴야 해. 소외된 삶을 강제당하는 이웃들에게 특권층들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걸 보면 나는 몹시 화가 나."(홍세화)

▲ 홍세화 전 장발장은행장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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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

<철학콘서트>, <사랑하라>, <철학의 신전>, <역사콘서트> 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는 (사) 인문연구원 동고송의 상임이사, <장재성 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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