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윤석열 대통령의 '화려한 변신'에 관한 연구에 골몰하고 있다. "통합의 정치인"이 되겠다고 한 그는 어떻게 '이념의 투사'가 됐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완성형 정치인이 아니다. 학습형 정치인이다. 관료에서 정치로 직행한 많은 정치인들이 그랬다. 그는 대선 후보 시절 '운동권 정치'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 보인 적은 있지만, 최소한 '이념형 정치인'으로 분류되진 않았다.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이로 승리한 윤 대통령은 "국민을 편 가르지 말고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간절한 호소"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취임 1년 반만에 그는 '이념'을 초고속으로 학습하고 "국가에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이념"이라고 주장하며 '반공 투사'가 됐다. 처음엔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바로잡을 통합의 정치인인 줄 알고 뽑았던 중도층 유권자들은 아주 낮선 정치인 윤석열을 마주하고 있다. 1년 반 동안 대통령직을 '경험'하면서 이것 저것 해 보더니 어느새 박근혜를 능가하는 '이념'에까지 당도했다.
사실 우린 그런 정치인을 한 명 알고 있다. 자유한국당 시절 황교안 대표다. 황교안은 관료 시절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외유내강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09년 직접 연주한 색소폰 CD를 발표해 검찰 안팎에서 '색소폰 부는 검사'로도 알려져있다(조선일보)"는 평을 받았다. 그는 보수 정당의 대표가 된 후 '이념 전사'로 거듭난다.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 "패스트트랙은 좌파독재정권 수명연장을 위한 입법 쿠데타"라고 했고, "공수처가 들어오면 자유민주주의는 무너진다"고 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왜 우리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싸워야만 합니까"라고 자문한 뒤 "(문재인 폭정으로부터) 이 위대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자답했다. 그리고 아스팔트로 나가 전광훈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투쟁했다. 결말은 모두 다 알고 있다. 대표직을 걸고 총선에서 종로구에 나가 패배했고, 당도 참패했으며, 대선 후보도 못 됐고, 정치적 부활도 요원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한국당 시절 황교안 대표 수준의 '이념'으로 지금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념 정치'를 전면에 내세운 황교안 대표가 중도 표를 흡수해야 할 보수 정당의 대선 후보가 되기 어려웠던 것처럼, 윤 대통령이 만약 후보 시절 "공산전체주의"와 투쟁을 다짐하거나 "국가에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이념", "오른쪽 날개는 앞으로 가려고 그러고 왼쪽 날개는 뒤로 가려고 그런다면 그 새는 날 수 없고 떨어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장 참모들의 질책에 선거 전략을 교정당했을 것이다. 사실 국민의힘 내부에서 나오는 '수도권 위기론'의 핵심은 이 부분에 있다. 대선을 앞둔 윤석열 후보와 총선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의 태도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2022년 이념 학습 전' 윤석열 후보가 아니라 '2024년 이념 학습 후' 윤석열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우고 선거를 치러야 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 2022년 윤석열과 2024년 윤석열이 달라져 있다는 걸. 그러나 말은 못할 것이다. 공천 때문에.
'이념 투사' 버전의 윤석열 대통령이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말하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지낸 김성태 국민의힘 중앙위원회 의장이 이런 말을 했다.
"역대 보수진영의 대통령께서 다 누구나 이런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이 평가에는 모종의 '속 시원함'이 담겨 있다. 김성태 의장의 평은 '역대 보수 대통령이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 말'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역대 보수 대통령이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있거나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특히 역사와의 대화에 골몰한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자 변제'를 추진하고,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명분을 제공하고, '한미일 동맹'의 가 보지 않은 길을 추구한다. 대만 문제에 대한 발언은 거침없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무기 지원을 시사한다. 한반도 주변 4강 국가에 관한 주요 현안들마다 불쑥불쑥 개입하고 발언하고, 과거 보수 대통령들도 차마 하지 못했던 일들을 소원풀이 하듯 해치워 나간다.
그런 사이에 러시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이 이끄는 군사대표단이 지난 7월 25일 평양을 방문했고 '무기 거래'가 의심되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은 국경을 개방하고 교류 채비를 하고 있으며,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계기로 자국 내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 미중간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한국과 북한이 모두 분쟁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애틀랜틱카운슬)는 보고서를 냈다. 미중 전쟁이 남북 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마저 점쳐질 정도로 동북아 정세는 불안하다. 한미일이 결속할수록 북중러도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과시하고 있다. 미국에 안기고 일본을 끌어들이면 북한 안보 위협이 줄어들 것이라는 가정은 틀렸다. 이건 마치 부푼 풍선을 누르는 것과 같다. 대통령이 호전적이 될 수록 북한도 호전적으로 변한다. 중국을 껴안고 러시아를 끌어들인다.
대다수 사람들 그게 육사 교정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홍범도 장군 흉상을 콕 짚어내 정치권 한 복판에 던져 넣는다. 가만히 잠자고 있는 일제 괴뢰 만주국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을 복권하겠다며 '역사 내전'을 촉발했다. 노태우 김영삼 보수 정권에서 한중 우호 차원으로 시작한 광주광역시의 '정율성 사업'에 갑자기 제동을 걸더니, 시민들이 혁명으로 몰아낸 독재자 이승만의 기념관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광복회장과 충돌한다. 공산전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나라 절반을 적으로 돌리더니, 자신이 몸담은 진영(보수)까지 가르며 나라를 '반의 반'으로 쪼개고 있다. 급기야 대통령은 "국가에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이념"이라며 "우리 모두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완벽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한다.
이게 역대 보수 대통령들이 하고 싶었던 일들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보수 진영 '일부'는 속이 시원할 것이다. 문제는 전방위적으로 전선을 확장하고 있는 이념 잔치 후에 날아올 계산서다. 고독한 결단을 연신 내리는 "완벽한 자유인" 대통령, 그는 '반의 반쪽'이 지지하는 '이념의 이데아'를 하늘에서 잡아 끌어 지상 위에 구축하려 하고 있다.
좋다. 역설적이면서 흥미롭게도 한국 보수 정권의 순수한 이념적 평가가 가능해졌다. 무대는 내년 총선이다. 기왕 '이념 정치'를 전면에 내건 김에 제대로 된 평가가 있으면 좋겠다. 이건 '체념'이 아니고 '관찰'이다. 전광훈류의 반공 이념으로 총선에서 심판을 받아보면 좋겠다. 어쩌면 내년 총선은 대한민국에서 한번 쯤 보수 진영이 완벽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치른 역대 최초의 선거가 될 지 모르겠다. 그 결과는 보수의 위기가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그는 스스로의 신념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패배한다면, 윤 대통령식 '보수 밑천'의 앙상함이 입증될 것이다.
참고로 내년 총선에 당선될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대통령의 임기보다 길다. 그리고 여당 의원들은 '정권 재창출'의 목표를 갖게 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목표가 어긋나기 시작하면 비극이 시작된다. 이건 한국 정치사의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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