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과 싸우다 보면 음모론에 잡어먹힐 때가 있다. 한 두가지의 음모론에 반박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걸 음모론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제 세계는 음모론이 판치는 거대한 '메타 음모론'적 세계로 전환된다. 이 세계 속에서 음모론과 음모론 아닌 것의 구분은 의미 없다. 이미 세상 전체가 음모론에 물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 지금 집권 세력의 풍광은 드라마틱하게 흐르고 있다. 갈등의 고조를 향해 내달리는 음모론 소설 속 주인공들 같다. 윤석열 대통령은 1년 전에 문 닫은 문재인 정부와 싸우고 있고, 대통령의 최측근들은 '대야 투쟁'을 넘어 시민단체와의 싸움에 나섰다. 그들에 따르면 네이버는 조작됐고, 여론조사는 믿을 게 못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지나오며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방역정책을 두고 "정치방역"이라고 비판하며 "합격점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의사협회의 6차례에 걸친 건의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입국을 통제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했다. 중국인 입국을 막았으면 정말 전 세계를 휩쓴 '팬데믹'에서 대한민국만 벗어날 수 있었을지 의문이나 아무튼 그건 '정치 방역'이었다. 그 '정치 방역'이 2020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에 쓰라린 패배를 안겨줬던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어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국방 정책에 대해 "정치이념에 사로잡혀 국방체계가 골병이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 '골병'을 1년 째 치료하지 못한 것은 윤석열 정부다. 아니, '골병'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데에만 1년이 걸린 모양이다.
윤 대통령 주변의 측근들 근황은 이렇다. 그가 '체리 따봉'을 보낼 정도로 가까운 장예찬 최고위원은 최고위원회의가 열리지 않은 상황을 두고 "제가 지난 며칠 동안 페이스북으로 제기한 김남국 민주당 의원 코인 의혹을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했다면 훨씬 더 파급력이 컸을 것"이라며 "민주당을 공격할 거리가 산더미 같은데 최고위원회가 휴업인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아쉽다"고 말했다. 장 최고위원에게 정치란 반대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다. '공격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하긴 이 정부가 최초의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하려 했던 인물은 "수사의 최종 목표"가 사회 정의가 아니라 "기소"라고 했다.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누가 뭐래도 '대야 투쟁'의 선봉장이다. 이젠 투쟁의 전선을 시민단체로까지 넓혔다. 참여연대가 '윤석열 정부 1년 교체해야 할 공직자' 1위로 자신을 지목하자 입장문을 내고 "민주당 정권 5년 내내 한쪽팀 주전 선수로 뛰다가 갑자기 심판인 척한다고 국민들께서 속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법무부장관이 아무런 인사권도 없는 시민단체와 말싸움을 하고 있다.
인사에도 변화가 있을 조짐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이 교체를 검토하고 있다는 장관은 세 명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박보균 장관, 고용노동부 이정식 장관, 보건복지부 조규홍 장관이다. 교체 고려 이유가 흥미롭다. <중앙일보> 편집인까지 역임한 박보균 장관은 가짜뉴스를 막지 못했고, KBS, MBC 등 공영방송의 '좌편향'을 시정하지 못했다는 게 이유라고 한다. 이정식 장관의 경우 '최대 주 69시간' 논란이 일었던 노동 개혁안과 관련해 반대 여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이유라고 하고, 조규홍 장관은 간호법 국회 처리와 관련해 여론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라고 한다.
이 모든 건 홍보 부족 탓이다. 그리고 악의적 언론 탓이다.
이런 인식은 여당의 언론관과도 맥이 닿아 있는데, 정부 여당은 갑자기 '네이버 때리기'에 나섰다.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9일 네이버에 '윤석열'을 검색하면 노출된 '관련도순' 뉴스 페이지 8페이지가 "윤 대통령 비판과 비난 기사가 도배 일색"이라고 했다. "이렇게 취임 1년 된 대통령을 향해서 비판과 비난 기사를 도배하면 이것을 본 우리 국민들이 윤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건 아마 기적에 가까울 것"이라고 한다. 이철규 사무총장은 "'윤석열'을 검색하는데 '안철수' '유승민'이 나오고 제3자가 비판하는 기사가 (윤석열 검색) 관련도순에 들어가는 것은 조작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조작 의혹을 제기다. 박성중 의원은 12일 네이버에 대해 "아무리 견고하게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을 설계한다고 한들 친 민주당 세력들이 작정하고 조작하는 어뷰징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언론의 비난 기사, '친민주당' 세력의 조작, 네이버의 알고리즘의 조작 의혹이 윤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의 배경에 깔려 있다는 인식이다. 쉽게 말해 대통령은 잘 하고 있는데 네이버와 언론이 문제란 말이다. 지지율이 낮아질 정도로 국정 운영의 질이 문제가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은 진지한 표정의 그들 앞에서 제기하기가 어렵다.
일부 여론조사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여론조사가 과학적이고 공정하지 않으면 국민을 속이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표본 여론조사는 표본 설정 체계가 과학적이고 대표성이 객관화돼야 한다. 나아가 질문 내용과 방식도 과학적이고 공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그에 앞서 "(여론조사는) 표본 추출이나 질문지 구성이나 과학적 방법인가에 대해 의문점을 갖는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참고하는 경우도, 참고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여론조사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대부분 남탓이다. 마치 대한민국 사회가 윤석열 정부를 죽이려 드는 거대한 음모론적 톱니바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음모론' 제기는 김어준 씨만 잘 하는 게 아니다. 하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미국 방문 기간 중 미 의회 연설에서 "전체주의 세력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부정하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인 양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이런 은폐와 위장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세계관은 지금 윤석열 정부 취임 1주년을 관통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그 노고를 일반인은 쉬이 짐작할 수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의 풍경을 살피면, 내년 총선 전까지 이 정부의 국정 운영 기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앞으로 있을 개각에서 문체부 장관 자리에는 가짜뉴스와 싸울 투사가, 노동부 장관에는 반대 여론도 뒤집을 수 있는 스핀 닥터가, 복지부장관에는 여소야대의 국회 현실도 뚫을 수 있는 인물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공석인 최고위원 한 석에는 장예찬 최고위원 같은 "공격"수 한 명이 더 채워질 수도 있겠다. 네이버 알고리즘 조작 의혹 규명을 위한 압수수색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론조사에서 범보수 대선 주자 선호도 1위를 달리는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정치에 뛰어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만약 한 장관이 정치에 뛰어들어 성공한다면,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검찰 출신 대통령 연속 2회 달성을 노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이 모든 게 가능하다고 생각할까?
음모론의 최종 진화 형태는 음모론에 맞선다고 믿는 자들이 '역음모론'의 세계를 창조해 스스로 그 세계에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김재원 최고위원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론'을 수입해 와 국민의힘(보수 진영)의 입장에서 재해석 한다. 나라를 전복하려는 '좌파 세력'이 사회 곳곳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해 '자유' 이념의 확산을 막고 보수의 숭고한 의지를 꺾고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 탄생한다. 눈 앞에 보이는 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으로 전선이 확장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엔 '독'이 들어 있다는 세계관. 요컨대 현 집권 세력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암울해 보이지만, 방법은 있다. 집권 세력이 음모론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객관화해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책임 정치가 아니다. 특히 취임 1년 된 시점에 '전 정부 탓'을 하는 건 유권자들에게 공감을 얻기 어렵다. 모든 문제를 '진정성을 알아봐 주지 않는 여론 탓'으로, '홍보 부족 탓'으로, 심지어 여론 플랫폼 '조작' 의혹으로 돌리는 것은 현명한 방식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지 말고, 내부 성찰과 자성을 통해 스스로를 객관화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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