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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대통령제에서 해방시키자  

[장석준 칼럼] 대통령이 '최후·최대 임무'인 국방·외교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지난 번 칼럼에서 한국형 대통령제가 도달한 말기적 상황을 나름대로 진단했다(☞관련기사 : '대통령'이란 무엇인가…총통·독재관? 거대한 무위도식자?: 제6공화국 대통령제가 도달한 궁지). 지금 윤석열 정부가 온갖 무능과 모순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윤석열 대통령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제6공화국 대통령제 자체의 문제라는 것이 글의 결론이었다.

보통 이런 진단 뒤에 붙는 대안은 정치학 교과서에서 대통령제와 대별되는 제도로 소개되는 의원내각제(더 정확히 말하면, 의회제 정부)를 채택하자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현재 우리 상황에서는 의회제 요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순수' 의회제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행 대통령제를 검토하며 무엇보다 우리가 겪어온 역사를 중요시한 것처럼, 미래 대안 역시 이 역사의 연장선에서 찾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역사에서 '대통령'이 맡아온 특정한 근본 임무는 여전히 중대한 과제이자 절박한 현안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대통령직의 어떤 요소는 어쨌든 계속 살려 나가야 한다.

그 요소란 무엇인가? 지난 문재인 정부의 궤적을 살펴보면, 이 물음의 답이 나온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제인 공화국의 대통령

문재인 정부가 무엇을 했었는지 되짚어보자고 하면, 누구든 북미 회담을 주선하려던 노력부터 떠올릴 것이다. 촛불항쟁 직후이자 새 정부 지지율이 현 윤석열 정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았던 집권 초기에 문재인 정부는 미합중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사이에 협상 테이블을 여는 데 전력을 쏟았다. 결과는 실패였고, 굳이 따지자면 올해의 정권 교체도 조국 사태나 부동산 논란 이전에 이렇게 정권의 명운을 걸었던 남북미 협상에서 실패한 탓이었다.

당시부터 적지 않은 이들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문제 올인에 불안과 우려를 표했다. 나 역시 "평화가 민생"이라는 더불어민주당의 슬로건을 비판하며 이런 입장에 함께 했다. 그 시기를 그렇게 흘려보내서는 절대 안 됐었다. 북미 간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비핵화-평화협상의 물꼬를 트는 게 참으로 중대하고 절박한 일이었더라도 촛불항쟁 직후의 개혁 민심을 살려 나가는 진지한 국내 개혁 노력이 병행됐어야 했다. 이것은 분명 더불어민주당 세력이 두고두고 비판받아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와 오판과는 별개로, 문재인 대통령의 5년 임기 중 눈에 띄는 부분이 한반도 평화나 외교 영역이었던 사정은 냉철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내 개혁에 별다른 의지나 비전이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실은 현 시기에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정말 벅차고 긴박하면서도 가장 필수적인 과제가 한반도 평화, 외교 영역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가. 문재인 정부가 빠져들었던 덫에 다시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도 문재인만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누구든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21세기도 세 번째 10년대에 접어든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의 주된 임무는 어느덧 이 작은 공화국의 생존을 놓고 강대국들과 끊임없이 교섭하고 협상하는 일이 되었다. 5년 임기를 비롯하여 헌법이 보장한 모든 권한을 오로지 이 한 가지 임무에 집중해도 시간과 역량이 모자랄 판이 되었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자질은 제6공화국 헌법이 처음 등장하던 무렵과는 크게 달라졌다.

사실 대한민국이 처음 등장하던 때에는 사정이 오히려 지금과 비슷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갑자기 연합군 관할이 된 한반도는 새로운 두 강대국에는 골치만 아픈 존재였다. 지구상에서도 유례없이 대국들이 직접 어깨를 맞대고 있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는 고마운 완충지대이기는커녕 성가신 혹에 가까웠다. 이런 지역에 독자적 주권을 주장하는 몇 천만 주민 규모의 신생국가가 등장한다면, 귀찮은 일만 더 늘어날 게 빤했다. 미국이든 소련이든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에 들어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다. 이곳에 들어설 나라는 그 존재 자체가 참으로 험난한 과제였다. 그 나라는 강대국 중 어느 한 쪽, 아니면 강대국 모두에 대해 자기가 존재해야 함을 끊임없이 항변하고 존재 자체를 힘들고 복잡한 협상을 통해 실현시켜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는 이 땅에 거주하는 수천 만 주민이 지구 위에서 안정적으로 생존권을 확보할 길이 없었다.

새 나라의 지도자란 이러한 운명을 가장 명석하게 이해하고 신생국의 인격적 대변자가 돼 강대국들과 협상에 나설 역량을 갖춘 인물이어야만 했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파 거두들이 벌인 치열한 다툼은 이러한 협상 대표 자격을 둘러싼 경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협상 대표가 갖춰야 할 비전과 방법론, 역량을 뚜렷이 지닐수록 이 경쟁에서 앞서갔고, 그렇지 못한 이들(가령 우파에서는 김구, 좌파에서는 박헌영)은 낙오했다. 또한 강대국 중 어느 한 쪽과 교섭하며 탁월한 솜씨를 보인 이들(남에서는 이승만, 북에서는 김일성)과 어떻게든 강대국 모두와 대화하며 더 자율적인 주권 공간을 확보하려 한 이들(김규식-여운형 팀)이 대립했다.

결국 38선 이남에서는 이승만이 협상 대표 지위를 독점적으로 확보했고, 이것이 새 공화국 출발의 근본 전제가 되었다. 사정이 이랬기에 협상 대표자 이승만의 지위는 어떤 식으로든 신생 국가의 헌정 구조 안에 특별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의회제 정부를 선호했던 제헌국회 다수 의원들의 의향이나 복안과는 달리 대한민국 헌법에 삽입된 '대통령'이라는 직책이었다.

이 탄생 신화는 지금도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규정하는 현실로 살아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우선 협상 대표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제인 작은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세계를 향해, 더 정확히는 강대국들을 향해 내세우는 협상 대표다. 대통령에게 맡겨진 궁극의 임무는 곧 대한민국의 존속이라는, 동북아시아에서 거의 기적과도 같은 사건을 어떻게든 이어가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엄수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 참석한 뒤 조문록을 작성하고 있다. [출처 영국 외교부 플리커 계정] ⓒ연합뉴스

21세기에 다시금 절실해지는 '협상 대표'의 임무

대한민국 대통령직의 이런 면모는 오랫동안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승만 시대 이후에는 대통령의 역할로 다른 측면들이 더 부각됐다. 지난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박정희 이후로 대통령은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국민 총동원 작전의 총사령관이거나, 역으로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교정하는 민주화를 위한 또 다른 독재관이었다. 강대국들과 교섭하며 한반도 주민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임무는 평화 통일 의제에서 남다른 비전과 역량을 갖췄던 김대중 대통령 시기에만 잠깐 다시 조명을 받았다.

이것은 이 오랜 시기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의 가장 근본적인 임무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한국전쟁 이후 미국 주도 세계 질서 안에서 대한민국의 존재와 위상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미국의 하위 동맹국이라는 지위를 전제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조율하거나 거래하기만 하면 되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는 크게 바뀌지 않았으며, 그래서 대통령이 이 위태로운 공화국에서 맡아야 할 최후, 최대의 임무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미-중 패권 대립이 격화하며 지구 곳곳에서 기존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하위 동맹국으로서 대한민국이 누리던 상대적 안정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 바로 옆에 자리한 미국 동맹국이라는 지위가 주는 긴장이 견딜 수 없이 높아지고 있고,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 시기에 풀지 못한 북한이나 일본과의 복잡한 관계는 더욱 꼬여만 간다. 게다가 대통령이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바뀌고도 미국 정부가 계속 추진하는 보호주의적 정책들은 하위 동맹국이 누리던 정치-경제적 이익 역시 급격한 재조정 대상이 됐음을 말해준다.

한반도에 자리한 작은 공화국의 존재 자체가 다시 정색하여 묻고 공들여 해명해야 할 주제로 떠오르자, 이 나라 대통령이 수행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임무 역시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직에서 다른 임무들을 모조리 회수하더라도 끝까지 남을 한 가지 임무, 즉 국방과 외교를 통솔하며 강대국들과 끊임없이 교섭한다는 과업이 도드라져 보이게 되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5000만 시민을 인격적으로 상징하며 절체절명의 대외 협상들을 총괄해야 할 대표의 운명을 짊어진 자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만큼 이런 기대에서 동떨어진 인물을 떠올리기도 힘들 것이다. 다른 자질이야 별개로 하더라도, 국방과 외교를 책임져야 한다는 점만 놓고 보면 분명 '준비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를 둘러싼 팀이 뚜렷한 비전을 갖췄거나 능력이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 정책의 방향을 논외로 한다면, 윤석열 팀은 문재인 팀의 기억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덧칠해줄 정도로 아무런 내용이 없다.

한데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져야 한다. 문제가 오직 지금 대통령 한 사람과 그 팀에게만 있는가? 대한민국의 운명이 70여 년 만에 다시금 생사존망의 시험에 마주하게 된 때에 저런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힌 것은 제6공화국식 대통령제라는 시스템이 아닌가? 국제적 협상 대표라는 역할을 가장 중요하게 수행해야 할 직책에 그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국내 양대 정당 간 권력 다툼에 따라 애먼 사람 하나를 앉혀놓은 것 아닌가?

이렇게 묻다 보면,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제6공화국식 대통령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낯설고 위험한 세계 질서 속에서 5000만 시민의 생존과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절박한 임무에 충실하도록 만들려면, 현 대통령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에 현 대통령제의 개혁은 결코, 민심과 동떨어진 채 정파의 이해에만 따른다고 치부되는 '식상한 개헌론'일 수 없다. 이는 한반도 남쪽에서 살아가는, 작지만 소중한 이 민주공화국 시민들의 생존이 달린 급박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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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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