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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은 처음이라서"…초범이니까 봐주자는 '양형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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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은 처음이라서"…초범이니까 봐주자는 '양형 사유'

[이은의 변호사의 예민한 상담소] '초범'이면 피해자 상처도 작아지나?

지난 5월 자신이 에이즈 원인 바이러스인 HIV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도 8세 친딸을 성폭행하고, 유사강간, 성적학대 등을 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남성에게 징역 12년이 선고됐다. 해당 남성의 양형 사유에는 피해자가 HIV에 감염되지 않은 점과 피고인이 초범인 점이 참작됐다. 

이처럼 성범죄 사건의 양형 사유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피고인이 해당 사건 전까지는 범죄 이력이 없다거나 동종 전과가 없다는 등 '성폭행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판결문을 통해서는 실제 '초범'이라는 사유가 재판부의 양형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없다. 그저 판결된 것보다 좀 더 중하게 처벌될 수 있었을 것이나 일정 부분 감경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뿐이다. 형벌의 목적이 단순히 응징이나 사회와의 격리와 같은 예방만이 아니라 범죄자의 교화에도 있기 때문이다.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임의적 감경 사유로 피고인의 초범이나 동종 전과 없음이 유리한 정상으로 취급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특히 성폭행과 같이 피해 사실이 중한 사건에서 판결을 접하며 이 양형 관련 대목에 상처 받는다.

ⓒ게티 이미지

한편 성범죄, 그 중에서도 성폭행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피해자들을 자극하는 변명 중 손꼽히는 것들 중 하나가 '우발적으로 성폭행을 저질렀다'라는 말이다. '우발적'이란 단어는 어떤 일이 예기치 아니하게 우연히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즉 '우발적 강간'이란 말은 우연히 강간을 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다투다가 감정이 격해져 욕설이나 막말을 한다거나 멱살을 잡는 등 물리적 유형력을 행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발적이란 말은,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전제된 상황에 영향 받아 짧은 순간 통제력을 상실하며 벌어진 일을 일컫는다. 

그런데 성폭행은 어떤가? 성폭행은 꽤나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행위자가 적어도 자신의 의복 전부나 일부를 탈의하고, 상대방의 하의 속옷을 포함하여 의복의 전부나 일부를 탈의시켜야 하며, 성기를 삽입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우발적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수준의 복잡한 행위들을 거쳐야 한다. 더구나 성폭행은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해서 유발된 범죄도 아니다. 

이 같은 이유로 '우발적 강간', '우발적 성폭행'이란 말은 그 자체가 피고인이 범죄의 책임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면서 반성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폭행이 가진 범죄는 일반적으로 '우발적'이란 변명이 통용되는 범죄들과는 다른 특성이 있다. 행위자의 '초범' 여부가 갖는 의미 역시 그러하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성폭행 가해자가 초범이라고 피해가 작아지거나 상처에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범죄의 신고율이나 기소율을 감안하면, 또 성폭행의 재범률까지를 생각하면, 피고인이 초범이라는 것이 성범죄와 다른 성격의 범죄와 같게 취급되기 어려운 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느 범죄와 마찬가지로 성폭행 사건에서 피고인이 초범이라는 것은 유리한 양형의 사유에 해당되고, 그렇게 기재된다. 피해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움은 물론인데, 이는 감정의 문제만이 아니다. 범죄마다 성격이 다르듯 양형에 참작될 사유가 똑같아야 하는지, 일반적인 양형 사유로서 참작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실제 적용이나 기재 방식이 기계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지난 주 어느 준강간 사건의 항소심 재판에서 피해자가 직접 나와 엄벌을 탄원하며 진술했다.

"저는 안전하다고 믿었던 공간에서 잠들었다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가해자는 우발적으로 강간했다고 주장하는데, 1심에서 그런 피고인이 자백했다는 이유로 초범이라는 이유로 선처하였습니다. 그게 자백입니까. 피고인이 초범이면 제가 당한 일이 달라지고 제 상처가 작아지나요?"

같은 말이라도 '아'와 '어'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치다. '피고인이 초범이라고는 하나 피해자에게 입힌 피해가 크다'는 것과 '피해자가 입은 피해가 큰데 피고인이 초범이라고 해도 피해자의 피해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피고인에 대한 판결문이 피고인만을 위한 판결문은 아니다. 관행적으로 답습되어 온 양형 사유나 기재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은의 변호사의 예민한 상담소'는 '성폭력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은의 변호사가 직접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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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의

이은의 변호사(ppjasmine@nate.com)는 이은의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이나 아래 전화로 연락을 주십시오. (평일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 02-597-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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