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O'PEN)은 신인 창작자 육성 사업이다. 2017년부터 CJ ENM이 드라마 제작 자회사 스튜디오 드래곤과 함께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신인 작가 발굴, 콘텐츠 기획 개발, 제작/편성, 비즈매칭까지 전 과정을 통합 지원한다. 올해로 6년. 그리 길지 않은 사업 기간이지만, 오펜이 배출한 작가들은 이미 방송 콘텐츠 시장에서 주목 받으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기존 기업들이 펼쳤던 메세나 활동과도 다르고, 기존 방송국들이 시행했던 극본 공모전과도 무언가 다른, 이 프로그램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바로 '연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펜의 사업은 '극본 공모전' 형태를 띈 이벤트로 시작하지만 이 이벤트의 결말은 '작품 선발'이 아니다. 작가에게 필요한 육성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콘텐츠 창작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세상에 내놓는 전방위적 인큐베이팅이 오펜 프로그램의 특징이다. 이 글은 2021년 오펜이 선발한 제5기 스토리텔러로서 겪은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작성했다. (필자)
드라마 공모전, 꿈의 관문? 통곡의 벽
CJ ENM의 창작자 지원사업인 오펜(O'PEN, 이하 오펜)의 의미 있는 도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오펜은 "작가(pen)를 꿈꾸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open) 창작공간과 기회(opportunity)를 제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CJ ENM의 신인 창작자 지원사업이다. 2017년부터 CJ ENM이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 드래곤과 함께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해마다 드라마(단막극/시리즈)와 영화부문의 스토리텔러 40여 명을 선발한다. 그리고 1년간 콘텐츠 기획 개발, 제작, 비즈매칭까지 통합적으로 지원한다. 지금까지 스토리텔러 161명, 작곡가 58명을 배출했다. (이 글에서는 신인 뮤지션을 선발, 육성하는 오펜 뮤직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많은 작가 양성 교육 기관에서, 그리고 지망생들이 모여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언제나 오펜은 언제나 ‘가장 당선되고 싶은 극본 공모전’으로 손꼽힌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콘텐츠의 예비 생산자들이 어째서 오펜을 이토록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 나름의 의견을 정리하기 전, 우선 오펜 사업의 수혜를 받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인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 대해 짧게나마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극본 공모전은 드라마 작가가 되고자 하는 지망생들에게 꿈의 관문이다. 창작 현장에서 보조적인 업무를 수행하거나 드라마가 아닌 다른 방송 영역에서 업력(業力)을 쌓아 입봉의 기회를 얻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가장 공정하고 투명하며 열린 과정으로 인식되는 것이 바로 공모전이다.
이 드라마 극본 공모전의 역사는 30년 이상을 헤아린다. KBS가 올해로 35회째 단막극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고, MBC가 창사 30주년을 맞았던 1991년에 ‘베스트극장 극본 공모’를 실시했다. SBS도 개국 직후부터 꾸준히 공모전을 개최 중이다. 유구하다고 표현하기엔 부끄러운 부분이 있겠으나, 최근 OTT의 열풍을 타고 세계 곳곳에서 위력을 과시하는 우리나라 방송 콘텐츠 생산자들의 큰 축을 이 공모전들이 담당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극본 공모전은 꿈의 관문이지만 통곡의 벽이기도 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문이라는 소문은 있는데 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K-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는 해도 연간 제작되는 드라마 편수는 130~140편정도. 기성 작가들도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꽤 고단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 이런 와중에 작가 지망생은 하늘의 별처럼 많다. 극본 공모전은 역사만 오랜 것이 아니라 쟁쟁한 경쟁률로도 유명한데, 오랜 기사를 찾아보니 MBC가 1993년 초에 실시한 극본 공모전에 접수된 응모작만 2,200여 편에 이르렀다. 이런 추세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홈페이지를 통해 작품을 응모한 후 받아드는 '접수번호'가 수천 번대에 이르러 시무룩한 경험 정도는, 모든 지망생들이 가진 기억이다.
상황이 이러니 2017년 처음 CJ ENM이 오펜의 문을 열고 첫 번째 극본 공모전을 실시한다고 했을 때 수많은 지망생들은 환호했을 것이다. 전통적인 방송국 극본 공모전은 아니지만 tvN이라는 캡티브 채널을 가진 CJ ENM이 작가들을 선발한다고 하니, 좁디 좁은 문이 조금이나마 넓어진 기분도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오펜이 2017년 첫 번째 공모전을 개최했을 당시 접수된 응모작만 3,000편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런데 오펜에 대한 시각은 사업 1년여 만에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좁은 문을 약간 넓혀준, 평범한 공모전이 아니란 사실이 체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펜을 통해 입봉하겠다"는 구체적인 꿈의 관문으로 이 사업이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펜, 작가와 생태계를 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펜이 내놓은 카드는 바로 '연결'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존 공모전들이 ‘작품’을 골라내는 과정이었다면(그래서 ‘당선작 없음’ 공고로 수많은 지망생들을 울려 왔다면) 오펜은 심사부터 육성, 최종 결과물까지 업계와 모두 공유해 역량 있는 작가를 ‘육성’하겠다는 목표를 명확히 밝혔다. 출범 1년 후 오펜 김지일 센터장이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는 이런 지향점을 명확히 하는 표현이 나온다. "오펜 작가들은 국내 드라마 시장의 '공유재'"라는 것이다. 작가를 선발하겠지만, 이들을 CJ의 사람, tvN의 작가 같은 것으로 묶어두기보다 오직 육성 플랫폼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오펜은 콘텐츠 생산의 주요 주체인 제작사와 감독, 방송 채널의 주요 관계자들이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 육성할 수 있는 열린 장을 만들고 있다. 응모작들은 제작사의 프로듀서나 대표, 감독, 기성 작가들의 꼼꼼한 심사를 거치며, 예비 작가들은 1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과의 네트워크를 쌓는다. 1년여의 공식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시점이 오면 예비 작가들은 50여 곳의 국내 제작사와 직접 비즈니스 미팅을 진행하고 계약을 체결, 신인 작가로서 업계에 첫발을 내디딘다. 이렇듯 생태계의 주체들이 긴밀히 연결되는 방식의 공모전은 지망생들에게 생소하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예비 작가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자신의 가능성이 특정 채널이나 방송국 향(向)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뜻하는 것이었다. 2020년대 들어 글로벌 OTT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며, 오펜이 방향성을 ‘제대로’ 잡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실제로 선배 오펜 작가들의 성과는 크고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오펜 1기 신하은 작가는 <아르곤>, <왕이 된 남자>로 빠르게 연착륙하더니 <갯마을 차차차>로 명실공히 글로벌 작가로 자리 잡았다. 같은 기수 박주연 작가는 각색이 아닌 자신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인 tvN <블랙독>으로 데뷔해 화제를 모았다. 오펜 2기의 이아연 작가는 넷플릭스 <좋아하면 울리는> 시즌 1, 문민정 작가는 KBS <경찰수업>을 집필했고, 3기 박바라 작가의 <슈룹>은 배우 김혜수 씨가 20년 만에 사극 드라마 출연을 알리며 기대를 모으고 있다. 4기 방소민/진윤주/김현민 작가는 티빙 오리지널 <어른연습생>으로 신고식을 마쳤다.
오펜이 배출한 신예 작가들은 지상파와 케이블, OTT 등을 넘나드는 다양한 플랫폼에서 활약하고 있다. 국내 드라마 시장에 양질의 '공유재'를 공급하겠다고 선언한 오펜의 초기 포부는 허언이 아니었다. 기업이 사회를 위해 투자하는 비용이 휘발되지 않고, 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고, 이것이 다시 기업의 이윤이 되는 공유가치 창출의 사례를 만든 것이다.
오펜, 작가와 시대를 잇다
지망생 시절, 오펜이 흥미로웠던 것은 주최 측이 작가 지망생들에게 명쾌한 과제를 제시한다는 점이었다. 많은 지망생들은 공모전 주최 측이 발표한 당선작 제목 정도를 보며 내용을 유추하고, 알음알음 대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대부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펜은 매해 당선작 작품집을 발간하고 이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게재한다. 이 작품집은 심사에 관여한 오늘의 콘텐츠 창작자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이자, 오펜이 주목하고 있는 어젠다이자, 지망생들이 고민해야 하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2017년, 오펜의 주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습"이었고, 이듬해에는 "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컬러 오브 라이프", "우리에게 곧 일어날 수 있는 일", "캐릭터" 등은 오펜이 꾸준히 제시해 온 주제들이었다. 이 속에서 지망생들은 ‘재미있는 작품’, ‘역량 있는 작가’라는 막연함에서 조금은 벗어나 과거시험장에서 시제(試題)를 받아든 선비의 마음으로 크리에이터들이 원하는 이야기에 한발 다가설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드라마 단골 소재인 사랑과 가족 이야기뿐만 아니라 치정과 범죄, 교육, 세대·계층·젠더 갈등, 소외와 죽음, 근미래 우리의 모습에 이르는 폭넓은 글감들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이 날것의 글감을 품고 오펜센터에 입성한 예비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더 생생하게, 꼴을 갖출 수 있도록 꼼꼼히 설계된 트레이닝 과정을 겪는다. 기라성 같은 선배 작가 및 감독을 멘토로 모시고 두 편의 미니시리즈를 만들어 내야하고, 방송 콘텐츠 제작의 최전선에 있는 제작사 대표와 채널 책임자, 의료계/법조계/과학계 전문가들의 특강을 쉴 새 없이 들어야 한다. COVID-19 이전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및 드라마 제작 현장, (심지어) 교도소와 경찰청에 이르는, 현장 견학이 이루어졌다. 아마 엔데믹이 선포된다면 이 견학 시스템도 다시 활발히 이루어지리라.
오펜, 작가와 세상을 잇다
오펜의 연결이 가장 화려하게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단막극 제작과 방송이 아닐까 한다. 오펜은 출범 첫해부터 당선작 중 열편을 선정, 이를 오프닝(O’pening, 옛 이름은 <드라마 스테이지>였고, 2022년부터 오프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이라는 제하로 묶어 70-90분 작품으로 제작, 방송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진 단막극의 명맥을 오펜이 잇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박노현 교수께서 「어문총론」에 기고하신 글이 적절해 그 초록을 그대로 인용해보고자 한다. <드라마 스테이지(現 오프닝)>는 ① 미니시리즈와 연속극이 주종을 이루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단막극 시리즈라는 점, ② 희소한 텔레비전 단막극 중에서 그나마 정기/정규 편성을 지향한다는 점, ③ 신인의 신작을 발굴하고 육성한다는 취의가 (반)강제하는 시의적 트렌드를 가늠케 해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오펜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매우 특별한 시대의 화두를 던진다. 넷플릭스의 <무브 투 헤븐>보다 한발 먼저 유품정리사의 일상을 다룬 <소풍 가는 날(1기, 이정민 작가)>이 세상의 빛을 보았고, 기존 드라마가 주목하지 않았던 트렌스젠더가 주인공이 되었으며(<삼촌은 오드리햅번(3기, 심보영 작가)>), 세상이 발칵 뒤집혔던 KT 통신장애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불편이 아닌 드라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통화권 이탈(3기, 한유림 작가)>). 가까운 미래, 우리의 삶이 어떤 갈등을 겪고 딜레마를 주게 될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도(<박성실 씨의 사차산업혁명(4기, 송영준 작가)>, <더 페어(4기 추현정 작가)>, <대리인간(4기, 차이한 작가)>) 의미 있었다. 그리고 2021년에 당선된 작품 중에서도 열 편의 드라마가 제작되어 방송을 기다리고 있다. 팬데믹 시대, 자가격리자가 복권에 당첨되는 ‘웃픈’ 코미디(<1등 당첨금을 찾아가세요(5기, 최시은 작가)>)와 인터섹스 성소수자 청소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XX+XY(5기, 홍성연 작가)>)가 나란히 한 무대에 올라 폭넓게, 그리고 실험적으로 시청자들을 만난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신인 작가들이 불과 1년여 만에 자신의 대본이 영상화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신인 작가뿐만 아니라 입봉을 기다리는 신예 감독과 오펜 뮤직을 통해 선발된 작곡가들도 세상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게 된다. 이 신인들이 실제 드라마 제작과정을 경험함으로써 '현장형 인재'로 성큼 성장할 수 있음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펜, 오늘과 내일을 잇다
처음 당선 전화를 받고 면접을 위해 오펜센터에 발을 들이던 순간을 떠올린다. 상암동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300여 평 규모의 창작 공간은 널찍한 회의실과 라운지, 개인 집필실로 이루어져 있었고, 먹거리마저 잔뜩 쌓여 있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마르고 닳도록 보았던 꿈의 공간이었는데 설레기보다 겁이 덜컥 났다.
나는 창작 전공자도 아니고, 수련 기간이 길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나이도 많았다.
‘날 부른 게 맞나?’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잔뜩 긴장해 면접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그 자리에서 나의 전공과 나이와 수련 기간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오펜 관계자들은 오직 내가 제출했던 작품에 집중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으며, 혹독한 1년의 양성 과정을 버텨낼 의지가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1년. 앞서 밝힌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나에게도 ‘신인 작가’라는 설레지만 무겁고, 무겁지만 뜨거운 타이틀이 생겼다. 고독하고 힘겨운 창작의 순간을 버텨낼 수 있게 한 동료 작가들이 생겼고, ‘오펜 출신’이라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고향이 생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공유가치 창출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신념이 생겼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긴 시간 기업 홍보 업무를 해왔기에 나에게 기업의 CSR, CVS 활동은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나는 1년에도 몇 번씩 사우들이 소외계층의 집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는 현장에 동행했고, 임원들이 연탄 나르는 현장을 취재했으며, 훌륭한 성과들을 집대성한 사회공헌활동백서를 수차례 만들어 보기도 했다. 꾸준한 메세나 활동의 성과로 탄생한 세계적인 예술가도 만나 보았고, 기업이 육성한 젊은 과학자와 예술가, 체육인, 기업가, 여행가 길러내는 현장에도 함께했다. 언제나 한발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사람이 처음 기업 사회공헌 활동의 수혜자가 되어 본 셈이다. 그리고 기업들이 실천하고 있는 사회공헌 활동은 기업의 철학 및 비전과 또렷하게 이어져 있을 때 비로소 사회의 발전, 미래의 풍요에 기여하고 소비자의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체감했다. 그 키워드는 CJ ENM처럼 ‘문화’일 수도 있을 것이고 과학이, 스포츠가, 교육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기업과 소비자가 더불어 융성하기 위한 진지한 성찰이 선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작가들 또한 그 사려 깊고 따스한 순간이 드라마처럼 감동적으로 빛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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