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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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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기록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함평 양민학살 사건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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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필요 없는 시를 쓴다. 짐승들의 언어를 짐승의 가슴으로 기록한다. 사람으로 남기 위하여 애써 짐승들의 발자취를 따라나섰던 정찬동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며, 내 안에 담겨있는 짐승의 숨결을 다시 쥐어뜯으며 접어놓은 책을 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p.114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아이들의 비명을 하늘만이 지켜볼 뿐이었다. 노인도 여자도 아이들도 임신한 여자도 상관없이 마을 앞으로 나오라고 해놓고 몰살시키는 군인들은 총에 맞아 죽어간 시체를 다시 확인을 했다. 군인들은 피를 흘려 쓰러진 시체를 발로 차며 움직이는 사람을 찾았다. 꿈틀거리면 여지없이 총을 쐈다.

이유도 없이 군인에게 집단 사살된 장교마을 사람들은 공비도 아니요 좌익도 아니었다. 무슨 죄가 있다고 말하거나 묻지도 않고 무조건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이 잔악한 학살행위인 줄 군인들은 모른단 말인가... 24명을 집단 사살한 군인들은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개 소대 병력은 분대별로 대열을 갖추어 달렸다.

군인들이 동촌마을 좌우에서 가운데로 포위를 하며 총을 쏘았다. 이미 동촌마을 사람들은 장교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는 총소리에 잠을 깨고 있었다. 짧은 30분간의 살인행위를 동촌 사람들은 보고 있었다.

p.121

「내 동생이 경찰이요.」 지휘관은 대꾸도 하지 않고 권총을 빼 들고 서재일을 사살했다. 군인의 아버지를 사살했던 군인이 경찰가족이라고 살려주는 일은 만무였다. 지휘관은 권총을 다시 집어넣고 군인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알리는 것처럼 힐끗 둘러보고는 남자들에게 향했다.

「들어가라.」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콩이 튀는 총성이 터졌다. 일어서서 집으로 가려고 하는 남자들에게 군인들은 집중사격을 했다. M1소총을 든 군인들은 경쟁이나 하듯이 계속 쓰러진 시체에 방아쇠를 당겼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아우성은 총소리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총알이 스쳐 조금 다쳐 일어서려고 한 사람에게 군인들은 명중시켰다. 논바닥에서 뒹굴어대는 사람에게도 여지없이 군인들은 쏘았다. 총을 맞고 죽지 않은 채 논두렁으로 기어가는 사람에게도 군인들은 사정없이 사살했다.

아버지, 남편, 형, 아저씨, 동생 등이 눈앞에서 군인들에게 집단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어도 마을 사람들은 꼼짝 않고 바라볼 뿐이었다.

p.126

12월 27일(음력 10월 28일). 날이 밝았다. 정각 8시를 기해 제5중대 병력 2개 소대가 다래기를 기습했다. 군인들은 7개 마을을 하나로 포위했다. 마을을 향해 전진을 했다. 총을 쏘아댔다. 집에 불을 지르고 메마른 짚벼늘에도 불을 질렀다.

「빨리 빨리 마을 앞으로 나오라.」

군인들이 외치는 소리에 집을 뛰쳐나온 사람들은 마을 앞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집에 있다가 발각되면 죽는다.」 학도병과 경찰들도 골목을 다니며 외쳤다. 학도병들도 집에 불을 질렀다. 사람들은 신발을 질질 끌며 쫓기는 듯이 나왔다.

p.151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양민학살의 신호였다. 「탕탕탕〜 탕탕탕〜」 구덩이에 앉아있던 3백여 명의 몸들이 걸레처럼 찢어지고 있었다.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총성은 사방에서 이들을 울부짖게 만들었다. 기관총에서 쏟아지는 총탄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3대의 기관총은 좌우로 엇갈려 사람들을 사살했다.

3백여 명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총성보다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아이고, 엄마〜 와, 억, 사람 살려, 이놈들아!」 수백 개의 비명소리는 사람으로서 들을 수 없는 노래 같았다.

군인들은 사격을 하면서 사람들을 사람들로 보지 않고 떼 지어 있는 짐승처럼 보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짐승들을 죽이는 놀음이 분명했다.

p.190

「죽을 것인가.」 군인은 대검을 뽑아서 어머니의 입에 갖다 댔다.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고개를 숙인 딸이 놀랐다. 「어머니」... 어머니는 군인의 대검에 입이 찔릴 것 같아 아무 말도 못 했다. 뚱뚱한 군인은 딸의 어깻죽지를 잡아 일으켰다. 두렵고 겁이 난 딸은 말도 못 하고 군인이 당기는 대로 일어났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하마터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올 뻔했다.

키 큰 군인은 총을 위쪽 구석에 세워놓고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 짓궂은 군인의 웃음을 피하며 딸을 향해 보았다. 뚱뚱한 군인은 딸을 방바닥에 쓰러뜨려 놓고는 딸의 가슴을 손으로 주물거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 못하는 딸은 군인의 손을 피하려고 온몸을 흔들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마음껏 가지고 놀 테니까.」 뚱뚱한 군인은 반항하는 딸에게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즐거운 듯이 딸을 가지고 놀았다.

키 큰 군인은 한쪽에서 즐기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를 강제로 눕혔다. 어머니는 반항하지 않고 어떻게든 시키는 대로 할 생각밖에 없었다. 군인들을 자극시켜서 격분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군인들이었다. 어머니는 두려움을 억지로 참고 짐승처럼 달려드는 군인에게 몸을 맡겼다.

딸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엉엉엉......」 어머니는 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일어나서 치마를 입었다. 울음소리가 나는 부엌으로 갔다. 골방문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발가벗은 며느리가 어머니를 붙들고 울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p.205

「땅땅땅......」 둠벙에 꿇어앉힌 청년들을 군인들이 사살하기 시작했다. 비명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고 있었다. 계속 울리는 총성은 자기들이 총에 맞는 것 같은 아찔한 생각이 들게 했다. 군인들은 둠벙가에 서서 계속 청년들에게 벌집을 만들고 있는 것을 장재수는 길 건너 높은 지대에서 똑똑히 보고 있었다. 「저럴 수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냐」... 「우리가 무슨 죄가 있소. 여기 밤손님은 하나도 없고, 저 불갑산으로 다 도망가 있지 않소.」... 하늘을 찌를 듯이 욕설을 외치는 키가 작고 뚱뚱한 군인이 장진섭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우리는 죄 없는 선량한 백성이요. 밤손님도, 인민군 세상도 무고한 백성을 모아놓고 죽이지는 않았소. 대한민국 국민을 대한민국 군인이 이유도 없이 무조건 죽이는 것 아니요.」

당당하게 항의하는 장진섭의 가슴에 대검이 꽂혔다. 피가 솟아올랐다. 「무고한 백성을 죽이지 말라. 5중대 놈들아!」 가슴에 피를 쏟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장진섭은 피를 토하며 외쳤다.

p.210

우리가 무슨 죄가 있느냐, 이놈들아! 항의하며 쓰러지는 비명은 억울한 메아리이기도 했다. 공산당 잡는다는 군인놈들이 선량하고 힘없는 백성만 죽이느냐 못된 군인 놈들아! 원통하게 죽어가는 아우성은 군인들을 원망하는 정의의 외침이었다. 군인들은 소총으로 쓰러져 있는 시체를 향해 마구잡이로 갈겨대고 있었다. 총을 맞고 쓰러진 다음에 꿈틀거리면 사정없이 갈겨대는 무자비한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은 시체더미에 소낙비처럼 기관총을 퍼붓고 있었다. 한 사람도 살지 못하도록 가루로 만들 작정으로 사격은 끝날 줄 모르고 있었다. 모두 쓰러져 있어도 시체를 향해 기관총과 소총은 불을 뿜었다.

p.229

소개명령을 내렸는데도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5중대며 명령불복종죄로 모평마을 사람들을 무차별 사살하는 것이었다. 살려면 쌍구룡 쪽으로 가라는 국군들의 말은 순전히 속임수였다. 살겠다고 쌍구룡 쪽으로 간 남녀노소는 군인들에게 집단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마음 놓고 쏘아대는 기관총은 움직이는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집중사격을 했다.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은 아무도 도망을 못 하고 여기저기에서 흩어져 쓰러졌다.

P.239

모평마을사건 3일 만에 소식을 전해들은 윤석환 등은 집으로 달려왔다... 마을 앞에서부터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고개도 움직이지 않고 시체를 지켜보았다. 장승처럼 빳빳하게 서 있었다. 친척들까지 말없이 서 있었다. 슬픔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보!」 며칠이면 출산을 할 아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여보! 대답을 해봐!」 윤석환은 아내 김용순(21세)의 가슴을 붙들고 소리를 쳤다. 총살당한 지 3일이 지난 아내는 꼼짝하지 않았다. 항아리처럼 부푼 아내의 배를 만지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맞은 총상은 피와 함께 얼어붙어 있었다... 친척들은 윤석환의 딸 윤명란(3세)을 떨어진 곳에서 운반하여 말없이 죽은 자기 어머니 옆에 나란히 눕혀주었다.

윤석환은 자기 아내와 함께 죽어있는 산내리 김광현의 증조모 정지족(76세) 할머니 시신을 가마니로 덮어 주었다... 윤오중은 다행히 살았지만, 아버지, 어머니, 임신한 두 누나, 생질녀 등 배속에 든 애기까지 7명의 가족을 비참하게 잃었다... 윤석환은 자기 가족과 큰집 형네 가족까지 묻고는 어머니 시체를 찾고자 논바닥을 헤맸다. 일주일을 찾았다... 10일 만에 어머니를 기왓막 안에서 찾아냈다. 윤석환은 불타 죽은 어머니 김처녀(46세)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

p.247

오전 10시경. 계동마을은 50호 가량 되는 농촌지역이었다... 마을 앞 공터에 8명밖에 안 되는 사람만 나와서 함께 앉아있었다. 50살이 넘은 할머니인데, 설마 군인들이 죽이기야 하겠느냐고 집을 지키고 있었던 늙은 노인들뿐이었다. 피란 가서 고생하는 것보다 내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백발 된 노인들이다... 군인들의 동정만 살피고 있던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총격을 가했다.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8명이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시체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피를 흘렸다. 김기복(54세), 김용길(57세)과 그의 부인 이계례(50세), 딸 김양림(14세) 그리고 김담봉(61세)과 그의 부인 박삼봉(61세), 정갑산(여, 58세), 몸이 불편한 임정현(여, 27세).,. 백발이 성성한 꼬부랑 할머니들은 공산당이요, 좌익이요, 공비요, 반란군이 될 수도 없었다. 늙은 노인들이었다. 자기 몸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들을 군인들은 서슴없이 총살을 했다.

p.249

군인들은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집중사격을 했다. 할머니들은 총을 맞고 힘없이 쓰러졌다. 이계백 어머니 안귀순은 뒤로 넘어졌다. 등에 업힌 젖먹이가 어머니 등에서 튕겼다. 충격을 받은 젖먹이는 으앙으앙 울었다. 군인들의 사격은 계속되었다. 젖먹이 같은 것은 눈에도 없었다. 총을 맞은 젖먹이는 어머니 가슴 위로 넘어졌다. 죽어버린 어머니 시체는 젖먹이가 품에 안기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작전을 완료한 군인들은 공비를 소탕했다는 전과를 올린 것처럼 당당하게 마을을 떠났다. 소재마을 앞에서 총살당한 19명 가운데 남자 안귀식은 다리불구자였다. 안귀식은 좌익을 도울 힘도 없고, 활동도 할 수 없는 병신이 아닌가... 늙은 할머니만 14명, 갓 시집온 20대 초반 여자 2명, 젖먹이와 아이 2명, 모두 힘없는 선량한 백성이었다. 「보고하겠습니다. 성대, 계동, 소재마을 지역 작전에서 공비 42명 사살, 아군 피해 없음. 이상.」 소대장은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p.255

그해 1950년 모평마을은 6.25전쟁이 터지기 전에도 불갑산에 빨치산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특공대(서북청년단 특수경찰대-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조직)에 의하여 어느 마을보다 더 시달림을 받고 살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줄뺨사건과 홀랑 발가벗고 달리기사건이었다. 툭 하면 마을사람들을 마을 앞에 모이게 하여 놓고 경찰들은 줄뺨때리기를 즐겼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아버지와 아들 딸, 어머니와 아들 딸, 남편과 부인, 노인과 청년, 남자와 여자, 형제자매 등 각양각색의 줄뺨잔치였다.

「아나 반란군!」 구호를 외치게 하고 뺨을 때리게 했고, 신발을 벗어서 신짝으로 뺨을 때리게 했다. 살살 때리다 들키면 총대와 구둣발로 사정없이 마을사람들을 때렸다... 시아버지 윤희중(48세)과 며느리 김유님(26세)이 줄뺨을 치는데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세게 칠 수가 없어서 가볍게 치는 것을 본 경찰은 며느리를 총대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두 살짜리 젖먹이 어린애를 업고 있던 김유님은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모평마을에 사는 운곡마을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한바탕 10여 명의 남자들을 두들겨 패고는 군인들은 마을을 떠났다. 남자들은 다리를 절고, 얼굴에 피를 흘리고, 가슴을 만지며 가족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p. 256

줄뺨은 그래도 좋은 편이 아니었던가. 모평마을사람 남녀노소를 모아놓고는 청년들 40여 명을 한쪽으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청년들을 발가벗겨버렸다. 발가벗은 청년들은 줄지어 해보소재지 3km 되는 초등학교까지 달려야 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하고 창피한 행동이었다. 경찰들은 즐거워 날뛰었다.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란 말인가. 경찰이 말이야. 모평사람들은 동족 살인의 전쟁이 발생하기 직전에 눈 뜨고 볼 수 없는 고통과 비통 속에서 살아나가고 있었다. 대한민국 땅에 어디가 이런 비참한 일이 있다는 것인가?

p.259

「죽고 싶어? 쏴 버릴거야」,

산모는 겁이 나 입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반항과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산모는 깨달았다.

「총을 쏴 죽여라 이놈아!」, 산모의 입에서 나오지 못하고 목 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잃어버린 산모가 되었다.

짐승이 된 군인은 송장이 다 된 산모에게 달려들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공비라고 산모를 쏴 죽이는 것이 정당한 행위였다... 산모는 군인이 자기를 어떻게 했는지조차 모르고 사지가 축 늘어진 채 맥박만 뛰고 있었다. 사람이 방안에 들어와도 반응마저 잃어버린 상태였다. 집에 돌아온 부모가 발견하고 원통하고 분하여 입속으로 분노를 토해낸 것이 그만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이 아닌 것들이야.」, 「5중대 놈들이야.」, 「처녀, 유부녀만 보면 환장했다는 소문이 언제인데.」, 「하루도 안 지난 산모를.」, 마을사람들은 악질적인 군인들을 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지. 어머니도 없는 놈들일 거야.」

마을사람들은 자기들이 당한 것처럼 슬픔에 잠기고 있었다. 산모의 강간을 상상해 본다면 지긋지긋한 몸서리를 칠 뿐이었다.

「우리들이 모여 있으면 좋지 않아. 집으로 가세.」, 「군인들에게 오해를 살 수가 있어.」, 「위로를 할 입장도 못되네 그려.」, 「그래요. 우리 그 산모를 위해 모른 척해야 해.」, 마을사람들은 이 사건을 모두 모른 척하기로 했다. 이 사실을 마을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군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총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288

그리하여 보병 제11사단은 1950년 10월 4일부터 3월 30일까지 180일 동안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을 완료하고 4월 6일 전주에서 대구로 복귀했다. 제1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는 1951년 2월 19일부터 2월 22일까지 3일 동안 불갑산 공비토벌작전을 완료하고 350여 명의 공비를 격멸했다는 전과를 발표했다.

제2대대 소속인 제5중대는 1950년 10월 22일 밤 함평에서 전지를 구축하고 1951년 2월 22일까지 4개월 동안 월야면 장교, 동촌, 다래기, 외치와 해보면 성대, 모평과 나산면 계동, 소재마을 8개 지역 주민 천여 명의 남녀노소 양민을 학살한 비극을 남기고 불갑산 공비토벌 후 원대복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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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의 일이니, 날뛰었던 짐승들이 구순에 이르렀거나 두 눈 동그란 짐승들의 새끼를 치고 흙으로 돌아갔을 나이, 책임질 테니 맞지 말고 일단 때리고 보라며 살뜰히 기른 짐승들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제 손으로 국회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선출하여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른다.

※ 1950년 10월 22일부터 1951년 2월 22일까지 4개월 동안 함평군 월야면 장교, 동촌, 다래기, 외치마을과 해보면 성대, 모평마을 그리고 나산면 계동, 소재마을 등 8개 지역에서 1000여 명의 민간인들이 군인들에게 학살당하였음.

▲ 함평군 월야면 달맞이공원의 함평양민학살위령탑. ⓒ박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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