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2022년 1월 11일, 정당 가입이 가능한 연령을 만 18세(정확히는 '국회의원 선거권을 가진 사람')에서 만 16세로 하향, 18세 미만인 사람이 정당에 가입할 때 법정대리인의 동의서를 함께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의 '정당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정당 가입에 있어 청소년에게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청소년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활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부모가 허락해야 하는 정당 가입'이 국회에서 정해지는 상황을 목격하며, 몇 년 전 청소년이었을 때 정치적 권리가 온전히 보장받지 못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나의 정치 참여를 가로막던 부모님
2016년, 나는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재학 중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는 무리가 있어 이 사실을 부모에게 이야기했다. 나의 정치 성향과 부모의 정치 성향은 달랐기에 부모는 내가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에 반감을 표했다. 시민 대다수가 참여하는 집회여서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지만 결국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청소년이 집회를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부모에게 꾸중을 듣곤 했으며, 그런 압박 속에 내가 바라는 정치의 모습을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들은 청소년인 내가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는 '부모님이 훌륭하시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청소년인 나의 정치 활동은 주체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부모에게 교육을 잘 받아서' 또는 '부모의 응원과 지지를 받으며' 부모와 비슷한 성향의 정치 활동을 하는 것으로 비추어진 것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의 정치적 입장은 그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주변 환경, 특히 부모 등 보호자의 영향을 흡수한 결과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대개 청소년이 가정에서 정치와 관련한 영향을 많이 받는 위치에 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보호자와 청소년의 정치적 견해가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위한 운동에서 주로 마주하던 반대 논리는 "청소년은 어차피 부모를 따라 투표할 것이고, 주체적 판단을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정치/사상의 자유를 요구할 때, 국회는 "청소년이 정당에 가입하려면 부모의 허락을 받으라”라고 답했다. 결국 청소년 참정권을 반대하거나 주저하던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충분히 주체적이지 못할까 걱정하기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청소년은 주체적이지 않기를 바라기에' 반대했던 것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허락이라는 조건이 붙은 채로는 정치적 권리가 온전히 보장될 수 없다. 오히려 가정에서 정치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법 개정은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정치적 권리를 잘 행사할 수 있도록 돕기보다는, 청소년들의 주체적 정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청소년의 정치 활동에만 들이대는 이중잣대
정치의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설득하고 토론하고 싸우며 모두를 위한 제도, 법, 사회의 모양을 만들어 간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사회에서는, 이 과정에서 적어도 서로에게 강제력이나 위력을 이용해서 정치적 사상을 강요하거나 금지하지 않을 거라는 상호 믿음이 존재한다. 인신공격이나 흑색선전, 근거 없는 비방이 난무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의 장면들이 펼쳐질 수는 있을지언정(이를 권장할 마음은 없지만), 누군가의 정치적 활동을 '허락'할 권한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시민이 동의해주어야만 누군가가 정당에 가입하고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 여기서 청소년이 예외라는 것은, 곧 청소년에게는 정치적 자유가 없다는 말과 같다.
청소년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보호자로부터의 경제적, 공간적 독립을 꾀하기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 현실적으로 그렇고, 노동법이나 민법과 같은 제도들이 가로막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 등 보호자가 청소년에게 휘두를 수 있는 위력이란 어찌나 무궁무진한지. '용돈 끊기'부터 "내 말 안 들을 거면 내 집에서 나가”까지, 청소년들은 정당 가입 동의서라는 족쇄가 있기 이전에도 삶의 대부분이 부모나 보호자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기에 정당 가입에 동의서까지 받으라는 이야기는 청소년의 정치 활동을 보호자의 통제하에 귀속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소리이다.
혹자는 청소년이 정당에 가입할 때 보호자의 동의를 받는 것이 청소년들이 정치 세력에게 '이용당하는/세뇌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당 정치는 정당이라는 형태로 비슷한 정견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본질이다. 청소년이 어떤 정당의 방향에 동의하고, 그 정당과 정치적 목소리를 함께하겠다는 것이 '이용당하는' 것일까? 보호자가 동의하는 곳이면 괜찮고,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는 곳이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보호자가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위해 자녀를 동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데 있어 서투른 사람이나, 이해도가 높지 않은 사람들은 비청소년들 중에도 무수히 있다. 그런데 왜 사회에서는 유독 나이 어린 사람들의 정치적 행동에만 보호자의 동의와 허락이라는 통제 장치를 두려고 할까? 청소년에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청소년들의 정치적 미숙함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을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이래서 청소년들은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청소년들을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주인은 실수로 식기를 깨트려도 괜찮지만, 노예나 하인이 같은 실수를 하면 잘못이 되는 것처럼, 정치적 권리를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조금 나눠준 시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정치적 권리는 특별히 유능하고 똑똑하고 능숙한 사람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미숙하고 실수 많고 별 생각 없는 사람들, 심지어 폭력적이거나 차별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마저도 평등히 나눠 가지는 권리이다. 그런 사람들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선거권의 행사이든 정당의 가입이든 무수한 정치적 행동에 대해 누구도 '사전 자격 검증'을 요구받지 않는다. 이제 정치에서 '나이'라는 추상적 자격 검증의 선을 지울 때가 되었다. 정당 가입에는 보호자의 허락이 필요치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이를 가지고 정당 가입과 선거운동을 제한하는 법률 자체를 없애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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