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때문에' 나는 태어나고 학창시절을 오롯이 보낸 옥천으로 왔다. 사실 대전에 살 때는 옥천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지역신문에서 일하고 싶어 선뜻 찾아갔다. 대전과 옥천 사이 시내버스가 다닌다는 것도, 이렇게 가까이에 논밭이 있는 농촌이라는 것도 몰랐다. 도시 변두리에서 나름 익명성과 관계성을 동시에 누리고 살았던 삶은 성장할수록, 그리고 도시로 개발될수록 관계성이 줄어가고 익명성은 그만큼 커졌다. 그나마 쉼터 같은 논밭이 사라지고 도랑이 복개되고, 골목길이 확장될 무렵, 사람들은 그것을 '개발과 발전', 또 '성장'이라 불렀다.
그 무렵 나는 옥천에 넘어왔다. 다들 '서울로, 서울로' 갈 때 옥천 작은 마을로 향했다. 사명이라거나 흔히 말하는 '하방'이니, '귀촌'이니 하는 말로 연결 짓지 않았다. 거창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보다 정말 자연스러운 이사였다. 그냥 조용히 스며들었다. 지역과 아무런 연고 없는 초짜 기자에게 지역 주민이 보여준 관심은 따스했고 고마웠다. 먼저 말 걸어주고 기사에 대한 조언과 반응을 아낌없이 나눠줬다. 물론 거기에는 희로애락이 저마다 다른 분량으로 들어있었지만 대체로 좋았고 행복했다.
가기 전 그렸던 작은 언론에 대한 희망과 상상이 그대로 펼쳐졌다. 어긋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어딘가에 내가 쓸모 있다는 게 되레 고마웠다. '서울 기자'가 전혀 부럽지 않았다. '촌 기자'로서 자존감과 긍지가 있었다. 함께 호흡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즈음 대전과 옥천이 거의 같은 면적이고, 인구가 한쪽은 150만 명이 넘고 한쪽은 5만 명 남짓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거점 도시와 시골 농촌 차이를 온몸으로 느꼈다. 기실 나는 괘념치 않았다. 대전에서는 150만 명 가운데 1명이지만, 적어도 옥천에 있을 때는 5만 명 가운데 1명이고, 청산면에 있을 때는 5000명 가운데 1명, 안남면에 있을 때는 1000명 가운데 1명으로 존재감이 확 살았다.
지역신문 기자의 가장 큰 강점은 결코 주민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타자화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 신문사에 들어갔을 때는 잠시 대전에서 출퇴근을 했었는데, 자동차 대전 번호가 부끄러웠다. '왜 대전 사람이 옥천 와서 옥천 취재를 하지?'라고 주민들이 직접 물어보지 않았지만, 스스로 약간 창피했다. 얼른 이사를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역 한 구성원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함께 만나고 이야기하며 번지고 싶었다.
인구 5만 명 남짓 농촌에서 지역 언론 역할과 책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제보가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늘 신문을 기다렸다. 스스로 유료 구독하는 부수가 나날이 늘었다. 신문을 보고 싶어 훔쳐보는 사람도 있었다. 옥천 사람들은 <연합뉴스>와 <한겨레>는 몰라도, JTBC와 <뉴스타파>는 몰라도 <옥천신문>은 알았다. <옥천신문>이 28년 동안 주민들과 피땀 흘려가며 함께 일하고 숨 쉬었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환대받았다. 물론 비판하는 신문 논조 때문에 경계하고 싫어했던 주민들도 있었다. 학교도 정말 작고 몇 개 없어 취재 과정에서 아이들 이름을 기억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봐왔다. 청소년 기자단을 운영하면서 꼬맹이들이 어른으로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작은 기쁨이었다. 어렵게 사는 친구들과 주민들도 많이 봐왔다. 개인 차원 지원보다 어떻게 체계 있게 건사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와 적폐도 봤고 기사로 써서 일부 개선되기도 했다. 그 과정은 사실 상처이자 기쁨이다.
익명성이 거의 없어지고 관계성이 늘어나면서 살아갈수록 편하면서도 힘들기도 했다. 연(緣)은 계속 늘어나고 쌓이는데, 날카로운 기사들은 그들을 또 아프게 했다. 더러 상처받을 때마다 스스로 보호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늘 멀지도 늘 가깝지도 않은, 사람을 사귈 때 그렇게 적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지역에 살다 보니 내가 어디 사는지, 아이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사실 큰 부담이기도 했다. 신문 나오는 금요일 아침이면 신문 기사를 보고 욕설하거나 항의하는 전화도 많았다. 금요일마다 희비가 교차했다.
지역에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대상화하지 않고 스스로 함께 생활을 일궈나가는 것이다. 몸을 푹 담그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면 그 격차가 갈수록 커져 '괴물'이 되곤 한다. 나는 농촌에서 농촌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농촌의 수많은 담론과 이야기들이 지역 농촌에 살지 않으면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채 오가는 말들이 불편하다. 자그마한 '혐오'나 '환멸'이 들곤 한다. 현장과 실정에 맞지 않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무책임하게 내뱉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배운 사람들이 많아 목소리가 더 커지고 뭉쳐지지만, 지역 농촌은 목소리를 낼 사람조차 줄어들어 더 쪼그라들고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지역에 산다는 것은 함께 부대끼며 일상을 사는 것이다. 다양한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까지 기꺼이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본다. 마찰음과 파열음이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지역에 산다는 뿌리 의식이 있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아도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느끼며 산다는 공유의식 정도는 있다.
수많은 도시 전문가들이 옥천에 와서 컨설팅을 한다고 수억짜리 사업을 집행하고 사라졌다. 상도 타고 언론에도 이름이 나기도 했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폐허가 됐다. 잠시 옥천이란 공간을 그들이 사유화한 셈이다. 그래서 뛰어나고 유능한 도시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 오랫동안 진득하게 지역에 산 사람을 믿는다. 그래서 깨달았다. 못해도 어설퍼도 엉성해도 지역에 사는 우리가 하는 게 맞다. 그럴싸하게 만들지 못해도 함께 얼굴 마주하며 하는 사람이 맡는 게 낫다. 최소한 책임을 지니까.
지역 농촌에 오지 못하는 것은 여러 얽힌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주의 방향이 편중돼 있고 어떤 경향성을 보인다면, 더구나 돈과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성을 보인다면 이는 분명한 정치의 실패이다. 그것을 방조 방임하는 것은 비정상이고 이 나라를 망치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지역 농촌으로 많이 오면 참 좋겠다. '자치'하기 참 좋은 곳이고, '자급'하기 참 좋은 곳이다. 조금만 몸을 움직거리면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날 수 있고 조금만 마음을 모아내면 적지 않은 민주주의 성과도 낼 수 있는 곳이다. 정말 우리가 주인이 될 수 있다.
방금 전화가 왔다. 옥천 사람들 웬만큼 아는 유명한 농업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부고 기사 좀 써 줄 수 없냐고, 옥천의 50∼60대는 웬만큼 그의 제자였다고, 다양한 기억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얼마 전에는 청양고추 농사를 잘 지었다고 와서 사진 좀 찍어주면 안 되겠느냐고 전화가 왔다. 최근에는 양심선언 하겠다는 복지관 노동자가 밤늦게 찾아왔다. 민감한 제보들은 옥천이 아닌 영동과 보은, 대전에서 만나기도 한다. 정말 시시콜콜한 일부터 권력형 비리와 부조리까지 제보의 갈래와 영역은 참 넓다.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6시 내 고향>도 가끔 보고 <1박 2일>도 본다. 지역 농촌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조각나 있고 대상화돼 있는지 보게 된다. 조금 꼬아보면 마치 구경꾼이 보듯 하나의 선입견으로 덧씌우는, 선하게 접근하는 듯하면서도 온갖 편견이 다 들어있다. 볼거리와 음식을 극대화하고 도시 사람 눈에서 시골 농촌의 일상을 하대하는 태도가 눈에 보인다. 미디어의 폭력이다.
꿈꾼다. 서울 대도시 문화가 지역 곳곳에 내리꽂히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마다 독특한 자연생태와 지역사회가 함께 조응하며 다양한 문화가 밑에서부터 올라왔으면 좋겠다. 지역 가수와 연극, 영화인들이 지역에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고, 굳이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웃고 즐기면서 생애를 마칠 수 있는 지역을 꿈꾼다. 지역 매체가 지역을 담아내고 기록했으면 좋겠다. KBS가 언론개혁 막바지에 와 있고, MBC가 정상화되었다고 한다. 정말 제대로 정상화가 되려면, 방송사 주요 뉴스 프로그램에서 지역 사투리로 지역 일이 나왔으면 좋겠다. 옥천이란 시골에서도 수신료를 내는 만큼 방송국이 있으면 좋겠다. 이 국가가 더 이상 일방통행과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더 다채로운 지역을 담아내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연방제를 꿈꾸고, '옥천 코뮌'을 바라본다. 그 옛날 수많은 작은 나라의 연맹체였던 금강 언저리의 읍락국가 마한을 바란다.
2002년 옥천에 <옥천신문> 기자를 하러 올 때는 시골 경로당에 들어가 할머니 손을 붙잡고 조곤조곤 이야기 들어주는 일을 그리곤 했었다. 함께 고구마 나눠먹고 부침개 부쳐 막걸리 한잔하면서 이야기 들으면 참 행복할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지역 아이들이 자라 지역에서 터를 잡고 일하면 좋겠다. 학교를 마치고 지역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난다. 아직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친구들 디딤돌이 되어주고 싶고 함께 사는 동반자가 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내 동료들, 비슷한 일상을 사는 신문사와 잡지사 젊은 친구들이 제대로 자리 잡아가길 소망한다. 대부분 타지에서 와서 옥천 사람이 된 친구들이다. 나보다 더 선한 의지와 열정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그 친구들이 제대로 뿌리내리길 소망한다. 그런 지역에 사는 것이 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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