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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시대와 무한경쟁시대, 그리고 정운찬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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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시대와 무한경쟁시대, 그리고 정운찬 총리

[이정전 칼럼] 그는 '행복의 역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상당히 오래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교수휴게실에서 경제학과 교수들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대하여 한담을 하고 있었다. 선배 교수들 앞에서 어느 중진 교수 왈, "1960년대 초반 저희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한 학기 내내 담당교수 얼굴을 한두 번밖에 보지 못하는 강의가 여러 개 있었지요." 옆에서 바둑 두고 있던 한 노교수가 불쑥 대꾸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세. 내가 대학 다닐 때는 개강하자마자 학기말 고사를 치고 종강하는 과목이 여러 개 있었다네." 옆에서 바둑 구경하고 있던 노교수가 끼어들었다.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그려. 나는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는데,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신청서를 냈더니 행정실 직원이 몇 학년으로 복학할 거냐고 묻습디다."
"그래,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나야 그때 이미 교수가 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착실히 공부 좀 해보려고 솔직하게 2학년으로 복학한다고 말했지. 근데 같이 갔던 친구 녀석들은 모두 4학년으로 복학한다고 말합디다."
"그래서 그분들은 4학년으로 복학하셨나요?"
"아무렴. 그래서 입학 동기였던 녀석들이 졸업할 때는 졸지에 2년 선배가 되어 버렸지."

우리에게 이런 엉성한 시절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얼마나 여유작작한가. 아마도 지금의 6·70대 분들은 그때 그 시절을 애틋한 마음으로 아스라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엉성하던 시절에 엉성하게 교육을 받았지만, 이분들은 자신들이야말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에 걸친 대한민국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끌어낸 주역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고도성장도 어디 보통 고도성장인가. 인류역사상 전대미문의 고도성장이라고 한다. 한 때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6·70대 분들이 사회 요로 요로에서 눈부시게 활약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분들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훨씬 더 쫀쫀한 교육을 받은 지금의 3·40대들이 우리 경제의 제1선에서 뛰고 있는데, 어찌해서 우리 경제는 이렇게 지지부진한지 이분들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기업가들은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직장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푸념하면서 대학교육의 체질개선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바뀌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의 6·70대가 교육을 받고 한창 경제 일선에서 뛰던 낭만시대에는 열심히 뛰기만 하면 웬만큼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제성장의 혜택도 무척 컸다.

우선 일자리가 거의 무진장 창출되었다. 시골에서 밥이나 축내던 젊은이들이 몽땅 서울로 올라왔다. 100만도 안되던 서울의 인구가 금방 600~700만으로 늘어났다. 서울은 블랙홀처럼 계속 인구를 빨아들였고 그것도 모자라 경기도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여 드디어 오늘날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가까이 서울과 경기도 지역(소위 수도권)에 밀집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수도권비대화가 우리 사회의 큰 골칫덩어리가 된 지 오래지만 어떻든 이는 낭만시대 경제성장의 일자리창출 효과가 남긴 후유증이다.

경제성장의 결과 소득수준도 급속히 높아지면서 모든 국민의 경제사정이 크게 좋아졌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피를 팔려고 병원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긴 행렬이 어느새 옛일이 되어 버렸고, 봄철만 오면 으레 서민들을 괴롭히던 보릿고개도 사라졌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보릿고개가 무엇인지도 잘 모를 것이다.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혜택은 빈부격차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경제성장의 혜택이 전 국민에게 비교적 널리 퍼졌고 그러다 보니 사회통합이 잘 이루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에 따라온 국민이 큰 희망을 가지고 똘똘 뭉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물론, 독재에 항거하다 희생당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삐딱하게 굴지 않는 한 대체로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요컨대, 낭만시대의 경제성장은 일자리 창출, 소득수준의 향상, 사회통합 등 세 가지 측면에서 매우 큰 효과를 가져왔다. 말하자면 경제성장의 약발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낭만시대가 서서히 걷히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사회 각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고 각박한 삶이 펼쳐졌다.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른바 '무한경쟁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요즈음에는 대학에서도 휴강을 하면 곧장 보강계획서를 내라는 통보가 떨어진다. 강의시간을 꽉 채우지 않고 일찍 끝내면 불평하는 학생도 있다. 단축수업을 너무 자주 하면 인터넷에 비방의 글이 뜬다. 영어로 강의하는 교수도 많아졌다.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

무한경쟁시대에 접어들면서 경제성장의 약발도 크게 약해졌다. 비록 경제성장률 자체가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한두 해를 빼고는 우리나라는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엄청난 무역흑자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난 10년 가까이 고용 없는 성장을 속수무책으로 쳐다보고 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무한경쟁시대의 경제성장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지 못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기업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산성 향상이 필수적이다. 생산성을 높이는 한 가지 방법은 소수 정예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유능한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 모두 함께 열심히 일만 하면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지만 무한경쟁시대에는 오직 유능한 사람들만이 모여서 일해야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 결과 경제성장도 달성할 수 있다. 낭만시대에는 유능하지 못한 사람들도 일자리를 얻어서 그런대로 먹고 살 수 있었지만 무한경쟁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은 거치적거릴 뿐이니 실업자가 될 따름이다.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또 한 가지 현실적인 방법은 노동절약적 생산방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첨단장비와 첨단기술로 무장하고 있다. 그래서 높은 생산성으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일자리를 많이 내놓지는 못한다. 고용을 현저히 늘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번창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진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경제성장이 계속되더라도 고용은 늘어나지 않는다.

경제성장을 이루어야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신자유주의자나 관료들이 강변하고 있지만 지난 10년 가까이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통계숫자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소위 소득5분위배율(상위 20% 소득계층의 총소득을 하위 20% 소득계층의 총소득으로 나눈 값)이 1997년에 4.09이었는데, 1999년에는 5.13으로 높아지더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에는 무려 8.67까지 훌쩍 뛰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10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최고 부자 20%가 최고 가난뱅이 20%에 비해서 5배 정도 더 잘 살았는데 이제는 거의 9배 더 잘살고 있다는 얘기다. 경제성장은 계속되고 소득수준도 높아지는데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결국 잘 사는 계층만을 위한 잔치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사회통합이 잘 이루어질 리가 없다. 노사분쟁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분쟁이 빈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의 갈등지수는 OECD 30개 국가 중에서 터키, 폴란드, 슬로바키아에 이어서 네 번째로 높고 OECD 평균보다 월등히 높다.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1인당 GDP의 27%에 이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소득분배의 양극화 배경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가 작용하고 있어서 더욱더 심각하다.

고용효과도 없고 분배개선효과도 없다고 하면 경제성장의 혜택으로 우리 손에 남는 것은 이제 소득수준의 향상뿐이다. 그러나 소득수준의 향상 그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소비를 많이 하게 되고 그러면 더 행복해진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소득수준의 향상이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선진국들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1인당 소득이 대략 2만 달러를 넘어서면 그다음부터는 소득수준이 높아져도 국민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았다. 미국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으며 독일이 그랬다.

지난 반세기 동안 거의 예외 없이 선진국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에 행복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행복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도 이제 막 2만 달러대를 턱걸이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지속적 경제성장의 결과 소득수준이 높아지더라도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환경오염 및 환경파괴만 심화시키고 지구온난화만 재촉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하는 그런 경제성장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요컨대, 낭만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무한경쟁시대의 경제성장은 고용증대, 빈부격차 완화, 행복지수의 향상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시원하게 보장해주지 못한다. 시대가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위정자 중에는 아직도 낭만시대의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인사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도 낭만시대에 크게 기여하고 성공한 정치인이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은 낭만시대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여권의 실세들은 낭만시대처럼 그저 밀어붙이기만 하면 모든 일이 척척 잘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경제성장 정책도, 국회 법안도, 4대강 사업도 밀어붙이기 식 일변도다. 낭만시대라면 4대강 사업과 같은 토목사업이 일자리도 많이 창출하고 소득창출을 통해서 다른 산업에 큰 파급효과를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토목사업도 고도의 장비와 첨단기술을 장착하고 있다. 그러니 고용효과가 크게 나타날 턱이 없다. 낭만시대에나 통할 법한 방법을 무한경쟁시대에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에서 여권의 실세에게 무조건 무한경쟁시대에 영합할 것을 요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을 직시해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사실 선진국에서도 무한경쟁시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서서히 터져 나오고 있다. 무한경쟁은 스트레스를 낳는다. 현대인은 스트레스를 끼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스트레스는 우리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우리 신체의 면역력을 약화시킴으로써 몸을 병들게 한다. 스트레스는 행복의 가장 큰 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행복을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무한경쟁시대에 무조건 영합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늘리고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 정운찬 총리는 낭만시대를 성공적으로 지낸 인물이다. ⓒ프레시안 최형락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드디어 총리에 임명되었다. 비록 그에 대한 청문회가 의혹투성이로 끝났지만 시대착오에 빠져 있는 여권에 무언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을 기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정운찬 총리도 낭만시대를 성공적으로 지내온 인물이다. 아마 그도 낭만시대의 사고방식에서 그리 자유롭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4대강 전신인 한반도대운하사업에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점, 그리고 그의 과거 언행으로 보아 낭만시대와 전혀 다른 세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그가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고용을 중시하는 케인지언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고용 없는 경제성장이 왜 지속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행복의 역설을 믿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인정은 하는 것 같다. 그가 낭만시대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여권의 실세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방식의 경제성장을 구상해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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