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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밥상은 곧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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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밥상은 곧 그 사람이다

[함께 사는 길] 식탁, 숲에서 범을 만난 듯 조심해야 하는 곳

살아보니, 눈(眼)이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눈은 안은 못 보고 밖만 보게 되어 있죠. 그래서 내 눈에는 내 몸도, 다른 사람의 몸도 분명 개별적 신체, 낱낱의 신체이고, 책이나 가구처럼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로 보이지요.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명사적 사유'가 가능해집니다. 달리 말해, "내가 귤을 먹는다"는 문장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하지만 내가 생명체인 한, '나'는 이런 식의 사유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내가 나를 알려면, 우선 나는, 내가 지니는 두 가지 '생존의 취약성'부터 알아야 해요. 어떤 취약성일까요?

산다는 것

하나는 공간적 취약성입니다. 물과 적절한 수질 환경이 있어야 어항 속 물고기가 살 수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오직 특정한 환경에 놓일 때만 살아갈 수 있죠. 하지만 이 환경은 텅 빈 곳이 아니라 일정한 생명의 물질이에요. 인체의 65퍼센트는 산소 분자인데, 그래서 산소 없는 곳에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항 속 물고기는 일정한 때 물을 갈아주지 않거나 먹이를 주지 않으면 죽고 말아요. 나 역시 같은 운명이지요. 이것이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시간적 취약성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인체는 수십조가 넘는 체세포의 군집이자 약 100조에 이르는 미생물의 군생지이지만, 이 공간도 오직 시간을 이겨낼 때에만 비로소 가치가 있죠.
인체가 시간을 이겨낸다는 것.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체가 부단히 재조립, 재생산된다는 것이에요. 피부는 3주 만에, 손톱은 10개월 만에, 간은 1년 만에, 지방은 8년 만에, 뼈는 10년 만에, 근육은 15년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생되지요. 세포가 재생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나'라는 유기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한시적 재생 활동체이에요. 그것도 미생물들의 공생지로서, 미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재생 활동체입니다. 하지만 이 재생은 외부와의 '접속' 또는 '외부의 내부화'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pixabay.com

'보생(補生)'이라는 개념은 이 '외부의 내부화' 과정을, 그리하여 내 몸과 삶의 실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긴요합니다. 언뜻 어렵게 들리지만, 보생은 사실 쉬운 말이에요. 생명이 생명으로서의 공간적·시간적 취약성을 이겨낼 수 있도록 보충해주는 '외부'가 바로 보생이니까요. 인체는 다른 생명처럼 오직 보생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으로 재성립됩니다.

세포가 생명 활동을 하고 또 재생되려면, 에너지원인 ATP가 재생산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세포에 (보생인) 당과 산소가 늘 공급되어야 해요.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은 지 약 4주 후부터 뛰기 시작하여 관에 들어가기까지 우리 심장은 쉼 없이 뛰죠. 왜 뛸까요? 당과 산소를 (혈관이라는 채널을 통해) 세포로 공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심장은 보생의 공급을 위해서 뛰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그건 성취한다는 것, 기여한다는 것 이전에 보생의 공급을 계속 받는다는 것, 보생을 통해서만 산다는 것, 보생과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창조는 종이 위에서 시작되지만, 종이 위에 무언가 적는 정신이란 보생의 공급으로 지속되는 뇌(신경)세포의 활동과 동일하죠. 단백질, 나트륨, 물 분자 따위를 취합해 정신 활동으로 귀결케 하는 시스템도 분명 인체에 있지만, 이 시스템 역시 이런 것의 생산, 그리고 그 생산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전혀 작동하지 못해요. 나는, 피유차유(彼有此有), 저것이 있어 이것이 비로소 있다는 생명의 진리가 발견되는 현장입니다.

저 생명이 죽고 내가 살아야 할 당위가 있는가

'접속'을 달리 말하면, '공생(共生)'이에요. 철학자 니콜라스 하르트만은 '접속'이라는 자유의 조건이 '의존'이라 했지만, '의존' 말고 '공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나는 산소를 빼앗으며, 귤나무의 귤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산소와 더불어, 귤나무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내 삶'이 먼저 있고, '더불어 삶' 그다음에 있는 것 같지만, 정반대이지요. '더불어'가 없어지면 '내 삶'은 소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이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과 산소의 공급을 당연시하기 때문이고, 우리의 생존을, 식 행위를, 자기 성취를 위한 타 생명 섭취 행위를 하등 문제가 될 것 없는 행위로 당연시하기 때문이죠. 결국 '나'와 '인간'을 지나치게 높게 세워놓고 삶을 바라보는 겁니다.

이 당연시를, 이 오만을 포기하면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가지게 돼요. '저 생명이 죽고 내가 살아야 할 당위가 이 우주에 정말 있는가?'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제기해볼 수 있게 되지요. 내 식탁에 온 나의 먹잇감들, 다른 유기체들은 신이 존귀한 인간인 나를 위해 취해도 된다고 허락한 하등 생명인 걸까요? 벼라는 풀은, 시금치라는 풀은, 돼지라는 동물은 나보다 정말로 하등한가요?

불교에는 '입불(粒佛) 사상'이 있는데, 밥알 하나하나가 다 부처라는 사상입니다. 불교를 안 믿는 사람이라도 음미해볼 만한 사상이에요. 왜냐하면 만일 내가 존귀한 존재라면, 존귀한 행동을 했기 때문일 텐데, 그것은 밥알 같은 보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만일 내가 존귀하다면, 그건 오직 식탁 위의 식생(食生)이 내 세포를 잘 재생시켜주었기에 존귀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 식생은 존귀한 것이 아닌가요?

식탁에서 만나는 것들

인체와 식생은 엄격히 구분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예로부터 "명(命)은 식(食)에 있다"고 했지요. 식을 조절하고 다스리는 일, 즉 섭식(攝食)이 양생(養生)의 길이라는 사상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중)의학에선 음식으로 인체를 치유한다는 사상이 발달해서 '식료(食療)', '식치(食治)'라는 개념이 있었어요. 또 먹어서 생기는 병을 '실증(實症)'이라 했습니다. 인체의 내외환경 그리고 병의 상태를 본 뒤 그에 맞는 음식을 처방하는데, 인체의 기질(체질)과 식 생명을 둘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발달한 '아율베다' 역시 인체를 6체질로 나누고 그에 맞는 음식과 약초를 추천해왔어요.

식(食)은 곧 사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사람의 건강만을 말해주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사람의 삶과 인격, 정신의 수준까지를 곧장 말해주지요. 왜냐하면 식의 현장은 '중대 미팅'의 현장이기 때문이에요. 식탁에서 우리는 (조리사의 솜씨 이전에) 땅을, 땅과 관계된 농생태계를, 생태과정을, 태양을, 농법을, 그 실천자인 농민을, 그리고 특정한 보생(나 아닌 다른 생명)을 동시다발로 만납니다. 식을 선택한다는 건 이런 것에 개입함을 뜻해요(태양, 생태과정은 제외). 또한 식탁에서 나는 생명체로 반본(返本)되며, 내 명(命)과도 만납니다. 숲에서 범을 만난 듯, 조심하는 마음새가 되어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식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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