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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게 악마의 무기 안겨준 국회와 법원

[박점규의 동행]<21> 수십억 손배액에 '설날 해고'까지 당한 정규직 사연

민족 최대의 명절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해고를 당한 노동자가 있습니다. 세계 5위 자동차 회사인 현대자동차에서 19년째 일하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지난달 29일, 동료들은 두둑한 명절 보너스를 받아 고향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엄길정 대의원(43)은 해고 인사 명령을 받았습니다.

현대자동차는 ‘불법 집단 행동 및 형사 유죄 판결(업무 방해)’를 이유로 울산공장 1공장 대의원인 엄길정, 박성락 두 사람을 해고했습니다. 정부와 자본이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르는 ‘귀족 노조’의 정규직 노동자가 왜 해고를 당했을까요?

보수 언론이 때만 되면 ‘무소불위 노동 권력’이라고 헐뜯어왔던 정규직 대의원이 어떤 ‘불법 집단 행동’을 했기에 징계를 당했을까요? 고등학생과 초등학생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할 아빠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회사에서 잘려야 했을까요?

설날 연휴 전날 해고당한 노동자들

엄길정 대의원은 1996년 현대차에 입사해 울산 1공장에서 엑센트와 베르나, 벨로스터를 만들어 왔습니다. 1998년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36일 동안 공장 점거 파업을 하면서 노동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고, 처음 해고가 됐습니다.

정부와 재벌이 불러온 구제 금융 사태를 이유로 아무 잘못도 없는 1만 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떠났고, 그 자리는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로 채워졌습니다. 엄 대의원이 일하는 1공장의 CTS공정은 자동차 문짝 탈부착 공정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뒤섞여 일하다가 지금은 문짝을 떼는 일은 사내하청 노동자가, 차량 앞뒤에 보호 패킹을 붙이는 일은 정규직 노동자가 하고 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거나 훨씬 힘든 일을 하면서 정규직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임금을 받았습니다. 갖은 차별과 멸시를 당하면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하루아침에 공장에서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비정규직 동료들을 외면하거나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2003년 7월 울산공장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에서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불법 파견이기 때문에 정규직이라는 판결이 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며 그해 11월 15일부터 25일 동안 울산1공장 점거 파업을 벌였을 때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습니다.

많은 정규직 노조 간부들이 회사의 고소·고발이 두려워 비정규직을 외면했지만 엄길정, 박성락 대의원을 비롯해 몇몇 활동가들은 온몸을 다해 연대하고 싸웠습니다. 현대차는 업무 방해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정규직 활동가들을 고소·고발했고, 200억 원이 넘는 손해 배상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에 대해 울산지방법원은 지난 10월 엄길정 대의원을 비롯해 11명에게 20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같은 사건으로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에게 90억 원이라는 역대 최대의 손해 배상 판결을 때렸습니다.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의 잇따른 죽음 이후 2005년 최저생계비 급여압류를 금지하는 민사 집행법이 개정되어 최소한의 생계비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길정 대의원은 현재 자신의 통장에서 단돈 10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현대차가 자신의 급여를 압류하면서 동시에 급여 통장도 3억 원을 걸어 놨기 때문입니다.

▲엄길정, 박성락 씨가 현대차로부터 받은 해고 통보.


급여에 통장까지 압류, 10원도 못 찾아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신차가 생산되거나 회사가 설비 공사를 한다고 하면 공장에서 쫓겨날 걱정을 합니다. 설 연휴가 끝나고 현대차는 울산 2공장의 노후 설비 개선 공사로 안전하고 쾌적한 작업 환경을 조성해 고객주문에 신속하게 대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싼타페, 베라크루즈, i40에 들어가는 타이어를 보관, 공급하는 서브장을 외주화하겠다고 합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다른 곳으로 전환 배치될 수 있지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말 한마디 못하고 쫓겨나야 합니다. 그래서 2공장 노조 대의원회는 외주화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엄길정 대의원은 3년 전인 2011년 2월, 울산 1공장에서 클릭과 베르나 생산을 중단하고 벨로스터와 신형엑센트를 생산하면서 자동화로 남는 인원을 전환 배치하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해고하겠다는 회사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와 동료들은 13일 동안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신차 투입을 막는 라인 정지 투쟁을 벌여 비정규직의 고용을 보장받았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그를 업무 방해로 고소‧고발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했고, 그는 지난해 벌금 500만 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비정규직 해고는 막았지만 정규직은 형사 처벌

2011년 겨울 엄길정 대의원은 1공장 3500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1공장위원회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1공장 대표 2년의 임기는 엄길정 대의원에게 가장 많은 고소고발과 손해 배상을 당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대법원과 중앙노동위원회에서 현대차 정규직이라고 판결받은 최병승, 천의봉 두 사내하청 노동자가 울산공장 철탑 위에서 296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이던 기간이었습니다. 2년 동안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수십 차례 파업을 했습니다.

노조법 제43조에는 “사용자는 쟁의 행위 기간 중 그 쟁의 행위로 중단된 업무의 수행을 위하여 당해 사업과 관계없는 자를 채용 또는 대체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차의 주장대로 사내하청 업체가 현대차와 독립적인 회사라면 하청업체 사장은 파업에 대한 대체 인력으로 현대차 관리자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현대차는 비정규직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면 현대차 관리자들을 투입해 공장을 가동했습니다. 1공장 대표였던 엄길정은 대의원들과 함께 회사의 불법 대체 인력 투입을 막기 위해 싸웠습니다. 회사는 비정규직 노조가 파업을 할 때마다 업무 방해로 엄길정을 고소했습니다.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투쟁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동 강도가 강화된 주간연속 2교대 근무 노사합의에 반대해 지난해 4월 29일 1공장 조합원들과 함께 5시간 동안 자발적인 작업 거부를 벌였고 회사는 그에게 3억 원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2010년 11월부터 지난해까지 회사가 엄길정 대의원에게 걸어놓은 손배 배상액은 6개 사건 26억5000만 원에 이릅니다. 현대차 정규직 노조는 지난 해 임단협 교섭에서 고소‧고발과 손해 배상 문제를 풀지 못했고, 결국 해고로 이어졌습니다.

다행히 엄길정과 박성락 대의원은 노동조합의 신분 보장 기금을 대출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규직 노조의 신분 보장 기금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고통과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6개 사건에 26억5000만 원 손해 배상 청구

ⓒ박점규


현대자동차에 고소‧고발과 손해 배상, 재산 압류는 고대 노예를 다스리던 채찍과 쇠사슬만큼이나 위력적인 무기입니다.

2010년 11월 15일부터 12월 8일까지 하루 김밥 한 줄과 비닐 이불 한 장으로 24일 동안 허기와 추위를 견뎠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전기와 식사가 끊겨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농성 조합원 323명 전원에게 30억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는 소식에 크게 흔들렸습니다.

당시 언론을 통해 손해 배상 소식을 들은 가족들의 전화가 빗발쳤고, 지금 나오면 손해 배상에서 빼준다고 소문에 하나둘씩 가방을 싸고 농성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결국 점거 파업은 25일 만에 끝났습니다.

현대차는 비정규직에 대한 손해 배상과 급여 압류를 무기로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요구를 흔들고, 회사가 제시하는 신규 채용을 수용하라고 압박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1600명이 법원에 내놓은 정규직 소송에 따른 체불임금을 손해 배상과 맞바꾸려고 할 것입니다.

현대차의 협박과 회유에 해고자들 일부가 노조의 정보를 회사에 넘겨주고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이 됐고, 일부 흔들리는 조합원들이 노조 방침을 어기고 신규 채용 원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현대차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가장 헌신적으로 함께했던 엄길정, 박성락 대의원을 해고하고 손해 배상과 통장 압류를 걸어 비정규직과 연대하려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겁박합니다. 이렇게 당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라는 경고입니다.

엄길정 대의원은 이번 해고가 두 사람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현대차 노동조합의 힘은 현장에 있는 조합원과 대의원으로부터 나오는데, 회사가 이 힘을 위축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공격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어느 간부들도 정규직 노조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비정규직과 연대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쇠사슬과 채찍만큼이나 치명적인 손해 배상과 압류

쌍용차 47억, 현대차 비정규직 135억, 한진중공업 59억….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싸운 노동자들에게 최근 3개월 동안 법원이 내린 손해 배상 액수입니다.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에 내려진 손해 배상액이 1500억이 넘습니다.

재벌에게 악마의 무기를 건네준 것은 노조활동을 업무 방해로 처벌할 수 있도록 만든 국회입니다. 현행법으로는 폭력과 파괴가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는 집단적인 노무 거부조차 업무 방해죄로 처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청에 사내하청 노조는 교섭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이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민영화 반대와 같은 요구를 내건 파업은 경영권에 해당하기 때문에 불법이 됩니다. 헌법이 보장한 파업을 형법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는 악법을 지금까지 고치고 있지 않은 것이 바로 국회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차 재벌에게 악마의 무기를 마음껏 휘두르도록 하고 있는 것은 법원입니다. 악법을 이용한 업무방해 소송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을 손해 배상으로 인정하고, 재산까지 마음껏 압류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2010년 11월 서울중앙지법에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은 3년 3개월이 지나도록 아직 1심 판결조차 나지 않고 있는데, 재벌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은 벌써 끝나 월급과 통장을 압류하고 있습니다. (☞ 관련 기사 보기 : 수백 억 손배엔 '신속 판결', 현대차 비정규직 소송은?)

오는 2월 1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 41부(부장판사 정창근)에서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1309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의 선고가 열립니다. 2월 18일 민사 42부(부장판사 이건배)에서는 297명이 제기한 소송의 선고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난 1월 결심 공판에서 심리가 모두 종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차 재벌의 압력으로 변론이 재개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법원이 손배 소송은 빠르게 끝내고, 정규직 소송은 하염없이 끌고 있습니다.

재벌에게 악마의 무기 안겨준 국회와 법원

지난해 겨울 시사주간지 <시사IN>에 보도된 쌍용차 47억 손해 배상 판결 기사를 본 한 독자가 손해 배상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며 4만7000원을 보내온 것을 시작으로 연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달 22일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평택에서 동료들을 대상으로 후원 주점을 열었습니다. 동료들이 해고자들을 외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고, 주점은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꽉 찼습니다. 시민들은 주점까지 찾아와 쌍용차 한상균 전 지부장에게 손해 배상에 맞서 싸우라며 4만7000원과 10만 원을 손에 꼭 쥐여주었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손해 배상 가압류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이들이 연대의 뜻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재단’에서는 손해 배상 가압류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현대차 1공장 엄길정 대의원은 시민들의 뜨거운 연대도 소중하지만 더욱 절실한 것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부터 악법을 깨뜨려나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차 회사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 건 고소‧고발과 손해 배상, 압류를 원·하청 노조가 힘을 합쳐 없애자는 것입니다.

과거 민주노조들은 해고자 한 명을 복직시키기 위해 임금 손실은 물론 구속도 마다치 않고 싸웠습니다. 올해 현대자동차 교섭에서 성과급은 조금 덜 받더라도 신종 노예의 쇠사슬인 손해 배상과 압류를 없애는 싸움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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