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2014년 신년호로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나오길 바라는 미래의 책들에 대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일곱 명의 필자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책, 당신이 읽고 싶은 책, 번역되길 바라는 책과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울러 지난해 12월 13일 송년호에서 예고했던 페이지 개편은 기술적인 문제로 1월 17일부터 구현됩니다. 예고한 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 여러분, 2014년에도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P에게, 성탄이 이제 지났구나. 네가 알바를 뛰는 편의점도 제법 북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가끔 '진상' 짓을 하는 손님들 때문에 겪은 울화를 페이스북에 올리곤 하더니, 연휴 동안 그런 자들 때문에 시달리지나 않았는지 싶다. 늘 부지런히 책을 읽는 네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 손님이 뜸한 새벽녘에 덩치 큰 네가 계산대에 기대 책장을 넘기고 있지나 않을까 짐작하곤 한단다. 또 요즈막 네가 무슨 책을 읽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지. 게다가 네가 책을 읽으며 다스리고 있을 기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기도 하단다.
지난여름 내가 '강추'했던 레이먼드 카버와 존 치버의 소설을 읽고는 좋아하던 모습이 기억나는구나. 신산한 삶의 단면을 핀셋으로 들어 올리듯 끄집어내어 아무렇지 않은 듯 볕 잘 드는 곳에서 빛을 쬐이는 그 소설가들을 네가 좋아했다는 것,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괜한 걱정을 했던 일도 기억나는구나. 그들이 삶의 세계를 조회하는 정밀한 눈길은 어찌 보면 어차피 말해도 통하지 않을, 아니면 누구나 겪고 있으므로 실은 말해봤자 아무런 반응도 없을 그런 고통의 공통성을 우려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게 내 짐작이란다. 그랬으니 그들은 그렇게 서늘하게 이야기를 쓸 수 있었겠지. 그들이 글을 쓰며 갇혀 있었을 그 고독은 이제 네 차례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며칠 전 코레일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던 민노총 사무실에 경찰이 급습을 하던 날, 싱숭생숭한 마음에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무슨 책을 읽을까, 하고 말이다. 마음이 흐릿해질 때면 책을 읽는 버릇 탓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가 읽고 싶은 미지의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저자를 소개해달라는,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청탁이 생각나 그런 생각을 떠올랐지 싶다. 아무튼 나는 그 때 아무래도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단다. 몇 달 끙끙대며 읽던 미국의 대가 마르크스주의자의 근작 몇 권이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단 글을 써야지 내심 벼르고 있었는데, 그날 그깟 생각도 시들해졌어.
▲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겸 문화연구자 프레드릭 제임슨. ⓒHOLBERG PRISEN(출처 : Wikimedia Commons) |
언젠가 네가 사르트르에 관한 입문서를 물었을 때, 빌려주었던 책 기억나지. 프레드릭 제임슨이란 사람이 쓴 책 말이다. 그 책을 쓴 사람이 최근 아주 열심히 책을 냈거든. 정신없이 사느라 가끔 잠들 즈음 머리맡에서 몇 페이지씩 걸러 읽은 그의 난해한 책들은 내게는 꽤 매력적이었단다.
"대관절 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까?"라며 뚱한 표정으로 네가 반문했을 것만 같은 학자들, 요즘에 한참 네 또래의 친구들에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철학자들이 있잖아. 바디우나 랑시에르, 아감벤 같은 대 철학자들 말이야. 나는 그런 이들의 생각을 고쳐 읽을 만한 저자로 그만한 사람이 없겠단 생각이 들었어.
제임슨은 '지배'에 맞서는 투쟁을 역설하는 그 철학자들에 맞서 여전히 '착취'에 맞선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희귀한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거든. 그러나 그 사람도 "문제는 경제야" 라고 말하는 멍청이는 아니란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물신화에 맞서는 것이며 배제된 자들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평등을 다시 창안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자들의 주장이나, 문제는 자본제 경제에 있으니 그것에서 변화를 위한 투쟁을 발견해야 한다는 우둔한 지식인들의 주장 모두를, 그는 못마땅해 한단다. 실은 그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물론 그것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저자를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
그러나 그 날 나는 문득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할 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매일 학교에서 마주쳐야 했던 너 같은 친구들 때문이지. 내가 속한 세대의 사람들의 특징은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너무 모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마침 코레일 노동자들을 경찰이 덮친 날 저녁, 나는 <변호인>이란 영화를 봤단다. 탐탁지 않은 이야기의 영화였지만 어쨌든 그 영화가 운반하는, 내가 소속했던 세대의 삶에 대한 향수 때문에 나는 울컥했었어. 그런데 그 영화에서 터무니없는 고초를 겪게 된 젊은 대학생들이 그런 꼴을 당하게 된 이유가 몇 권의 불온서적, 요즘말로 하면 인문학 책을 보다가 졸지에 역시 요즘말로 하면 종북좌파로 찍히게 되었다는 걸 보면서, 맞구나, 우리 세대는 책을 통해 세상에 눈을 떴었지 하는 기억이 났단다. 의식화라고 불렀던, 책을 읽으며 다른 세계를 꿈꾸었던 일. 참으로 맹랑한 일이었지.
▲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2013). ⓒ위더스필름 |
그 때 우리가 읽었던 책들은 우릴 환장하게 했었어. 그건 대학생을 만들어 준 부모님의 노동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했고, 자신이 사는 세계의 불행에 무지했던 데 대한 분노이기도 했고, 엉터리 같은 세계를 낳았던 힘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데 대한 아픈 깨우침이기도 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네까짓 게 뭘 세상에 대해 안다고 까불고 있냐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거리로 나갔을 거야. 그런 확고부동한 확신의 타성일까, 내가 속한 세대는 여전히 자기 세대가 이룩한 변화가 참담한 실패였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단다. 그것이 실패인 이유는, 자신이 만든 변화가 엄청난 후광을 거느리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변화이기에 필요한 핵심을 빠트리고 있었다는 점을 끈질기게 모른다는 점 때문일 거야.
그러나 여전히 착각에 빠진 채 형편없는 세상을 만든 줄도 모르고 젠체하는 그 세대를 비난하잔 말은 아니란다. 내가 세대 갈등을 들먹이는 건 아니란 건 너도 알거야. 나는 세대의 사회학 같은 말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잖아.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순환을 시시한 멜로드라마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니까 말이야. 보험 영업사원이나 들먹이는 세대론을 굳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외려 망해버린 세대의 일원으로서 푸념이 아니라 마침내 변화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자들의 목소리가 네게, 네 세대의 삶에 잠재해 있다는 데 기대를 건단다. 지금 같지만 않다면야 어떤 세상도 좋을 것 같던 그 조급한 눈멂, 그것이 변화를 망쳤다면 실은 변화는 두 번 이뤄져야 하는 거겠지. 그러므로 변화는 두 번째부터라는 말을 믿는다면, 오만한 지식은 자신이 비판했던 것을 다시 비판함으로써 온전히 지식이 된다는 걸 인정한다면, 이제 너와 네 친구들이 진짜 변화의 주인공이 되겠지.
그런 변화를 만들 글을 네가 아니면 네 친구들이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이 내가 뼈아프게 읽게 될 책일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단다. 그리고 덕분에 아직 읽지 못한, 모든 책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만들 책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지. 그걸 생각하니, 마침내 읽어야 할 책이 생각난 것도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조만간, 네가 새 책이 나왔다고 귀띔해 주는 그 희소식. 그것을 통지받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힘이 솟는다. 조만간 벼르던 술자리, 하자꾸나. 신년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새벽길 퇴근 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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