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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동네 누님' 金正禮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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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통 큰 '동네 누님' 金正禮 여사

[남재희 칼럼] 國卒로서 여성운동의 代母·長官까지

나는 통이 아주 크고 '동네 누님'으로 통하는 김정례 여사를 좋아한다. 비록 국민학교(요즘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이지만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대모로서 맹렬한 활동을 하였고, 많은 정치인들의 누님 역할을 하였으며, 국회의원 재선과 보건사회부 장관을 무난히 경험하는 행운도 누렸다. 2013년 금년이 미수(米壽), 만 88세다. 자서전이나 전기가 나올 법한데 아직 그런 소식이 없다. 무모하게 내가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본 일이 있다.

내가 김정례 누님을 알게 된 것은 아마 1960년대가 아닌가 한다. 그때 김여사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만들어 그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법대 출신의 여학생에 눈독을 들여 일차로 배경숙 박사(인하대 교수)를 끌어 들이고, 뒤이어 그 후배인 서울여대 강사(뒤에 교수 대우)인 내 와이프(변문규, 박사 아닌 석사)를 스카우트하였다. 나는 신문사 일에 정신이 빠져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내 와이프는 얼마 동안 교양선전부장 비슷한 감투를 썼던 모양이다. 그 덕에 미국과 말레이시아(사라와크)에서 열리는 국제여성유권자연맹의 세미나에 참가하는 여행복도 누렸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미국 여성유권자연맹의 한 간부가 허름한 우리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와이프가 그 길에 일로매진하였더라면 사회적 경력도 착실히 쌓고, 운이 좋았으면 가끔 있는 경우인 비례대표 국회의원까지도 했을지 모르겠는데, 내 와이프는 왠 일인지 소극적이어서 겨우겨우 몇 년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신문기자가 남편이니 생활의 여유가 없어 그리 되었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그러한 인연으로 나는 일찍부터 김정례 여사를 계속 관찰하게 되었다. 통도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처신하는 것도 수준이 있어 호감이 간 때문도 있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자연스레 누님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서슴없이 '누님', '누님'하고 부르게 되었는데(내가 다른 사람을 누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시일이 감에 따라 내 주변 사람들도 모두 전염이 되어 '누님'을 연발, 자연히 '동네 누님'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누님은 대나무의 고장으로 유명한 전남 담양에서 국민학교 교육만으로 끝났단다. 연설조, 아니 웅변조로 말을 잘 하다가도 가끔 '가방끈이 짧은 게' 드러나기도 한다. 누님이 무안해할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보면 '데몬스트레이션'이라는 긴 영어 단어를 말한다고 하다 숨이 짧아 '데몬스트롱'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요즘의 초등학교 졸업으로는 대단한 두뇌이다. 건방지게 평가를 하자면 교육 수준으로는 초급대학의 수준은 충분히 되고 사회지식으로는 우수한 대학원 졸업생 이상이다.

이번에 누님에게 학력을 물어보기로 했다. 평소에 학력을 따졌다면 누님에게 실례일 뿐 아니라 묻는 사람 스스로도 수준 낮은 사람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정례론을 쓰기 위해 눈 질끈 감고 촌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답변은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나왔다. "나, 국민학교밖에 안 나왔어."

100년쯤 전까지는 학교교육이 별로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당이나 서원이란 교육기관에 다니기도 했지만 집에서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서양에서도 약간 비슷하여 가정교사에게 배운 사람이 많다.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은 아버지한테서 주로 배워 대학자가 되었다.

김여사도 아버님에게 한학을 배웠단다. 나중에 사회활동을 할 때 한문 명구를 말하여 국민학교 졸업이라고만 생각하던 사람들을 약간 놀라게도 했다고.

이제 88세가 되었으니 누님은 매우 솔직해진 것 같다. 국민학교를 나오고 평양 등에서 객지생활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해방 후의 고향지방에서는 좌익세력이 드세었다. 좌익의 사상교육모임에서 40일 동안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간부양성코스였던 모양이다. 이제 옛이야기이니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역시 이론이 정연한 누님 화법에는 그런 훈련 배경이 있었구나 싶다. 그때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할 것이다. 그러나 누님은 그 이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다. 무슨 이론적 비판이 아니고,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그 마음에 안 들은 것이 중요했다.

마침 국민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특별강습이 있어 1년간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까닭 모르게 교원발령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의 중앙훈련소이다. 이 결정이 누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할 것이다. 민족청년단은 광복군의 사령관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철기(鐵驥) 이범석 장군이 조직한 전국적인 대규모 조직이다. 수원에 있는 훈련소에 갔더니 350명쯤이 응모하고 300명이 입소할 수 있었다. 그 훈련소의 1기 선배가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인 이희호 여사다. 그래서 둘 사이의 언니·동생 관계가 평생 맺어진 것이다.

또한 거기에 과장으로 있었던 서영훈씨와 알게 되어 평생의 친분관계가 형성되었다. 김정례씨와 밀접한 김현자 의원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둘은 부부가 될 뻔하였다는 것이다. 서로가 관심을 갖게 되고 이어서 혼담도 오갔다는데, 그때 서씨가 북쪽에서 결혼을 하고 월남했다는 것이 알려져 김정례씨가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오늘날까지 둘은 속된 말로 '비보통'으로 친하다.

족청에서 또 한 사람 친밀해진 이는 김철 씨다. 민주당의 요즘 당대표인 김한길 씨의 선친. 나도 그들과 여러 번 자리를 함께 했었는데 꼭 친오누이 같다. 김철 씨가 혁신정당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아마 재정적 지원도 했을 것 같다. 그리고 김철 씨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SI)'의 국제회의에 참가하려 할 때 자주 여권이 안 나와 애를 먹었었다. 그럴 때 김여사가 중앙정보부의 아는 간부에 부탁을 하여 여권을 내주게 했다. 그런 이야기를 그때 나는 직접 들었다.

순서를 무시하고 중앙정보부 관계 이야기를 하나 해두겠다. 얼마 전 전직 의원들의 모임에서, 정보기관 간부로 있다가 국회의원도 지낸 김두종 의원이 김정례 씨에 관해 이런 과거사를 말하며 확인하려 든다.

10월 유신 후 김대중씨가 일본에 머물며 유신반대활동을 할 때다.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하든 그를 귀국시키려 애를 썼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의 이용택 국장이 이희호 씨와 김정례 씨를 함께 만나 궁리를 하였다. 결론은 이용택 국장이 제시하는 조건을 갖고 이희호 여사가 일본에 가서 김대중 씨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 조건은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도 여러 가닥이 있어 다른 가닥의 안인 납치(암살?) 계획이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다.

족청의 여성간부가 된 김 여사를 흔히 철기 이범석장군의 '수양딸'이었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것도 물어보았다. 아니란다. 다만 훈련원에 있을 때 철기가 한 번 방문하여 그 중 30명 쯤의 대표만 특별히 면담하는 데는 끼었다는 것이다.

김정례씨는 또 한 번의 교육과정을 밟는다. 족청계인 안호상 박사가 소장으로 있던 배속장교양성기관에 입교하여 여군 장교가 된 것이다. 장교생활은 짧았던 듯, 여군 소위로 끝났다. 김정례씨와 여군 소위 — 얼마간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듣고 보니 김정례 씨는 교육을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받았다. 국민학교 졸업, 아버님께 한학공부, 공산당의 사상교육 40일, 국교교원 양성 교육 1년, 족청훈련소 교육, 그리고 배속장교 양성 교육... 그만하면 대학교육에 버금가지 않는가. 오히려 더 다양하고, 자극도 심하고, 문제의식도 갖게 하는 교육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민감했던, 살아있는 교육이 아닌가.

전부터 흔히 하는 속언 가운데 "됫글은 배워서 말글로 쓰고, 말글은 배워서 됫글로도 못 쓴다"라는 게 있다. 그렇다. 내가 언론계에서 직접 경험한 바로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신문사 논설위원을 하다가 퇴짜 맞는 경우가 있고, 대학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사람이 우수한 논설위원이 된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김 여사는 됫글을 배워 말글 이상으로 쓴 경우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해두고 싶은 것은 김 여사의 성공에도 관계가 되는 것이지만, 사람의 사회적·정치적 입신에는 큰 규모의 단체 등에 가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해방 공간의 좌우익 대립에서 좌익단체나 정당에 가입한 사람은 큰 수난을 당했다. 좌익으로 죽고, 보도연맹에 끌려가 죽고, 재판을 받기도 하고, 이북으로 넘어가 고생길이 되기도 하였다. 속되게 말하면 그것은 줄을 잘못 선 것이다. 김 여사는 자칫 큰 일 날 뻔했는데 용케 벗어났다. 그리고 성공의 길을 걸었다.

좌익의 경우 말고, 대한청년단, 민족청년단, 한민당... 등등 큰 단체나 정당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성공하기도 하고, 거기서 맺은 인연을 평생의 유대로 하여 살아가기도 한다.

김 여사의 인연이나 인맥도 바로 해방 후 대단히 큰 조직이었던 조선민족청년단, 즉 족청이다. 해방 후 정국에서 족청은 막강했고 나중에 이승만 정권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 철기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 들어가고, 1953년 부산 정치파동에서 족청계가 주역으로 맹활약하였으며 이 대통령에 의해 "토사구팽' 당하기까지는 족청계가 정부의 장관이나 주요 직책을 많이 장악하고 있었다. 우선 생각나는 이름만 들어도, 백두진 총리, 박병권 국방, 백성욱 내무, 이재형 상공장관... 엄청 많다.

이 기회에 소개해 두고 싶은 족청계에 관한 좋은 연구책자가 있다. 일본인 후지이 다케시(藤井) 박사가 쓴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역사비평사, 2012년간)이다.

이범석 씨는 1930년대 말에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개설한 중앙훈련단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주의, 군사화, 지도자 숭배'로 요약할 수 있는 장개석의 파시즘 사상을 흡수했다. 또한 족청계인 안호상 박사는 독일유학을 하였기에 나치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그럴듯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그것이 "민족지상 국가지상"이라는 슬로건으로 압축된다. 나치즘의 냄새가 물씬 난다. 후지이 박사는 그들의 사상을, 반공적이면서도 냉전적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적이었으며, 정치적 행동 역시 법치주의적인 대의제 민주주의보다는 포퓰리즘적인 대중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라고 평가한다.

부산 정치파동의 하수인(?) 격이 된 족청은 이승만 대통령이 내치는 바가 되어 찬밥 신세가 된다. 중견급이었던 서영훈, 김철 씨 등은 친목단체를 만들어 계속 결속을 유지한다. 그들의 모임 만드는 습관은 그때부터 형성된 것 같다. 모두 그 후로도 모임을 만드는 일을 계속한다. 캐나다 퀘벡에 갔더니 프랑스계 분리주의자들을 꼬집어 말하기를 "전 세계 모든 프랑스인이여, 결사체(union)를 만들어라"고 한다. '전국의 족청계여, 조직을 만들어라'인가.


▲ 민정당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 질문을 하고 있는 김정례 여사. ⓒ연합뉴스
김 여사는 그때 박순천 여사가 이끌던 대한부인회로 옮겨 얼마 동안 거기서 여성간부로 일했다. 당대 최고의 여성 정치인 박순천 여사와의 귀중한 인연이다.

6.25를 여군장교로 맞은 모양이다. 겨울 서울 피난 때의 이야기가 중요하다. 두 번째로 서울에서 남쪽으로 피난 가던 때 김 여사가 지프차를 타고 서울역 근처를 지나는데 서울역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단다. 호사가여서 차에서 내려 까닭을 알아보니 열차가 끊겨 피난 못 간 군중들인데 공교롭게 대부분이 호남사람들이었단다. 그때도 통이 컸던 여군 소위는 트럭을 빌려 그들을 인천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들을 호남지방으로 실어 나르게 배를 교섭했다. 교섭이 끝나자 선주라고 나타난 잠바 차림의 청년이 바로 김대중 씨였다는 것이다. 똑똑한 청년으로 보였다. 인물끼리는 서로 바로 알아보는 모양이다.

김 소위는 김대중 청년에게 명함을 건네며 혹시 피난 수도 부산에 들를 기회가 있으면 자기를 찾되 자기는 무명인사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니 김활란, 모윤숙씨 등을 먼저 찾아보면 자기와 연락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 후 김대중 씨가 부산에 와서 연락을 해왔다. 무언가 섭리(?)가 작용했나... 김정례 씨는 혼자 나가기가 무엇해서 몇몇을 데리고 나갔는데 그 가운데 족청훈련소의 언니 격인 이희호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김대중·이희호 씨의 첫 만남이다. 김정례, 김대중 씨 등은 가끔 만났다. 거창하게 말하면 운명적인 만남이다. 뒷날 이희호 씨는 영부인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연애로 바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서로 간에 여러 애정의 경로를 겪는다. 그러나 우선 안면을 튼 것이니 김정례씨가 반쯤의 중매는 한 셈.

김대중 씨는 그 후로도 김정례 씨와 계속 만났다. 목포에서 작은 신문사를 할 때도 자금문제 등을 김 여사와 협의하곤 했다는 것이다. 김대 중씨는 그때만 해도 비빌 어덕이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나타난 활달하고 교제 범위가 광범한 여걸 김정례 씨니 크게 의지하려고 하였을 것이라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박정희 정권이 독재로 흘러감에 따라 김 여사는 재야운동의 큰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때는 김대중·이희호 씨가 맺어진 때라 언니 이희호 씨와 형부 김대중 씨를 자주 만났다. 그리고 여성정치가의 거물 박순천 여사는 물론 여성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공덕귀 여사와도 친해지며 그의 남편 윤보선 전 대통령과도 연결된다. 박순천 씨를 비롯하여 윤보선, 김대중 씨 라인에 연결되었으면 재야운동의 확실한 중심에 자리한 셈이다.

김 여사는 진보진영 인사들과도 넓게 접촉했다. 그때는 진보라는 표현보다는 혁신이란 용어를 썼다. 송남헌, 박진목 씨 등과도 친하게 지내는 것을 나는 자주 목격했다. 족청의 인연인 김철 씨와는 너무나 당연하다. 김철 씨는 당명은 자주 바뀌었으나 사회민주주의 성격을 가진 정당의 당수직을 계속 유지했다. 김철 씨는 족청을 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거류민단의 사무총장인가 국장을 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혁신운동에 헌신하였다. 나도 아주 가깝게 지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중앙의 간판만 지키고 지방조직은 미미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엄혹한 시절에 혁신정당의 간판을 지킨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김철씨에 관해서도 별도의 글을 남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가난한 혁신정객을 존경하던 인텔리 여성이 경영하던 낙원동 음식점 <농원> 이야기. 그리고 같은 혁신계이면서도 함경도와 평안도란 지역배경이 달라 계속 라이벌 관계에 있던 김철·고정훈 양씨 사이 등. 내가 그에 관심을 가져 술도 가끔 했으며, 우리집에 초청하여 마시기도 했다.

그가 작고했을 때 마침 내가 김영삼 정권의 노동부장관이었는데 여의도 성모병원의 빈소에

조문은 갔으나 발인에서 추도사를 해달라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죽산 조봉암 씨와는 생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그의 사법살인이 너무나 억울하게 여겨져 기일마다 망우리 묘소에 갔었는데 현직 장관으로도 갔더니 뒷말이 좀 있었다. 그래서 근무시간에 김철씨 장례에 가서 조사를 하는 일이 꺼려졌다. 용기가 좀 부족했던가.

일반 사회 또는 정계에서 김 여사를 말할 때에 사생활은 거의 부각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김 여사는 미인까지는 아니라도 반듯한 용모에 빠진 데가 없다. 그리고 오래 접촉하다 보니, 실례지만 귀여운 모습까지 발견할 수 있다. 평균 이상이다. 그런데 왜 사생활이 전혀 화제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 아마 김 여사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거기에 함몰되다 보니 미처 사생활에는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김 여사는 대단한 기백의 여장부다. 호통을 치면 남성 정치인들이 조용해진다.

사생활에 대해 얼핏얼핏 들은 것들은 있다. 재일교포 사업가와 결혼을 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다. 동향인 것 같다. 남편은 주로 일본에서 사업을 하기에 부부는 견우직녀와 같이 드문드문 만나는 형편이지만, 참 다행스럽게 남편이 대단한 호인이자 애처가인 것 같다. 그래서 김여사 생활기반으로 한국에 조그만 공장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그 재력으로 김 여사는 통 크게 돈을 펑펑 써왔고 그래서 '통 큰 누님'이란 별명이 생겨난 것이다. 남편이 작고한 후 지금은 공장도 정리하고 사업을 하는 아들에게 의지하고 사는데 그래도 아드님 사업이 잘 되는지 최근에도 기사 딸린 자가용을 굴리며 살고 있다. '기사 딸린 자가용' - 서양의 부유층도 부러워하는 여유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수 연령에 '기사 딸린 자가용'이라면 대단한 부를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김 여사의 여성운동으로 가장 뚜렷한 것은 여성유권자연맹 위원장으로서다. 여성유권자연맹은 미국에 본부가 있고 세계 여러 나라에 자매조직이 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미안한 이야기로, 실제 활동은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김 여사가 워낙 큰 인물이기에 모든 것이 묻혀버린다. 김여사도 그 이름으로 여성운동계에서 크게 대우를 받았지만 그 후임인 여성 가운데도 출세한 사람이 많다. 한 분은 김 여사와 비슷하게 국회의원(비례대표)과 장관까지 했다.

이번에 김여사가 여성유권자연맹을 맡게 된 내력을 들었다. 역시 족청의 인맥을 통해서다. 그만큼 사회단체나 정당의 인맥은 중요하다. 족청의 동지인 김철 씨가 일본에서 민단에 있으면서 알게 된 일본 부인유권자동맹의 이치가와 후사에(市川房枝) 위원장을 김 여사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치가와 위원장은 여성참정권 획득을 위해 줄기차게 노력해온 여성운동의 거물이다. 한국의 여성유권자연맹 결성 모임은 2백여 명쯤이 참석하는 성황이었다. 특히 황신덕 여사가 계속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미국의 큰 재단인 아시아재단의 한국지부에서 재정적 도움을 많이 해주었다. 그렇게 하여 한국의 여성유권자연맹이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NGO는 예컨대 경실련과 같은 비교적 착실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이름은 거창하나 내실은 별 게 아닌 경우가 많다. 종교단체, 노조 등 기존의 조직을 바탕으로 한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어떻든 그 이름으로 행세를 하고 대우도 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재미도 본다. 누가 <NGO 출세학>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하여 논문이나 책으로 써 보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소중한 NGO 운동에 찬물만 끼얹으려는 것은 아니다.

덧붙여 말한다면 무슨 무슨 원로 운운하는 모임들도 비슷하다. 지명도 있고 나이 많은 몇몇 분들이 무슨 무슨 모임을 그럴듯하게 구성한다. 그리고 대중매체를 재주있게 탄다. 실제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대개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러면서 대중매체에는 그럴듯하게 원로 운운 모임으로 등장하고 '허장성세'를 한다. 어차피 세상이란 그런 가장무도회일 수도 있겠다. 김 여사가 절친한 서영훈 씨도 그러한 인물 가운데 속한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욕을 먹을 각오로 말해야만 비로서 밝힐 수 있는 우리나라의 희극들이다.

그런 김 여사와 내가 아주 가깝게 된 것은 민주정의당(民正黨)을 같이 하게 되면서부터다. 창당 때 나는 어쩌다 민정당의 서울시 조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시·도 조직책과는 다르게 일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틀어박혀 인물지도를 그려보기만 하였다. 어느 시도 조직책은 사무실을 열어 잡음이 생겼다. 나의 대전제는 서울은 대한민국의 얼굴이니 서울의 조직책들은 대한민국 여러 세력들의 축도처럼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여 전날의 여당 출신이 있으면, 야당 출신도 있고, 보수가 있으면 진보도 있고, 여성도 포함되고, 노동·학생운동 대표급도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그 인물 면면을 갖고 전국민을 향하여 선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가 특히 점찍은 사람은 윤길중(진보), 김정례(여성), 임철순(교육), 김말룡(노동), 이세기(학생운동) 등등이었다. 이들 중 김말룡씨는 윗선에서 이찬혁씨로 바뀌었다.

김정례 여사는 내 인물구상도에 포함되기는 하였지만 이미 정권의 윗선에서 점지된 인물이란 것을 나중에 알았다. 여하간 아래쪽 의견과 위의 의견이 일치된 것이다.

신군부 쿠테타를 한 주체는 각계 인물들을 만났다.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조향록 목사 등을 만난 데 이어 김정례 여사도 만난 모양인데 그때 아마 마음에 썩 들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김 여사는 말하기 좋아하는 전두환 장군의 말허리를 꺾고 자기 소신을 어지간히 밝힌 모양이다. 그러기도 어렵다. 그래서 인상에 남은 것 같다. 계속 특별대우다. 국회의원 공천을 연달아 주어 서울에서 두 번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사부장관에 임명하여 장기간 재임케 하였다. 그 분야에 문외한인데 파격적인 대우다. 장관 재임 중에도 위에서 특별히 보아주어 아무 탈이 없었다. 물론 관료제도가 자리 잡혀 실무는 차관 이하가 잘 집행하지만 말이다.

서울 출신 의원들은 자주 모였다. 거기서 나는 계속 '누님', '누님'하고 따랐다. 그랬더니 다른 동료의원들도 덩달아 '누님'이다. 그래서 의원들 동네누님이 된 것이다.

그렇게 통이 크고 덕성스러운 누님도 맺고 끊는 독한 데가 있다. 그러기에 김정례 여사는 거물 취급을 받는다.

중앙당사에서 의원들 10여명이 야당쪽과 얽힌 난국타개책을 논의할 때다. 그때 무슨 이론가라고 폼 잡고 다니는 한 경망한 의원이 "야당 안에 프락치를 넣어 정보도 빼내고 그들을 교란시켜야 한다"고 마치 무슨 대간첩작전을 하는 듯한 주장을 하였다. 그의 경망한 장광설이 계속되자 대부분 어이없어 하기만 했는데 누님의 호령이 떨어졌다.

"아무리 정치가 타락했기로서니 어찌 그런 부도덕한 이야기를 하는가!" 아주 매몰차게 혼을 냈다. 그 자칭 이론가도 할 말을 잊고 조용해지고. 요즘 그 사람을 마주치면 그때가 떠오른다. 그게 무슨 이론가인가.

재야의 여성운동가로 비록 여당에 몸담았지만 그의 도덕성과 기개는 살아있구나 싶었다.

칭찬하는 이야기를 했으니 약간 꼬집는 이야기도 해야겠다. 말 잘하기로 유명한 서영훈 씨는 이회창 후보 쪽에 발을 디밀었다가 민주당으로 선회하여 그쪽의 중요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때 정동영 의원이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또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그가 내는 잡지에 이회창측 선거진영 명단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거기에서 여러 사람의 은밀한 줄서기가 드러났다. 서씨 말고도 더러 있다. 그래서 누님을 만나 잡담을 하는 가운데 누님과 서영훈 씨가 절친한 사이인 것을 알면서도 그 문제를 제기하여 서씨를 꼬집었다. 왔다 갔다 한다는 이야기다.

그 후 조선호텔에서 여류작가 허근욱 씨가 아버지 허헌 씨의 전기를 내고 출판기념회를 할 때이다. 허헌 씨 전기의 출판기념회를 서울 도심 일류 호텔인 조선호텔서 할 수 있게끔 세상은 크게 변했다. 허근욱 씨는 북한에서 남으로 넘어온 후 오랫동안 청주에서 살았기에 청주의 문인들과 친하게 되고 자연 나와도 알게 된 처지다. 허헌씨는 일제 때 민족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인사들을 주로 변호하여 김병로·이인씨와 함께 '민족변호사 3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김병로 선생의 손자인 김종인 의원에게 같이 가지고 권유하였다. 허근욱 씨와 안면이 없다고 하기에 내가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소개하겠다고 하였다.

그때 서영훈씨가 나타났다. 나와 악수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바로 되짚어 나와 나를 향해 서슬이 퍼렇게 대든다. "당신. 나와 무슨 척 지었어." 대단한 기세다. 잡아먹을 듯한 표정이다. 얼렁뚱땅 김대중 씨 당의 대표도 하고 비례대표 국회의원도 지내는 행운을 누린 그가 호통을 치니 화가 났다. "요즘 무슨 총재인가를 하신다는데, 아이고, 무섭습니다." 나는 조롱조로 대해 버렸다. 그는 그때 적십자사 총재였다. 통 큰 누님이 그 문제는 통 크지 않게 내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한 모양이다. 그 후 강원룡 목사의 기일에 남한강 묘지에서 마주치니 무슨 원로모임 비슷한 곳에 참여하라고 권유한다. "나는 원로가 아닙니다." 계속 냉랭하게 대했다.

나의 둘째 딸이 반체제운동으로 구속되었을 때다. 첫째 딸이 반체제 유인물 살포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는데, 이번에는 1년여 만에 다시 둘째가 데모 조종 혐의로 걸려 나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여러 가지로 애매한 구석이 많아 수사기관이 판단하기에 따라 이리저리 결론이 달리 날 수 있는 상황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경찰의 국장급 간부가 그 문제로 나를 갖고 장난질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름은 안 밝히겠지만 참 교활한 짓거리다.

마침 서울시 출신 동료 국회의원들이 모이는 술자리가 있었다. 거기서는 원내총무인 이종찬씨가 주최 측이기도 하여 중심인물이다. 나는 술도 들어간 김에 이 총무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내가 귀찮으면 그만 두라고 할 것이지, 애매한 내 딸은 왜 구속했느냐, 봐주려면 봐줄 수도 있는 애매한 상황 같은데, 여당 의원의 딸이라고 꼭 그렇게 혹독하게 대할 수 있느냐." 대충 그런 내용의 공격을 퍼부었다. 술판은 흥이 깨졌다. 나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때 그 여럿의 동료 의원 가운데 그래도 나를 달래며 집까지 데려다 준 사람은 역시 누님이었다. 누님은 우리집까지 멀리 와서 집식구를 위로하였다. 유권자연맹 때부터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이 총무는 그 후 신군부 주체인 이춘구 의원 겸 내무부차관을 만나 관심을 촉구했다는 후문이다.

14대 국회의원 선거 때다. 누님이 자기의 선거 유세에 찬조연사로 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때는 의원들이 서로 다른 후보들의 선거유세에 찬조연설을 하여 도와주었다. 선거 막바지에 나도 무척 바빴다. 그러나 나는 4선 의원이고 정책위 의장, 중앙위 의장 등 실권은 없는 허세이지만 감투도 썼기에 약간 이름값이 있지 않는가. 그래서 강서구에서 성북구까지 한 시간 이상 달려 유세장에 갔다. 내 선거운동 반나절은 공친 셈이다.

거기서 특별히 지원유세차 온 김영삼 당대표와 마주쳤다. 그는 깜짝 놀라며 "남 의원, 이 중요한 때에 선거구를 비워두고 이렇게 와도 되는 거요."라며 크게 걱정하였다. 나의 5선 고비는 어려웠다. 누님도 나도 모두 낙선하였다. 그 후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청와대에서 당직자모임이 있을 때 그는 새삼 그때 이야기를 꺼내며 놀라워했다. "남 의원, 그 바쁜 때에 글쎄 김정례 여사 유세에 찬조연사로 왔더라고..." 낙선이 아까운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는 아마도 나를 선거의 바보처럼 말했지만, 누님을 아끼는 성의를 보인 데 대해 인간성에 있어서는 평가를 하였을 것이다.

김 여사는 밥과 술을 잘 산다. 그 가운데서도 절묘한 모임은 민정·민주·공화당, 그러니까 노태우·김영삼·김종필씨의 3당이 합당을 발표하던 날의 인사동 <향정>에서의 저녁모임이다. 무언가에 씌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극비에 진행되었던 3당 합당의 발표날 저녁에 미리 모임을 연락하여 마련할 수 있을까. 그리고 초청된 인사도 여야를 아우르는 굵직한 인물들이다. 민정당의 중진 이종찬, 민주당의 대표급 인물 김상현과 이기택, 그리고 좀 급이 떨어지는 나와 초청자인 김정례 여사, 다섯이다. 고르려고 마음 먹고 했다 해도 신기한 인선이다. 모두가 합심했다면 조그마한 정당을 만들 만한 인물들이다. 그런 인선을 한 누님의 안목을 평가해야겠다.

김상현 의원 이야기를 쓰면서도 말했지만, 모두가 3당 합당에 놀랐고 그리고 불만이었다. 공통으로 나온 이야기는 왜 호남만 배제하고 비호남끼리 뭉쳤냐는 것, 호남만 유독 배제한 결과는 우리 정치의 앞날을 위해 불행하다는 판단이었다. 저녁 술자리는 우울한 걱정의 자리였다. 그때 그 다섯이 각각 소속 정당을 박차고 나와 독립집단의 기치를 올렸더라면..., 무언가 신선한 느낌을 국민들에게 주었을 것인데... 일단은 그리하여 무소속으로 남아 지역 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할 일이었다. 그리고 세가 늘어나고 힘이 붙으면 새로운 정당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이기택 씨는 4·19 동지들의 모임이 있다고 <향정>에서 떠났다. 그 후의 일이지만 그는 김영삼당을 떠나 김대중당과 제휴한다.

이종찬, 김상현과 나는 <향정>에서 그 옆의 맥주집으로 옮겨 12시가 지나 1시쯤까지 꿍꿍 고민을 했다. 무언가 3당 합당에 반기를 들고 거사를 해야겠다는 심정이기는 한데, 아쉽게도 정말 아쉽게도 결단을 못 내리고 헤어졌다. 그 후 오늘날까지도 그때가 나의 생애에 있어 정치적 결단을 내릴 드문 기회인데 아깝게도 놓쳐버렸다고 후회스럽게 회상되는 것이다. 정말 타이밍이 중요하다.

평생을 여성운동, 재야운동, 정당정치의 무대에서 사람들을 많이 대하여서인지 김 여사의 사람 보는 안목은 괜찮은 것 같다. 우선 그가 가깝게 사귀는 정치인들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최상은 아니라도 빠지는 인물은 사귀지 않는 것 같다.

중요했던 사람 고르는 일 한 가지를 이야기해보면, 이종찬 씨가 나한테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여성 측 인선을 상의하면서 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여성단체장 한 사람을 거명하였다. 나는 김 여사의 안목을 높게 평가하기에 바로 그 일을 김 여사와 상의하였다. 그랬더니 펄펄 뛴다. 알려진 것과 달리 그 인사는 부적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안으로 수준이 높은 여성운동가 김현자 씨를 추천했다. 이종찬 씨한테 그 뜻을 전달하니 역시 김 여사를 존경하는 이 씨는 곧 동의하고 윗선에 보고하여 김현자 씨로 결정했다. 말이 그렇지 국회의원 한 자리가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닌데, 김정례 씨 한 마디로 김현자 씨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그 추천도 정확하여 김현자 씨는 수준급 의정활동을 하여 다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재선을 했다.

누님은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후 전직의원들 모임인 헌정회의 부회장도 하고, 여성정치연맹도 새로 만들어 그 총재로도 활동하고 했는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가 보기엔 그 수준이 떨어진다. 지난 날의 재야운동의 투사가 좀 고리타분하게 된 것 같다. 역시 나이가 들어서일 것이다. 80줄에 들어서니 우리나라 대부분의 노인세대가 그러하듯 발랄함을 잃고 퇴보적이 된다. 불만이지만 나보다 8살 연상인데 잘못 이야기했다가는 노여움을 탈 것 같고... 함구하고 지낸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지나친 의리의 표현은 거슬리기도 한다. 물론 특별한 배려를 받았으니 그러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사회의 공적인 평가나 판단도 고려에 넣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남자 같으면 '의리의 돌쇠'라고 하는데...

나는 김정례 여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존경하여 우선 그에 관해 짤막한 글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누가 자서전을 쓰거나 전기를 대필했으면 한다. '국졸에서 장관까지'라는 한 편의 훌륭한 여성사도 되겠고, 틀림없이 우리 정치·사회의 한 단면사도 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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