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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유끼꼬 별명의 全玉淑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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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유끼꼬 별명의 全玉淑 씨

[남재희 칼럼] 내가 만난 현대의 여걸- 재야,언론계,방송계 휘어잡아

<다음 글은 <강서문학> 2013년호(25호)에 실렸던 글로, 필자와 <강서문학> 측의 양해를 얻어 전재합니다. 다음 번에는 김정례 전 보사부장관에 관한 글이 이어집니다. 편집자>

그동안 술집 마담들에 관해서는 회고담을 많이 썼다. 술집의 여성들은 관찰할 수도 있고, 대화할 수도 있는데(때로는 실례지만, 희롱도 하고, 정도 느껴보고), 그 밖의 여류명사들을 만난다는 것은, 보통의 남성으로서는, 참 어렵기만 하다. 나에게 있어서 그 예외가, 내가 '여왕봉(女王蜂)'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전옥숙(全玉淑) 여사다.

술집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의 주된 직업을 말한다면 영화사와 TV 프로그램 제작회사를 운영한 적이 있는데, 전 여사는 미모와 지성, 그리고 마당발 같은 지식인들 교류범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주당인 나에게는 교류하기가 안성맞춤이다. 뭐랄까, 현대미라는 표현이 성립될지 모르겠다.

전 여사와 함께 했던 가장 특별했던 술자리를 먼저 소개해야겠다. 이태원의 크라운 호텔 옆에 있는 중간급 술집에서 전 여사가 주최하는 좌석. 권오기 동아일보 사장, 고바야시(小林慶二) 아사히(朝日) 신문 특파원, 그리고 나 등 몇몇이 있었다. 중간에 전 여사, '김영삼 씨를 부를까?' 했다. 그때 YS는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 당수.

얼마 후 YS가 당도했다. 놀랐다. YS가 온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전 여사가 YS와 그렇게 흉허물 없이 통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리고 한참 마시다가 전 여사가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오늘 YS 대통령 만들기 모임으로 할까"하고 농반진반의 제의를 한다. 즉석의 그런 제의에 술자리에서 이의 여부가 있을 수 없다. 거기서 보통 때 같은 논리를 전개하면 영 촌사람이 된다. 또 대통령은 단임제이니 논리상으로는 민정당의 간부인 나도 자유결정을 할 수는 있는 것이다. YS가 이론에서는 얼마간 떨어지는 듯하지만 사람으로서는 호감이 가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 후에 YS가 대통령이 되고, 권오기 사장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이, 나는 노동부장관이 되었는데, 그런 것들은 그 술자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우연치고는 야릇한 우연이다. 고바야시 특파원은 YS 단식 때 아사히신문에 특히 크게 보도한 인연으로, YS와 가장 친한 일본기자가 되었다.

전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던 1960년대 말인가 70년대 초, 같은 방의 경제담당 논설위원 김성두 씨가 좋은 모임이 있으니 가자고 해서, 사회문제 담당 조덕송 논설위원(조 대감이라 불리던 걸물이다)과 함께 명동의 무용교습소에 갔더니 중년의 여성 몇이 있고, 그 가운데 전 여사가 있었다.

김성두(金成斗) 씨는 일본발음으로 '가네나리마스(종이 울린다)'가 된다. 마산 근처 시골의 초등학교 때 게으름을 피우다 부모들이 "가네 나리마스" 해야 달려갔다는 우스개도 있다. 참 미인이다 싶었다. 얼굴이 좀 긴 편이고 코가 약간 오똑하고, 몸매가 날씬하며, 게다가 아주 수준 높은 지식을 갖고 세상일을 꿰뚫어 본다. 그러니 관심이 안 갈 수 없다.

전 여사는 그때 일본어 잡지 <한국문예>를 월간이 아닌 정기 간행물로 발행하고 있다 하였다. 우리 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것이 주목적인데, 특히 윤흥길의 <장마>를 일역했다고 들었다. 그때 몇 번 술을 함께 했지만 그밖에 전 여사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우선 나이를 모른다. 여성에게 나이를 묻는 것이 결례라는 관습이 있다. 나는 그 뒤 항상 나보다 몇 살 위일 것이라고 전 여사에 말하면서 은근히 나이를 알려 했으나 밝히지를 않는다.

6·25가 날 때 중학은 6년제였고, 나는 중학 5학년이었다. 나는 전 여사가 그때 중학을 갓 졸업한 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라고 성급히 단정했었다. 그때 전 여사는 좌익에 기울었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놀라워하겠지만, 시대상황의 변화를 고려에 놓고 보면, 아주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해방 후 남로당은 한때 합법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한민당(송진우), 한독당(김구)이 우익정당이고, 민족자주연맹(김규식) 등이 중간파이며, 공산당(박헌영), 인민당(여운형), 신민당(백남운) 등이 좌익정당이다가 남로당으로 합쳤었다. 해방공간에서 정치적 자유도 있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뜻에 맞는 정당을 선택했었다. 그러다가 미구에 냉전이 격화되면서 남로당이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다.

여기서 정당 노선에 대한 가치판단은 별개로 한 이야기다. 전 여사가 사상적 극복을 하였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내 관찰을 종합해 볼 때 보수는 아니고 리버럴(liberal)이다. 요즘 우리 정치에서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같은 흐름이다. 내 생각과도 대부분 리듬이 맞는다. 그래서 가까워졌는지 모른다.

그의 고향은 경남 통영이다(전에 전 여사에 관해 수필을 썼더니 통영에 있는 어느 잡지에서 전재를 허락받아 아주 크게 실었다). 6·25 때 서울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 후 공산측이 후퇴하자 엉겁결에 휩쓸리어 북쪽으로 가게 된 모양이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 의정부 쪽으로 가다가 국군에게 투항을 했는데 다행히 헌병대장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후 그 헌병대장과 결혼이 성사가 되고, 그 헌병대장은 대령으로 예편했다는 전문인데, 헌병대령이면 헌병으로는 한껏 진급한 것이다.

유명한 예술지향파 영화감독인 홍상수 씨가 전 여사의 3남이다. 세상에 알려진 일이니 홍 감독을 거명했다 해서 프라이버시 침해는 안 될 것이고, 그가 양해를 해줄 것으로 여긴다. <돼지가 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등으로 시작한 그는 최근 15번째 영화 <우리 선희>로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문화부 부장 출신인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은 그의 영화를 재치 있게 평하여 "이름 난 평양냉면 국물을 처음 맛 봤을 때처럼 맹숭맹숭하다" 하였다. 수준급 평론이다. 전 여사와는 그 후 얼마간 인터벌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전 여사와의 만남에서 가장 화려했던 것은 패티 김과 술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강남의 살롱으로 나오라기에 갔더니 패티 김과 그의 이태리인 남편, 영화배우 최지희 씨와 쟈니 윤이 있다.

쟈니 윤은 고향이 음성이라고 하며 나와 같은 충북 출신이라고 좋아했다. 최지희 씨는 내가 문화부장을 할 때부터 얼핏 알았고, 동경의 아카사카(赤坂)에 있던 오픈 살롱 <지희네 집> 때부터 잘 아는 사이이고.

영어로는 명사를 셀러브리티(celebrity)라고도 한다. 패티 김은 셀러브리티다. 그런 여류명사와 살롱에서 자리를 함께 하고, 술을 마시다니, 시골 출신이 '출세'한 셈이다. 김상현 의원의 과장된 너스레 식으로 말한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기록해 둘 일이다. 내가 한국일보에 입사한 무렵 패티 김도 등장했다. 한국일보의 사내행사에 패티 김이 신인으로 나타나고, 연예 담당 임영 기자가 영어로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패티 김을 찬미하던 모습을 큰 화면처럼 기억한다.

의미가 컸던 자리는 공화당 정권 말기에 일본 사회당의 서기장 일행이 방한했을 때다. 그때만 해도 일본 제1야당인 사회당이며 그 제2인자격인 서기장이다. 그런데 당시 공화당의 박준규 당의장이 일본 사회당은 북한 정권만 정식으로 인정하고 남한의 한국정권은 인정하지 않는 괘씸한 정당이라고 그들과의 면담을 거절했다. 체면을 구긴 셈이다. 그때 아사히신문 특파원이 나섰다. 전 여사를 동원하여 위로 술을 같이 하며 한국의 밤을 구경하게 했다. 나도 초청되어 강남의 오픈 살롱에서 함께 마셨는데, 전 여사는 일본 정국에도 정통하여 유창한 일본말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그 때 집권당의 초선의원이어서 박준규 당의장은 못 만났으니'꿩 대신 닭'역할을 한 셈인가.

마지막 판에 노래 순서가 되어 내가 전 여사에게 그가 가장 기가 막히게 감정을 넣어 잘 부르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탁했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메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채로/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6·25때 넘어가던 그 고개니 비장, 비통할 수밖에 없다. 그 노래는 전 여사를 위해 있는 노래 같았다. 감정 100%인 절창이다(위에서 나는 '그녀가'라고 하지 않고 '그가'라고 하였다. 나에겐 전 여사가 뛰어난 인물로 각인되어 있어'그녀가'라는 표현이 잘 안 나온다. 굳이 필요하다면 '그가'이다).

<한국문예>라는 잡지도 냈었지만, 일본 후지(富士)TV의 서울 책임도 한때 맡았었다는 등 전 여사는 일본통이다. 아사히신문, NHK 등의 특파원이 새로 부임하면 대개 그를 찾아본다. 예방이다. 일본대사관측과도 관계가 깊어 대사관 간부를 불러내어 가끔 술을 마셨다. 나도 동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일본 자민당에서 오자와(小澤一郎)가 실력자 행세를 할 때라 그와 끈이 닿는가의 여부가 화제가 되었었다.

아사히신문 고바야시(小林慶二)의 전임인 와까미야(若宮啓文) 씨는 서울서 귀국한 후 아사히신문의 주필까지 승진했는데 그는 <신문기자―현대사를 기록하다>라는 책에서 전 여사에 관해 쓰고 있다. 나는 그가 서울에 들렀을 때 한두 번인가 인사동에서 술을 함께 했었다.

"그녀는 술기운으로 일본을 이것저것 비판했다. 반론을 펴다가 큰 소리의 논쟁이 되었지만, 이것은 그녀 나름의 테스트였다. 한국에서 생활하려면 이쯤은 각오하라는 이야기인가." 와까미야는 전 여사와의 카페에서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나도 경험했지만 전 여사가 가끔 하는 비판은 아주 신랄하다).

전 여사는 와까미야에 부탁하여 <일본정치의 전환점>이라는 TV 프로를 제작할 때 오자와(小沢一郎), 고노(河野洋平), 하다(羽田孜), 호소카와(細川護煕), 도이(土井鷹子) 등 거물급 정치인들을 등장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은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와도 친해 나카가미는 전 여사를 70세가 지났지만 "아직도 아름답고 야성미가 넘치는 여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나는 지성미라고 생각했는데 '야성미' 운운은 좀 의외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비치는 모양이다. 나카가미는 요절했는데 <일렉트라―나카가미 겐지의 생애>라는 전기물에 전 여사 이야기가 나온다.

한 번은 지적 수준이 높고 한국의 국악에도 관심이 많은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주한 일본대사가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주최한 만찬에 간 일이 있다. 오구라 대사는 그 후 한국에 이어 주 프랑스 대사로 옮겼는데 역시 그의 지적 수준과 관계있는 것은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만찬에서 전 여사, 춤꾼 이애주 서울대 교수, <서편제>의 임권택 감독, 그리고 내가 공교롭게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잡담 끝에 내가 조선일보 문화부장 때 영화 담당 정영일 기자에 끌려 임 감독의 영화 촬영 현장에 가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고 하자 임 감독, 그 때의 프로듀서가 바로 전 여사였다고 말한다. 영화사도 했다는 이야기다.

한겨레신문 창간 부사장을 지낸 임재경 씨도 전 여사와 잘 아는 사이인데, 그가 동경에 갔더니 정경모 씨라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 방문을 했던 유명 언론인이 일본에서는 <시베리아 유키코(雪子)>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전 여사에 관하여 꼬치꼬치 묻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알려진 인물 같다.

일본의 진보적 월간지 <세까이(世界)>의 주간을 했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씨는 매우 까다로워 특히 한국 사람들은 매우 가려서 만난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그 야스에와도 전 여사가 잘 통했다고 여러 사람이 이야기한다. 문인으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내고 정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던 조경희 여사도 전 여사의 일본에서의 활동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조 여사 자신도 전 여사 비슷한 곡절이 있는 인생을 살았다.

참, 한 가지 빠뜨렸다. 술자리에 YS를 불러낸 다음에, 내가 그렇다면 김대중 씨와는 어떠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DJ가 일본에 체류하고 그도 일본에 있을 때는 가끔 만나 식사를 했었다는 답변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신뢰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렇다. DJ는 술을 잘 안했으니 식사다.

전 여사는 <지리산>의 소설가 이병주 씨하고도 오랜 교분이 있었고, 이 씨의 둘째 부인과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한다. 이병주 씨는 <남로당>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거기에 전 여사를 등장시키는데 이름을 '김옥숙'이라 했다. 이 씨는 나에게 빙긋이 웃으며 "전 여사, 여장부 아닌가베. 그래서 이름에 불알 두 개를 집어넣어 '전(全)'을 '김(金)'이라고 바꾸었지." 괜찮은 익살이다. 소설가에게는 그런 특권도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전 여사는 재야 소장파 인사들의 대모(갓 파더에 대비되는 갓 마더)다. 와까미야도 책에서 '갓 마더'라고 썼다.

우선 그때 당시 한참 재야 작가들의 중심 격이었던 <오적>의 김지하 시인과 아주 친했다. 보통 친한 게 아니었다. 김 시인은 천재적이었다. 그 후 너무 성급하게 샤머니즘의 세계로 빠지고 말았지만. 일본 특파원들이 그 당시 화제의 중심이던 김 시인을 취재하려면 대개가 전 여사에게 주선을 부탁했었단다.

그리고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라고 굳이 호칭하는 이영희 교수와도 아주 가까웠다. 이 교수는 그의 이론에 좀 심한 편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다만 그가 우상 파괴에 보인 용기만은 평가하여야 하겠다. 이 교수는 전 여사를 따랐을 뿐만 아니라, 술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누님, 돈 좀 꿔 줘"라고 SOS를 했다는 이야기다.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들인 임재경, 신홍범 씨가 민주화 운동의 원주지역 거물이자 협동조합 운동가인 장일순 씨의 장례에 참석하러 원주에 갔다가 거기에 전옥숙 씨가 와있어 놀랐다고 말한다. 놀랄 것이 없다. 전 여사는 일속자(一粟子) 장일순 씨와 아주 친했다. 내가 민정당의 정책위의장에 두 번째 되었을 때 전 여사는 장일순 씨가 보내는 그의 난초 그림을 전해 왔다. 장 씨는 김지하 시인에게 난초 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둘의 난초 치는 기법은 그래서 비슷한 데가 있다.

전 여사에게는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다. 일본어에 '겐마꾸(剣幕)'라는 단어가 있는데 서슬이 퍼런 위엄을 뜻한다. 그런 무서운 데가 전 여사에게도 있다. 나는 전 여사와 '골백번'술자리를 같이 했다. 2, 30번이면 '골백번'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인데, 나는 분명 50번은 넘는 술자리와 대화를 가진 것 같다. 그래서 전 여사의 체질이랄까 성깔이라 할까를 대충 짐작한다고 할 수 있다.

TV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시네텔(cinetel, cinema와 television의 합성어)을 경영한 때문도 있어 전 여사는 방송·TV의 인사들과 특히 친하다. 표재순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유명한 가수 조용필 씨와도 각별하다. 플라자 호텔에서 있는 그의 행사에 전 여사가 오라 해서 갔더니 조용필 씨는 전 여사를 어머니로 대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보니 그는 체구가 아주 작았다. 전 여사는 그를 여러모로 보살펴주었다.

조용필 씨는 전 여사 차녀의 생일에 기타를 갖고 와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고, 전 여사에게 골프채를 선물하기도 하였다는데 전 여사는 골프는 안친다. 그 점은 나와 공통점이다. 전 여사 작사, 조용필 작곡의 노래 <생명>, <한강>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들어보지는 못했다. 물론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로 마음을 사로잡는 조용필의 '친구여' 수준은 아닐 것이다.

전 여사는 자신이 직접 취재에도 뛰어들었다. 서강대의 최창섭 교수와 함께 공산국가에서 막 벗어난 캄보디아로 날아가 훈센 총리와 한국 언론으로는 첫 단독 인터뷰를 했다. 그 인터뷰가 국내 TV에 방영되는 것을 보았다. 또 일본에서 과격 학생운동 단체인 '젠가꾸렌(全学連)'의 분파인 '가꾸마루' 등의 학생지도자들을 인터뷰했다고 자랑이다. 그러고 보면 취재력도 신문기자 못지않다. KBS에서 방영한 한일 문화인들의 이른바 '선상토론'은 화제가 되었었다. 거기에서 '빠가야로(이 바보 녀석)'라는 폭언도 나와 더욱 그렇다. 그 아이디어가 전 여사의 것이란다.

가장 이름이 난 것은 전 여사의 송년회다. 매년 연말이면 백 명쯤, 아니 그 이상의 인사를 초청한다. 비용은 각자가 알아서 가져오게 되어있다.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시작한 송년 모임이 확대된 것이다. 홍익대 근처의 맥주홀에서 자주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계속된 곳은 홍대 앞 골목에 있던 <동촌>이다. 오래전에 서울시청에서 30곳 쯤 서울 음식점 명소를 골라 발표했을 때 다동의 <남포면옥> 등과 함께 <동촌>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10년 훨씬 넘게 그 송년회에 무슨 단골처럼 참석한 듯하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하니 그 송년회에는 5단계쯤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시대의 변천과도 관련이 있다. 거기서 세월의 변화를 사회학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면면들은 우리나라 정치 변화, 사회 변화의 거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1기는 김지하 시인 등 재야측이 주류인 시기. 소설가 박범신 씨와 진보적 경제학자 조용범 교수가 특히 눈에 띄었으며, 월간 <정경연구>의 안인학 편집장이 간사 역할을 하였다. 그 끝 무렵에 나도 나가기 시작했다. 간사역은 그 후 MBC 간부 위호인, 조선일보 문화부장 정중헌으로 인계되어 나갔다. 제2기는 원주의 재야 민주운동의 대부 격인 장일순씨, 우리밀운동의 박재일씨 등이 무게중심이며 정중헌씨 등 조선일보 사람들과 표재순씨 등 TV 간부들이다. 제3기는 많이 달라진다. 한번은 좀 일찍 가 있었더니 김근태 의원이 나타난다. "어, 대권 후보감이 왔군" 했다. 좀 있으니 손학규 의원이 온다. "두 번째 대권 후보감이 오는군." 이어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이 나타난다. "세 번째 거물이 오는군" 했다.

그 무렵 나와는 마주치지 않았지만 민주당의 한화갑 의원도 자주 나타난 모양이다. 그 모임은 4, 5시간 계속되는데 사람들이 편리한 대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전모를 알기가 어렵다. 다만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와서 흥을 돋우기도 하고, 춤꾼 이애주 교수가 나타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등 인물 구성도 정교한 짜임새가 있다. 이애주 교수는 좀처럼 춤사위를 보여주지 않는다. 딱 한 번 본 일이 있다.

특히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이 가끔 나타났다. 그는 전 여사를 '어머니' 라고 꼭 호칭하는데 왜 그런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청진동의 옛 동양통신사 건물을 시네텔이 통째로 사용한 적도 있고 보면 김석원씨 가문과 전 여사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여하튼 그런 일들을 전혀 캐묻지 않으니까 전 여사가 나를 부담 없이 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제4기에 이르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이명박 씨의 멘토라는 최시중 씨가 등장한다. 이동관 동아일보 정치부장이 나왔는데 그는 MB청와대의 대변인이 된다. 동아일보의 김순덕 논설위원, 한나라당의 전여옥 의원의 얼굴도 보였다.

제3기에 나는 김종인 의원을 가끔 나가자고 유도했었다. 그리고 제4기가 되면서 은퇴(?)했다. 나이도 있고, 정치상황도 바뀌고, MB패들도 만나기 싫고. 아마 그 후 제4기도 지나고 혹시 제5기쯤이 아닌지 모르겠다.

전 여사는 그의 미모와 지성을 정확하게,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활용하는 것 같다. 나를 가끔 혹시나 장치나 소품으로 사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객관적으로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기분이 좋게 지냈으니 괜찮다. 또 그럴 리도 없을 테고.

내가 김영삼 정권에서 노동부 장관으로 있을 때다. 울산의 현대중공업이 엄청난 대기업인데 거기서 노사분쟁이 장기화하여 걱정이 많았다. 현대중공업의 노조위원장 이갑용 씨와 미리 안면을 터놓았기에 그를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여 여의도의 화식집 <이어>에서 김원배 국장과 함께 저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딱딱하고 어색한 것 같아 전 여사에게 SOS를 보냈다. 전 여사가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갑용 씨는 전 여사의 그 세련된 말솜씨에 완전 넋을 잃고…. 안 그렇겠나. 서울의 난다 긴다 하는 언론인들도 감동하는 판에 울산서 올라온 노조위원장이 황홀해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노사분규의 살벌한 분위기를 상류사회의 지적 분위기로 부드럽게 한 것 같다.

이갑용 위원장은 전 여사와 아주 가까워졌다. 그 후 울산에서 구청장이 되어 서울에 올 때도 나는 안 찾고 전 여사만 방문하는 것 같다. 힐튼 호텔에서 전 여사 집 혼사가 있어 갔더니 이갑용 구청장이 미리 와 앉아있었다.

나는 기자출신이니만큼 더욱 출입기자들을 잘 다루어야 한다. 영어 고본을 사 모으는 취미라 기자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알맞은 영어책을 준다. 어느 기자는 그렇게 받은 게 10권이 넘는다고 후일담으로 말했다.

불고기, 소주를 낼 때도 그냥은 재미가 없다. 그래서 우선 동갑 친구인 고은 시인에게 부탁했다. 기자들이 고은 시인과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는 것을 그렇게 좋다고 했다. 고은 시인도 무료 봉사를 아주 잘해주었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누구를 다음 손님으로 초대하면 좋겠느냐고 했더니 당시 국회의원 정주일인 코미디언 이주일 씨를 희망한다. 나도 이주일 씨를 그 당시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여겼었다. 그것은 실제로 송해·구봉서·서영춘·이대성씨 등 여러 코미디언을 만나보고 얻은 결론이다. 탤런트 출신 홍성우 의원이 마련한 술자리에서다. 역시 즉석에서 엮어내는 재치에는 이주일 씨를 당할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정주일 의원에 부탁하니 아주 흔쾌히 응하여 기자들과 소주를 마셔준다. 기자들은 그 이상 즐거울 수가 없다. 그리고 정 의원은 캐피탈 호텔에 자기가 경영하는 나이트클럽이 있다며 기자들을 초대했다. 물론 무료서비스다.

그 다음은 전 여사 차례. 이애주 교수와 함께 왔다. 두 여류 명사가 왔으니 기자들은 한껏 고무되었다. 기자들은 전 여사의 식견에 압도되었다. 나는 그동안 전 여사를 제압하는 설득력을 가진 남성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과장 같지만 과장이 아닐 것이다. 논쟁을 되도록 피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신랄하다.

전 여사, 알아주는 통 큰 여성이어서 기자들을 2차로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나중에 시민방송의 사장이 된 김영철 한겨레 기자는 밤새도록 마신 모양이다. 그들은 녹아 떨어졌다. 글도 잘 쓰고 말도 유창한, 난다 긴다 하는 김 기자는 완전히 전 여사 숭배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전 여사가 음식 사치를 하는 게 아니다. 실 멸치와 잔 고추를 양념간장에 볶은 것을 아주 좋아하고, 우리의 전통적 그런 식성이다. 그래서 일본 특파원들이 그 맛을 더욱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여담으로 덧붙인다면 노동부 장관시절 정진우 감독의 신세도 졌다. 그가 프랑스 영화 <제르미날>을 수입했다. 에밀 졸라 원작의 <제르미날>은 노동 문제가 주제인데, 미국이 그 당시 <쥬라기공원>이라는 공상 과학영화를 만들어 자랑하는데 대항하여 프랑스가 명예를 걸고 만들었다는 명작이다. 비참한 노사분규의 현장이 나온다. 소설은 손꼽는 명작이지만 영화의 시장성은 약했다. 그것을 정진우 감독이 지난날의 친분을 생각하여 무료로 노동부에 빌려준 것이다. 이런 설명만으로 그 빚은 못 갚을 텐데….

<제르미날>이 프랑스의 노사분규 이야기라면 미국의 노사분규 이야기인 <강철의 혼>도 안볼 수 없다. KBS에서 방영된 것을 보았는데 노사쟁의의 결말은 역시 쓰디 쓴 것이었다. 여하간 프랑스와 미국의 노사문제 영화를 모두 갖다보아 밸런스를 유지한 셈이다. 영화가 끝난 다음 장관의 논평을 요구받았지만, 마음이 언짢고 하여 각자가 생각하라고 함구했다.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다. 노동문제는, 더구나 노사쟁의는….

전옥숙 여사라는 거물여성, 내가 '여왕봉'이라고 이름붙인 수준 높은 두뇌의 여걸과의 세월은 여러 가지로 즐거웠고 배울 바도 많았다. 책에 없는 것을 배운 것이다.

MB정권이 별로 탐탁지 않고 싱겁게만 여겨져 그 멘토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모임은 멀리하게 되고 그 후로는 소원해졌다.

아주 최근에 얼마전까지 중앙일보 부사장 겸 주필을 했던 문창극 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는 2년전쯤까지 전옥숙 씨를 가끔 만나 둘이 식사를 하곤 했다고 말한다. 그는 20년쯤 후배 언론인이다. 그 교제 범위의 광범함이여! 여자 홍길동이라 할까, 여하튼 수수께끼와 같은 사교력이다.

이제 지난날을 정리해 보면…. 전 여사는 정치적 감각이 탁월하다. 그리고 문화현상 전반에 관한 관찰도 정확한 것 같다. 그러니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다. 미인이기에 상류층의 교제가 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인, 언론인, 작가, 사업가… 모든 분야의 일급 인사들과의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교류가 또한 사람의 수준을 높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본통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비교적 상류사회와 교류했다. 일본말도 아주 썩 잘한다. 일본에 오래 머물기도 하였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일본의 상류층은 한국과 비교하여 수준이 윗길이다. 서양화가 먼저 되었기 때문인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개화 이전에는 우리가 앞서기도 했지만. 그러니 전 여사도 한국 평균보다는 수준이 높을 수밖에.

남성들에게 영감을 주는 여성을 희랍 신화에서 용어를 빌려와 '뮤즈(詩神)'라 한다. 마침 <20세기 뮤즈>라는 영역된 프랑스 책이 있어 살펴보니 루이스 살로메(루 살로메)가 첫 번에 나온다. 러시아 태생으로 나치시대 독일에서 사망한 루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정신분석학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과 사귀며 그들에게 "섬광처럼 자극을 주는 뮤즈"가 되었다 한다.

요즘 같으면 존 레논의 부인이었던 오노 요코가 떠오르는데, 굳이 한국에서 찾는다면, 내가 아는 한정된 범위에서는, 전옥숙 여사가 그럴듯하게 부각된다.

그 주변에는 김지하 시인, 이병주 소설가, 조용필 가수, 장일순 민주화 운동 대부 등이 맴돈다. 열거하자면 각계각층 부지기수다. 전 여사는 그들의 '뮤즈'가 아닐까.

마이크를 잡고 중년이 지난, 약간 길쭉한 얼굴의 미녀가 눈물이 나올 듯한 표정으로 애절하게, 안타깝게 부르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그 강한 인상을 잊기 어렵다

(전 여사는 자기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고 단호한데, 그 시대의 정치·사회 풍속사를 알리기 위해 쓰는 일이니 양해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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