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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젖까지 끊고 회사에 복귀했더니…"

[세상이 'J'에게·④] "우리는 노동자다"

재능교육 학습지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노동권을 찾고자 거리로 나선 지 2012년 1월 28일로 꼬박 1500일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서울 한 복판, 시청광장에서 보이되 보이지 않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 오랜 한뎃잠에 몸도 마음도 축이 나고, 바닥의 한기도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언제까지 이들이 풍천노숙을 해야할까. 재능교육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이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프레시안은> B급 좌파가, 작가가, 노동운동가가, 청년이, 혹은 당 대표가 그들에게 전하는 목소리를 릴레이로 싣는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재능out 국민운동본부에서 공동으로 기획했다. 그들이, 혹은 세상이 재능노동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편집자>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는 막 아이엠에프 경제위기를 맞은 뒤였다. 바로 전해까지만 해도 연말이면 학과실로 기업의 원서가 넘쳐났다고 했는데 우리 때는 그것마저 뚝 끊겼다. 취업을 어떻게 하냐고 발을 구를 때, 이상하게 들어가기 쉬운 곳이 있었다.

학습지 교사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여대생이면 된다고 했다. 대기업조차 인원을 동결하고 여학생들한테는 원서조차 잘 안 내주려 하는데 다른 데보다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그곳이 든든하면서도 미심쩍었다. 별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학습지회사에 원서를 내고 기다리던 중 우연히 친구가 권한 벤처기업에 들어갔다. 토요일까지 하루 열두 시간을 일하고 사대보험이 안 되는 일자리를 구했으면서 감지덕지라고 여겼다. 아마 학습지 교사가 되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목숨 걸고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딱 십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나도 노동자이고 싶다>는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길거리에서 한 학습지교사를 만났다. 그이는 출산 후 복귀했을 때 자신이 가르치던 곳보다 세 배 더 많은 지역에서 일하라고 요구받았고 그에 대해 교사를 충원해달라고 요구했다가 퇴사 당했다. 그녀를 쫓아내고 회사는 같은 자리에 세 명의 새로운 학습지교사를 일하게 했다. 과도한 업무량을 지시한 것은 출산한 여성노동자를 해고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복직하겠다고 했다. 자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습지 교사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여성노동자가 감히 회사에 무얼 요구한다면 본보기로 그 노동자만 자르면 된다고 여겼지만, 그 여성노동자에게 일터는 목숨을 걸고 되돌아가야 할 의미가 있었다. 자기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여성노동자의 권리의 문제라고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2012년, 재능교육 여성노동자들은 1500일이 넘게 길에서 외치고 있다. 단체협약을 인정하라고 재능교육 여성노동자들은 요구했다.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노동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때나 지금이나 회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과세계(이명익)

발 묶인 모성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학습지교사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지만 그이들은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름에 가려 노동법 보장을 받지 못했다. 모성법 보호도 받지 못한다. 임신 초기라 해도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아이들을 만나 가르쳤다. 수업을 건네받을 교사가 없다면 만삭이 되도록 수업을 다녀야 했다. 출산휴가는 무급휴가였다. 출산에 대한 지원이 없었기에 회사는 손해 볼 것 없었다.

출산휴가 6개월 이내 복귀하지 않으면 재계약을 않거나 선별복직을 시켰다. 게다가 조합원이라고 하면 불이익까지 당했다. 출산은 조합원과 비조합원을 갈라 해고의 수단으로 자의적으로 이용되었다. 억지로 젖을 끊고 온 아이를 뒤로 두고, 만삭까지 오르내리던 계단 앞에서 발목이 묶였다. 복귀했는데도 회사는 일을 주지 않았다. 몇 개 월 동안 급여 없이 지내 무일푼이었는데도 노동자가 아니라 했다.

특수고용직이라고 하면 노동권을 보호해줄 필요가 없다는 간교한 계산에서였다. 1999년 노동부가 재능교육 교사들이 설립한 노동조합에 노조설립필증을 교부했는데도, 회사가 만든 교재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회사의 지시대로 일했고, 월급에서 원천징수를 했는데도 그랬다. 2007년까지 임금단체협상을 갱신해왔으면서도 그랬다. "학습지교사는 근로자로 볼 수 없어 이들을 조합원으로 하는 노조는 노동조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권리를 외치는 한 뼘 공간

농성을 하면서 용역깡패로부터 상상하지도 못할 성희롱을 당했다. 치외법권 지대였다. 사업장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사업주가 책임을 지라고 하고, 하청노동자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원청이 책임지라고 부르짖기라고 하겠는데, 사실을 입 밖에 뱉어낼 수 없었다. '사무치는 말을 듣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무섭지 않은 척 버티고' 견뎌야 했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노동자들은 마치 철거민처럼 고립되어 비국민으로 추방된 이들처럼 폭력을 당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사회는 싸늘하고 무관심했고 법이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걸 이용해 회사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짓밟았다. '농성장은 비인간적인 장소였'지만 죽지 않았으면 기어서라도 나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해고노동자가 지켜낸 자리였다. 학습지교사의 노동권을 외치는 세상의 단 한 뼘 자리였다.

여성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이 종종 특수고용노동직이었고, 노동권도 모성권도 보호받지 못하는 곳이었기에, 여성노동자들이 다수를 이루는 작업공간에서 권리를 보장받도록 투쟁하는 것,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생겨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몸서리나는 추위가 나이테처럼 뼛속에 새겨지면서 아주 천천히 농성장은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투쟁하고 의미를 나누는 자리가 되어갔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노동자라는 이름을 인정하는 것은 그동안 노동자들이 싸워 얻어온 권리를 노동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단체협약, 단결권, 해고제한, 최저임금법, 노동시간의 권리 같은 얼핏 딱딱하게 들리는 말들은 여성노동자들에게 일한 만큼 임금을 받을 권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권리, 이유 없이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 아이를 낳거나 기르고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있는 권리, 희롱과 모욕을 당하지 않을 권리, 시민으로 함께 살아갈 권리 같은 일상을 의미했다.

여전히 대학 나온 젊은 여성들이 취업 철이면 많이 들어오고,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삼십대 후반이나 사십대 여성들이 들어오는 학습지회사에서,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이들이 많고 또 비슷한 회사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우리는 노동하고 있다고 15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이들은 외쳐온 것이다. 그 불길 같은 시간을 견뎌온 것이다.

- 이에 대해 재능교육은 학습지 교사는 대법원, 대검찰청, 행정법원, 고용노동부, 노동위원회에서 모두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판단하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단체협약은 대법 판례에 의해 어렵다고 알려왔습니다.

- 재능교육이 교사들을 계약 해지한 이유는 조합 활동 때문이 아니라 2009년 7월부터 불매운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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