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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무릎에 무릎베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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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무릎에 무릎베개하고

[강은 강처럼 흐르게 하라·3] 강의 원본을 돌려 달라

강을 걷다 보면 안다. 강을 따라 걷는 일이 곧 강과 구름과 바람과 햇볕과 사람이 쓴 이야기들을 두루 읽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강을 잃는 일이 강만을 잃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칠월 십칠 일과 십팔 일, 강에 대한 말들이 지금처럼 진부하지 않았던 때를 떠올리며 밑줄을 긋듯 낙동강을 걸었다. 가장 황폐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져올 수는 없을까. 그 강의 문장을 읽어오는 것만으로 강의 존재 이유를 침울하지 않게 증명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흐르는 강물을, 뜨거운 모래밭을 걸으며 목격한 참혹한 풍경 앞에서 그 바람은 쉽지 않았다. 북북 찢긴 자연 앞에 선 자가 누군들 그 오만을 고발하고 싶지 않겠는가.

▲가장 황폐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져올 수는 없을까. 그러나 흐르는 강물을, 뜨거운 모래밭을 걸으며 목격한 참혹한 풍경 앞에서 그 바람은 쉽지 않았다북북 찢긴 자연 앞에 선 자가 누군들 그 오만을 고발하고 싶지 않겠는가. ⓒ김흥구

추함을 말하기 위해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 추함을 추하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서 더불어 오래도록 앓을 강의 시간을 가지고 나는 돌아왔다. 그 축축한 시간 속에서 며칠 근육통을 앓았다. 강을 읽고, 강을 잃고, 강을 앓는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을까. 죽은 결론을 고쳐 쓰며 다시 시작을 향해 쓰이는 책, 그것이 강이 될 수는 없을까.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 시간으로부터 온, 그날 그곳에서 보고 들은, 강의 입을 따라 흐르고 흘러 골골샅샅이 구전(口傳)되는 이야기들의 일부이다. 삽질―중장비질―에 여념이 없는, 귀 막고 눈 가린 그들이 듣도 보도 못한, 하물며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이야기. 나와 당신들이 어쩌면 잠자코 잊고 있었던 강의 서사. 자, 강의 무릎에 무릎베개하고. 옛날 옛날에, 아니 지금 지금에.

달의 뿌리

낙동강 사업 39공구 주변 마애리 마애습지가 달이 뿌리를 내린 곳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나, 그 동네 아낙들은 보름이 되면 배가 부른 달의 빛을 받아 유달리 노른자가 짙어진 계란후라이꽃을 보러 삼삼오오 밤마실을 나온다. 그녀들이 안 계시면 후라이 깔깔깔 강변을 거닐 때 아가미에 달빛을 머금은 물고기들도 휘영청 떼를 지어 산책하니, 실은 밤물결 위에 뜬 달은 그 물고기들의 아가미에서 빠져나온 둥근 숨소리다.

배롱바람간지럼나무

낙동강 준설사업이 진행 중인 병산서원 앞 배롱나무총각들은 유달리 매끄러운 피부 때문에 간지럼을 잘 타니, 이를 잘 아는 처녀바람들은 그 병산서원 앞을 지날 때면 쉬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그 숱한 총각들의 겨드랑이를 살곰살곰 간질이며 머물다 간다. 하여, 한 달포 이 배롱나무총각들의 목젖 빛이 가장 붉어지는 때에 이들을 일러 부르길, 배롱바람간지럼나무라 한다. 그즈음 동네 시집가고 장가드는 처녀 총각들이 많은 게 꼭 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온밤이꼬박고라니

영주댐이 들어서면 사라지게 될 내성천 강변에 가보면 별모양 자국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달리기를 좋아하는 온밤이꼬박고라니 떼가 온밤을 꼬박 새우며 달려 만든 발자국들이다. 이 온밤이꼬박고라니 떼가 또르륵 또르륵 소리를 내며 밤을 달릴 때 휘청휘청 물억새에 맺힌 초록 물방울들이 모래밭으로 후두두두두두 떨어져 내려 온밤이꼬박고라니 떼들이 곤히 잠든 강변의 새벽은 푸른 물이 든 별밭이 된다. 모두 잠든 후에 별밭 억새 사이에서 뜨거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건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암수달 병법

청강(淸江)부대가 투입된 낙동강 35공구를 오래전부터 지켜온 것은 암컷 수달들로만 이루어진 암수달자매회이다. 암수달자매회는 물속 골목길을 훤히 꿰뚫고 있어 적의 옆구리를 찌르는 선제공격에 능숙하니, <손녀병법>에 보면 이러한 암수달자매회의 물길 병법을 활용한 병술이 자세하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저녁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암수달자매회들의 사통팔달 물길이 물 위로 두둥 실실 떠오른다.

▲ 보랏빛 낙조가 종종 벌레 대신 물고 가는 것은 사람의 혼이다. ⓒ김흥구

보랏빛 낙조

부릴 땅을 다 내어주고 보상금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낙동강 갈밭 내외가 요즘 들어 매일 저녁밥을 먹고 경천대 강변에 죽은 듯 나앉는 것은 낙조를 보기 위해서다. 풍덩풍덩 물수제비를 뜨며 어둑어둑한 마음을 건너가는 몽돌들이 하나둘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 낙조는 고요히 태백의 검은 바람을 물고 와 보랏빛 날개를 가지런히 모으고 물 위로 내려앉는다. 이 보랏빛 낙조가 종종 벌레 대신 물고 가는 것은 사람의 혼이다.

강이 사라지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서 말랑말랑 순해진 귀를 열고 저 달뿌리풀배롱나무고라니수달낙조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올 수 있을까. 강의 쓸 권리를 생각한다. 강이 강 자신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자유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읽고 싶은 강은 그들이 제멋대로 지우고 다시 쓴 심의된 강이 아니라, 강이 강처럼 흘러 쓴 강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마땅히 요구한다. 나에게 강의 원본을 돌려 달라. 나에게는 강의 원본을 읽고, 쓸 권리가 있다.

▲ 내가 읽고 싶은 강은 그들이 제멋대로 지우고 다시 쓴 심의된 강이 아니라, 강이 강처럼 흘러 쓴 강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마땅히 요구한다. 나에게 강의 원본을 돌려 달라. ⓒ최항영

이번 문화예술인들의 낙동강 도보 순례의 앞서거니 구호는 '강은 강처럼 흐르게 하라'였고, 뒤서거니 구호는 '공무도하(公無盜河), 우리에게서 강을 뺏어가지 마세요, 아저씨'였다. 자연의 본래 이야기가 굳이 지워진 빈 페이지의 세계가 얼마나 황폐하고 심심할지, 생각을 좀 하세요. 아저씨.

첨언

강을 걸으며 들었던 사람의 말.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동화를 참 안 읽나 봐요." 동화책은 어린이들만, 어린 시절에만 읽는 게 아니다. 동화적 상상력이 결핍된 어른들이 자연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자르고 뽑고 갈아엎고 쫓아내는 것뿐이다. 동네 놀이터에 한번 나가봐라. 꼬맹이들은 이렇게 자연과 사귀며 논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쥐새끼 반찬. 죽었니? 살았니? 죽었다!

이번엔 '4대강 참사'다. 막무가내식 개발 정책으로 용산에서 5명의 철거민이 목숨을 잃은데 이어, 이번엔 4대강의 현장에 기대 살아온 숱한 생명들이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사그라지고 있다. 강가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아온 이름없는 풀과 벌레들부터, 이들의 죽음을 두고만 볼 순 없다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수행자까지, 그렇게 꺼져가는 많은 '생명들' 앞에 개발의 삽날은 냉정할 뿐이다.

지난해 용산 참사에서 드러난 '개발 시대'의 잔혹성을 기록해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문화예술
인들이, 이번엔 4대강의 현장으로 나섰다. '작가선언 6.9'는 지난해 용산 참사 시국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으로, 이번엔 '4대강 참사'의 현장에서 목도한 현실을 시와 글로, 그림으로 표현해 <프레시안> 지면에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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