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사후 '거짓 결혼식', 그 배후엔 놀랍게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2>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민주화는 대세, 그러나 의견 차이 조정은 만만찮은 과제였다

프레시안 : 1979년 독재자 박정희는 부하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마땅히 민주화로 나아갔어야 하지만, 유신 잔당의 발호로 19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8년이나 더 군홧발에 짓눌려야 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그리고 10·26 이후 1980년대 전반기까지 상황은 어떠했는지를 짚어봤으면 한다. 우선 10·26 직후 정세는 어떠했나.

서중석 : 김재규의 거사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사망했다. 그다음 날 새벽 3시 45분경 비상 계엄이 선포됐다. 계엄 선포 시각이 언제인지도 새벽 4시, 4시 15분 등 자료마다 다르게 나오는데 3시 45분 이게 제일 맞을 거다. 그때 국무회의에서 계엄을 선포했고 그러면서 새로운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

외신에 나온 것처럼 10·26 후 불과 며칠 안 지나서 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이제 유신 체제는 바꿔야 한다. 민주주의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물론 그중 일부가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는 했다. 그리고 일반인들이야 다들 이제는 민주화로 간다는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계엄사령관을 맡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즉 새로운 실세, 실권자로 볼 수도 있던 이 사람은 한국이 민주화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견해를 여러 차례 밝혔다. "군이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그럴) 여력도 없을뿐더러 곧 우리의 의무를 포기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치 권력의 공백기에 새로운 정치 권력을 창출하는 데 자신은 끼어들지 않겠다는 얘기도 했다. 민주화가 대세일 뿐만 아니라 군이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른 군인들도 대체로 비슷했는데, 이제는 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군 내부에서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하나회 쪽은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을 상당히 강하게 갖고 있다는 게 곧 드러나긴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정승화나 새로 정권을 담당하게 된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 그리고 신임 총리 이런 쪽에서는 김대중, 김종필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게 여기저기서 노출됐다. 김영삼에 대한 것보다는 주로 김대중, 김종필 이 두 사람에 대해 그랬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을 배제하고 민주주의로 갈 수 있겠느냐,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라는 광범위한 방향에는 군이건 정부 쪽이건 민간인이건 대개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사실 의견 차이가 상당히 컸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어떤 방식으로 조정할 것인가, 이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된다. 독재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의 죽음으로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면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체육관 대통령 선출 후 개헌', 민주화 일정 발표한 최규하

ⓒ오월의봄
프레시안 : 당시 정치권의 핵심 사안은 새로운 최고 권력자 선출과 개헌 문제였다. 이것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왔나.

서중석 : 1979년 11월 5일, 10·26으로 휴지 상태였던 국회가 속개됐다. 이날 김영삼은 제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3개월 안에 대통령을 선거로 직접 선출하자고 주장했다. 유신 쿠데타 이전 즉 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가자는 건, 몇 개월 부분은 차이가 날 수 있지만 김대중 생각하고 같다고 볼 수 있고 나중에 김종필도 똑같은 입장을 밝히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권력 핵심과 관련 있는 쪽에서는 미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점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던 정치 일정에 대해 드디어 11월 10일 최규하가 발표하게 된다. 최규하는 시국 특별 담화에서 "헌법에", 이건 유신 헌법을 가리키는데, "규정된 시일 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되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간단히 얘기하면, 유신 헌법에 의해 빨리 새 대통령을 뽑는 절차를 밟아 대통령 권한 대행인 최규하 자신이 권한 대행 자를 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통령이 된 자신은 또는 새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채우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헌법을 바꾸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치르겠다는 얘기였다. (박정희는 1978년 12월 두 번째 체육관 대통령에 취임했다. 따라서 만약 박정희 후임이 박정희의 남은 임기를 채울 경우 국민들은 1984년 말까지 또다시 유신 헌법에 따른 체육관 대통령의 통치를 받게 돼 있었다. 그러나 그건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편집자')

최규하가 이런 발표를 한 날 공화당은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김종필이 유신 헌법 방식에 의한 대통령 후보로 나서려 했다고 돼 있다. 그렇지만 공화당이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발표한 건, 11월 10일 이때쯤 돼서는 김종필한테 그런 생각이 없어졌거나 없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틀 후인 11월 12일 공화당은 박정희 후임으로 김종필을 총재로 선출했다. 김종필은 바로 김영삼과 회동해 정치 현안을 논의하게 된다.

프레시안 : 김종필 본인은 '1979년 그때 입후보해 체육관 대통령이 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1987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서중석 : 그건 김종필 주장이다. 그렇지만 글라이스틴도 어디선가 들은 정보가 있었으니까 자기 책에 그렇게 써놓지 않았겠나. 지금으로서는 둘 중 어느 쪽이 사실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다만 1979년 11월 10일쯤 와서는 김종필이 그 가능성을 더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체육관 대통령 선출 날짜가 12월 6일이었으니까 11월 10일경에는 최규하 혼자 나오는 걸로 어느 정도 정리된 것 아니겠느냐고 볼 수 있고, 그런 것과 연결되는 속에서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공화당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라고 난 본다.

하여튼 11월 10일 최규하 권한 대행의 민주화 일정 발표에 민주화 운동 세력은 불만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가 죽었는데 어떻게 유신 헌법이 계속 기능하고 그 헌법으로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다는 말이냐', 이게 제일 큰 이유였다. 민주화 일정이 불분명하고 좀 길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작용했다. 그런 속에서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라는 게 벌어지게 된다.

"'통대' 반대" 도전한 재야의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계엄 상태였기 때문에 결혼식을 위장해서 이 모임을 열었다. 신랑, 신부도 정하고 청첩장까지 돌렸다(신부는 가상 인물). 그래서 이 사건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라고 부른다. YWCA에 민주화 운동 세력이 다수 모인 것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통대')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저지하고 민주화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이 모임을 '통대' 선출 저지 민주화 촉구 대회라고도 부른다.

결혼식 형식을 차례로 밟았는데, 신랑 입장과 동시에 사방에서 여러 유인물을 뿌렸다. 그러면서 '통대'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취지문을 전 공화당 국회의원이자 3선 개헌을 반대했던 박종태가 낭독했다. "유신의 청산을 위한 유신의 연장이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저 녹슨 독재의 쇠사슬의 마지막 허리를 끊어버리자." 이제 결혼식 위장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이다.

참석자들은 '통대'에 의한 대통령 선출 반대, 거국 민주 내각 구성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바로 그때 계엄군이 몰려왔다. 계엄군은 닥치는 대로 참석자들을 두들겨 패면서 끌어냈다. 그러자 참석했던 사람들 가운데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150여 명이 시위대를 편성해서 스크럼을 짜고 "유신 철폐", "'통대' 반대"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조흥은행 앞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렇지만 뒤쫓아 온 계엄군에 의해 이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무참히 끌려갔다.

프레시안 : 끌려간 사람들은 어떤 일을 겪었나.

서중석 : 이날 계엄군한테 연행된 사람이 140여 명이라고 하는데, 젊은 군인들한테 정말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연행된 사람들 중에는 유신 시대에도 가혹하게 고문당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때 계엄군한테 구타도, 고문도 아주 심하게 당했다. '군인들이라 역시 다르다. 지독한 놈들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할 정도였다.

제일 대표적으로 심하게 고문당했다고 하는 김병걸 교수는 고문 후유증으로 상당 기간 보행에 어려움을 겪게 됐고 오랫동안 서 있을 수도 없었다고 그런다. 백기완 소장도 지독하게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 함석헌 선생 같은 분조차 심하게 능욕을 당했다고 나와 있다. 백기완은 이때 심한 고문을 당해 한때 극심한 기억 상실증에 걸렸을 뿐만 아니라 조그만 금속성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정신 착란증, 협심증 같은 것들이 겹쳐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고관절과 무릎 관절, 5번 요추의 극심한 통증으로 잠도 못 자고 해서 병보석으로 석방은 됐는데, 석방될 때 체중이 불과 40킬로그램밖에 안됐다고 그런다. 나한테 이 양반이 그 직후에 개를 여섯 마리 잡아먹고 간신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이처럼 이 대회는 너무나 무참하게 계엄군한테 깨져버렸다. 그뿐 아니라 다수가 끌려가고 상당수는 구속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그런데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느냐 하는 문제가 일부에 의해 제기됐다. 이 부분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김정남 이분도 <진실, 광장에 서다>에서 '의문점이 있다'는 걸 지적했는데, 이도성 기자가 쓴 <남산의 부장들> 3권에 그 의문점에 관한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온다.

전두환의 보안사, 재야의 도전 부추긴 후 재야를 짓밟다?

▲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1979년 11월 6일). ⓒ연합뉴스
프레시안 :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으면 건장하고 풍채가 좋은 백기완 소장의 몸무게가 40킬로그램으로 줄었을까 싶다. 어쨌건 이 사건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던 것인가.

서중석 : 일설에는 이게 위장 결혼식이 된 것도 해위 윤보선 쪽에서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서 결혼식을 위장해 그 집회를 열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 사건에 윤보선 쪽 의견이 많이 반영됐다는 이야기인데, 계엄 상태에서 어떻게 그처럼 그래도 상당히 규모가 큰 집회를 열 수 있었느냐 하는 게 의문이다.

10·26 이후 윤보선 집에 여러 장교가 찾아왔다고 한다. 물론 윤보선만 어느 쪽 장교인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는데, 그중에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쪽도 있었고 전두환 보안사령관 쪽도 있었다고 그런다. 윤보선 집에 와서 얘기도 듣고 정보도 캐내려고 그랬던 건데, 그것뿐만 아니라 대령 계급장을 단 어떤 장교가 '그런 걸 해도 좋다', '집회가 열리면 협조하겠다'는 식의 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얘기 때문에 윤보선 쪽이 주도해서 11월 24일 이 집회가 있게 됐다는 것이다. 윤보선 쪽과 달리 김대중 쪽은 '이 집회는 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참석하지 않았다.

이건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이렇게 집회를 열도록 한 게 어느 쪽이겠느냐 하는 건데, 전두환의 보안사 쪽이 아니겠느냐고 보고 있다. 김대중 쪽의 핵심 인물인 김상현이 바로 이 사건 직후 보안사에 연행된 걸 보더라도 그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다. 재야의 11월 24일 도전이 있은 직후 김상현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합수부, 본부장 전두환)로 끌려갔는데, 거기서 전두환 소장을 만났다고 한다.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국가 권력을 탈취하겠다는 생각을 전두환 보안사령관 쪽이 상당히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재야도 자기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 보고 '그러니 재야에 대해 공작도 하고 재야를 무력화하겠다', 이런 목적으로 11월 24일 행사 같은 것을 열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준 것 아니겠나.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은 10·26 이후 재야의 첫 번째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편집자')

이 사건 이후 서울 쪽은 워낙 세게 당했기 때문에 위축돼서 그해 연말까지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끌려간 김상현한테 전두환이 했다는 얘기도 심상치 않다.

프레시안 : 전두환이 어떤 얘기를 했다고 김상현은 증언했나.

서중석 : 뭐냐 하면, 김상현이 전두환을 만났을 때 보니까 김대중 진영에서 재야와 학생을 동원해 정권 타도를 시도하는 것으로 전두환 쪽에서 잘못 짚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에는 '학생들이나 재야의 움직임과 관련해 김대중 쪽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잘못 인식한 점도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김대중 쪽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인식한 면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난 이 부분이 나중에 일어나는 일들과 연결되는 면이 좀 있다고 본다.

하여튼 전두환은 전투복 차림으로 김상현 앞에 나타나서 '재야에서 혼란을 유도하며 시위를 벌이면 참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자기는 생사를 초월한 지 오래라고 하면서. 여기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를 잘 생각해보면, 이건 합수부장 또는 보안사령관 입장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를 영위(營爲)하는 자의 입장, 그러니까 집권 당시 박정희의 입장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상현은 또 하나의 중요한 증언을 했다.

김대중이 최규하 대행 체제 강화를 구상한 이유

프레시안 : 무엇이었나.

서중석 : 당시 김대중은 복권되지도 않았고 여전히 연금 상태로 묶여 있었다. 그래서 대외 활동도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도 YWCA 위장 결혼식에는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김대중이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그 대리인 격으로 김상현이 활동했다. 그렇게 해서 김상현은 안국동 윤보선 자택 모임에도 참석했는데, 거기서 윤보선은 최규하 권한 대행을 즉각 퇴임시키고 조속히 범민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바로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김대중은 다른 주장을 했다고 한다. 김상현에 따르면, 김대중은 대통령 보궐 선거를 저지하고 최규하 권한 대행을 퇴진시키면 무정부 상태가 온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 헌법으로 개헌하기 위해 최규하 권한 대행 체제를 오히려 강화해줘야 하며, 그 체제로 직선제 개헌을 주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군부가 나온다고 내다봤다는 것이다.

무서운 현실을 정확히 꿰뚫었다고 난 본다. 현실적으로 그 방법 이외에는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김대중이 복권되기 전까지는 이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최규하 권한 대행 쪽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대화를 하면서 최 대행 체제를 강화해서 정치 군부를 억압하고, 그러면서 직선제 개헌 쪽으로 유도해가는 그 방식 말이다.

물론 재야인사, 민주화 운동 세력 쪽은 '유신 헌법을 빨리 폐지하라. 민주주의 방식으로 새롭게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당연히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 정치인이라면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배려해야 할 게 있는 법이다. 김상현의 주장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김대중이 그 당시 갖고 있었다는 정세 인식은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되새겨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11월 24일 대회 전에 김상현은 김대중의 그러한 입장을 가지고 모임에 참석해 '그런 의미에서 11월 24일 대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고, 그러면서 김대중 쪽은 그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11월 24일 대회와 관련해 나타났다.

프레시안 :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후 정국은 어떻게 돌아갔나.

서중석 : 그로부터 이틀 후인 11월 26일 국회에서는 여야 만장일치로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설치를 가결했다. 12월 3일에는 백두진이 국회의장에서 사임했다.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를 여야 동수로 구성하기로 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1960년 4월혁명 이후 민주당과 자유당이 개헌을 할 때, 자유당이 압도적 다수였지만 민주당이 주도하면서 자유당을 끌고 가지 않았나. 1979년 이때의 경우 여권은 유신정우회까지 합치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다. 야당은 3분의 1밖에 안됐다. 그런데도 여야 동수로 했다는 건 야당과 개헌 문제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야당에 협조해주겠다는 걸 말해준다. 이것하고 아까 김대중이 얘기한 걸 잘 연결하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12월 6일 모두 알다시피 최규하가 유신 헌법으로 '통대'에 의해 대통령이 됐다. 7일에는 8일 0시를 기해서 긴급 조치 9호를 해제하기로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12월 8일 김대중 연금을 해제했다. 10일에는 부총리였던 신현확을 총리로 임명했다. 당시 총리는 공석이지 않았나.

여기까지는 정치 궤도가 대체로 제 궤도에 들어서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문제도 많이 있었고 균열될 조짐도 적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풀려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현확이 총리가 되고 나서 이틀 후에 그 유명한 12·12쿠데타가 일어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흔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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