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에 공작 중', 오만한 청와대의 희한한 고백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2> 유신의 몰락,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1978년 12·12선거 결과에는 정치 변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 후 정치권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12·12선거 이후 정치권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먼저 1978년 '통대'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기 전날 발기 대회를 하려고 했던 민주주의국민연합이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 연합', 줄여서 민주통일국민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범한다. 김대중이 참가해서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이 공동 의장이 됐다. 민주통일국민연합은 유신 체제 철폐 및 1인 영구 집권 종식 투쟁을 전개해나갈 것과 함께 평화적 민족 통일 달성이 지상 목표임을 천명했다.

여기서 내가 왜 민족 통일이라는 말을 강조하느냐 하면, 이 무렵부터 통일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선언문 같은 데에서나 재야 민주화 운동 단체 같은 데에서 이 말을 많이 쓰게 된다. 그러면서 재야의 가장 중심적인 조직이라고 볼 수 있는 단체 이름이 이제는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 연합'이 된 것이다. 1970년대 초 7·4남북공동성명을 전후해 통일 문제가 논의되다가 유신 쿠데타가 난 후 팍 줄어들지 않았나. 장준하가 사적으로 쓴 것을 빼면 그러했는데, 1978~1979년에 가면 통일 문제가 한국에서보다 미국 쪽 등 해외에서 더 제기된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도 이렇게 통일 문제가 민주주의와 함께 중요한 투쟁 목표 또는 활동 목표로 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공동 대표들은 이때도 가택 연금을 당한다. 그래서 윤보선이 집에서 혼자 결성 선언문을 읽었다. 그러면서 백두진 파동이라고 할까, 백두진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유신 권력의 오만함과 이철승 신민당의 무기력 드러낸 백두진 파동

▲ 백두진(1979년 3월 17일). ⓒ연합뉴스
프레시안 : 백두진은 어떤 사람이었나.

서중석 : 1979년 3월 2일 공화당과 유정회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백두진을 천거했다는 게 보도됐다. 백두진은 유정회 의장도 지낸 사람이다. 그렇잖아도 유신 체제에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정치권이건 일반 국민들이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은 사람을 국회의장으로 한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백두진을? 야당의 강력한 반대를 불러올 것이 명백한데도, 박정희의 뜻에 따라 백두진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겠다는 결정이 난 것이다.

그러면 왜 백두진을 택했느냐. 박정희는 백두진이 물불 가리지 않고 유신 체제에 충성을 다할 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1971년 12월 박정희가 국가 비상사태 선언을 하고 그것의 후속으로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국가보위법)을 내놓지 않았나. 그 당시 백두진은 국회의장이었는데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국무총리를 하다가 1971년 7월 국회의장으로 발탁된 백두진은 검은 점퍼 차림을 한 약 500명으로 하여금 국회 제4별관 주위를 에워싸게 했다. 그러한 가운데 1969년 3선 개헌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제4별관에서 질의와 토론을 생략하고 국가보위법을 단 2분 만에 전격적으로 통과시킨 장본인이었다. 백두진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앙은행 격인 조선은행에서 과장 등의 간부로 일했고 이승만 정권에서는 재무부 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그래서 관료 사회에서는 좋은 벼슬을 억세게 많이 했다는 얘기를 듣던 사람이었다.

유신 쿠데타 이후 백두진이 TV에 그렇게 자주 나오더라. 그 시기에 백두진은 관제 의원, 즉 유정회 의원을 대표해 유정회 의장이 됐는데, TV에 자주 나와 박정희와 유신 체제를 거침없이 찬양했다. 그런저런 것들 때문에 유신 쿠데타 이후 내 머릿속에는 백두진 하면 나쁜 사람, 못된 사람으로 골수에 박혀 있다. 하여튼 백두진은 제2기 유정회 의원으로 다시 낙점됐는데, 이상우가 쓴 글에 의하면 국회의장이 되기 위해 국회의장으로 선출되기 며칠 전부터 아예 부인과 함께 차지철 집에 찾아가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프레시안 : 김충식 책에 따르면 이 파동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백두진은 국회에서 '경호실장님 전상서'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는 차지철의 심복이라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스물여섯 살 차이로 파동 당시 백두진(1908년생)은 71세, 차지철(1934년생)은 45세였다. 그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만든 핵심 요인은 차지철이 막강한 실권자였다는 점일 텐데, 그런 면에서도 유신 말기 권력 내부의 기이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풍경 중 하나다. 아울러 권력의 양지만 좇은 인사라는 비판을 받던 백두진을 국회의장으로 낙점한 건 정권의 오만함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서중석 : 그러한 백두진이 국회의장으로 내정되자 야당이 반발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야당은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주장하고, 국회의장을 선출할 때 본회의장에서 퇴장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야당이 얼마나 우스운 야당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 곧 나타나게 된다. 야당이 퇴장 방침을 정하자 여권에서는 '본회의장 퇴장은 유신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이렇게 규정하면서 본회의장에 출석해 반대하라고 강요했다. 여당이 반대 방법까지 제시한 것이다. 신민당 지도부는 이것에 굴복했다. 그래서 '의사 진행 발언 기회를 얻어 백두진 국회의장 선출에 반대하는 이유를 밝히고 투표에는 참여한다. 투표 후 전원 퇴장이 아닌 일부 퇴장은 여권에서도 양해해주겠다', 이런 식의 이상한 절충안이 나왔다.

그렇지만 국회의장 투표가 있었던 3월 17일에 본회의가 열리자, 말도 안 되는 여야 협상에 반발한 신민당 의원들이 거의 다 퇴장해버렸다. 그래서 야당에서는 이철승을 비롯한 최고위원들하고 송원영 원내총무만 참석한 가운데 백두진이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백두진 국회의장 선출 과정, 이걸 백두진 파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때 김영삼은 비당권파 의원 16명과 함께 "백두진의 지명은 국민을 능멸하는 처사이며 더욱이 반대 의사의 자유마저 박탈당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야당이 반대한다는 뜻조차 제대로 펼 수 없었던 것을 가리키는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면서 아예 국회 본회의에 불참해버렸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60여 명의 신민당 의원 중 김영삼을 따르는 사람이 이때까지는 16명밖에 안 됐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소수파였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지만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명 노선에 기대를 거는 야당 의원이나 당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것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면이 백두진 파동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김재규는 왜 그날 김대중의 외출을 막지 않았을까

ⓒ오월의봄
프레시안 :
백두진 파동 후, 중도 통합론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유신 체제에 투항했다는 비판까지 받던 이철승 체제에 도전하는 움직임이 신민당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나.

서중석 : 1979년 5월 30일은 신민당 당수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대개 이철승이 될 것이라고 보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이 선거가 어떻게 될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김영삼은 이 선거에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명백히 내걸었다. 선거를 1주일 앞둔 5월 23일 김영삼은 기자 회견을 열고 "이번 도전은 당권 도전이 아니라 정권에 대한 도전이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김영삼의 이러한 발언이 나오기 전에 이미 박정희가 김영삼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김영삼이 강경 발언을 하기 이틀 전인 5월 21일,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신민당 당수 선거 출마자 중 한 명인 신도환을 자기들 편으로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는데, 그 이유로 박정희는 "신 씨 지지가 많다고 들었어. 신 씨가 정통 야당의 당수가 되는 것까진 문제가 있겠지만 그가 그 나름의 무언가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 신도환이 결선 투표에서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으면 김영삼 바람을 누르고 이철승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고, 신도환을 자신들이 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후 야당에 정치 공작을 하는 건 중앙정보부의 '고유한' 업무 아니었나. '고유한' 업무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하여튼 그렇게 간주됐는데, 이때는 경호실장 차지철이 그걸 침해하고 자신이 전면에 나섰다. 그러면서 신도환 쪽을 포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건데, 그걸 박정희가 이런 식으로 기자들한테 얘기한 것이다.

물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도 김영삼한테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김재규하고 김영삼은 같은 김녕 김씨였다. 김녕 김씨는 숫자가 얼마 안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서로 단결이 잘된다는 말도 있고 그랬다. 하여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총재 후보에서 사퇴하라고 김영삼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총재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고 해도 선거가 끝나면 100퍼센트 구속합니다", 이런 말까지 하면서 김재규는 김영삼한테 '당신은 절대로 총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프레시안 : 신민당 당수 경쟁,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당수 경쟁은 7파전이었는데 여기서 김대중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은 윤보선과 마찬가지로 김영삼을 지지했다. 김대중은 김재광, 조윤형, 박영록, 이 세 사람이 전당 대회 전날 총재 후보에서 물러서고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야당에서 선명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김영삼과 손을 잡게 된 것이다. 이 사람들의 표를 합하면 140표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거 전날 이 세 후보가 사퇴한 것에 더해, 박정희 쪽 기준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뭐냐 하면 가택 연금 상태였던 김대중이 그날 열린 김영삼 쪽 단합 대회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영삼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인데,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나로서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그때까지 김대중에 대해서는 신문에서도 이름조차 쓰지 못했다. 1978년 12월 김대중이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 후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한 원외의 모 인사', '당외 인사' 또는 '동교동 모 씨', 이런 식으로 이 사람을 호칭했다. 신문에서 이름 석 자를 쓰지 못했다. 물론 모모 기관들에서 그렇게 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김대중이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움직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이걸 몰랐느냐. 그렇지 않다. '김영삼 쪽에서 아서원이라는 중국집에서 단합 대회를 여는데, 거기에 김대중을 참석시킬 예정이다'라는 정보가 당연하게도 중앙정보부에 들어왔다. 중앙정보부의 각 국장들은 김정섭 차장보를 통해 김재규 부장한테 건의했다. 김대중이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영삼 쪽 단합 대회에 김대중이 가세하면 이철승 표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강권을 발동해서라도 김대중의 외출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재규는 이걸 끝내 방치했다. 김재규가 왜 방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해석이 엇갈리는데, 아무튼 이 일 때문에 김재규는 나중에 중앙정보부 사람들한테도 '그 이후의 정치 혼란 상태는 김재규 부장 책임이다', 이런 얘기까지 듣게 된다.

29일 저녁 이철승 쪽은 한일관에서 '이 대표 추대 대연합의 밤' 행사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김영삼 쪽은 아서원에서 '민권의 밤' 행사를 열었다. 아서원은 8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였는데, 1000여 명의 참석자로 홀 주변 복도까지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찼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손을 맞잡고 참석자들 앞에서 손을 높이 흔들었다. 김영삼은 "우리 두 사람의 동지가 7년 만에 함께 연설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민주 회복의 진보이며 눈물겨운 일"이라고 하고는 "이제 이 나라의 민주 회복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증명하는 것, 내일은 위대한 민권의 승리를 다짐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김대중도 이 자리에서 1시간이나 열변을 토했다. 김대중은 "이번에 김 전 총재를 1차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당선시키지 못하면 신민당은 민주 회복의 그날 국민의 돌팔매를 계속 맞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선명 야당 내세운 김영삼, 김대중 도움 받아 이철승에게 역전승

프레시안 : 1971년 대선을 앞두고 1970년에 치러진 후보 경선과 마찬가지로 이때도 극적인 승부가 연출되지 않았나.

서중석 : 운명의 날 5월 30일, 오후 3시 45분에 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로 어느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1차 투표에서 신도환보다 옛날에 신도환계에 속했던 이기택이 5표나 더 많이 얻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박정희 쪽에서는 신도환 표를 100표 정도로 잡고 있었는데 그것보다도 줄어든 수치였다. 거기서도 박정희 쪽이 조금 오산을 한 것이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기 때문에 2차 투표에 들어갔다. 오후 7시에 개표가 완료됐는데 놀랍게도 김영삼 378표, 이철승 367표로 김영삼이 11표 더 많았다. 재석 대의원(751명)의 과반수가 되려면 적어도 376표를 확보해야 했는데, 김영삼은 그것보다 2표를 더 얻어 총재로 당선됐다. 1971년 대선 후보 경선(1970년 9월)에서 이철승의 지원을 받은 김대중에게 역전패했던 김영삼이 이번에는 김대중의 도움을 받아 이철승에게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이렇게 된 큰 요인은 이기택 표가 김영삼 지지로 확 돌아선 것이다. 이기택은 4·19세대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도 민주 회복 대열에 서기로 했다"고 하면서 1차 투표 후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다. 또한 이철승이 2차 투표에서 얻은 표는 1차 투표에서 이철승 자신과 신도환이 얻은 표를 합한 것보다 12표나 적었다. 바람 표가 조직 표를 격파한 것이고, 그것에 더해 일부 표가 이동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무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봤던 김영삼이 근소한 차이로 과반수를 득표해 총재가 됐다. 그전에는 대표 최고위원이었는데, 단일 지도 체제로 바꿨기 때문에 이제 총재로 부르게 된다.

김영삼 총재 당선이 발표되는 순간 마포의 새 신민당사 안과 밖은 승리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만세를 외치며 함성과 박수가 나오는 흥분의 도가니였다고 돼 있다. 김영삼은 당선 연설에서 "오늘은 진실로 위대한 민권의 승리의 날"이라고 하려 했는데, 발음을 잘못 해서 '위대한'을 '이대한', '민권'을 '민껀'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하여튼 김영삼은 "아무리 험한 길을 가더라도 민주 회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울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이야기도 하고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설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말을 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지난날 과거에 다 잘했다고는 보지 않으며 용서를 구합니다. 김영삼은 오늘부터 새로운 김영삼으로 출발합니다"라고 했다. 이게 뭘 얘기한 것이겠나. 김영삼은 1975년 5월 21일 영수 회담에서 박정희가 눈물을 흘리면서 '민주주의 하겠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라', 이렇게 얘기한 것에 홀딱 속아서 그때부터 마치 바보가 된 것처럼 영수 회담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입을 열지 못하고, 그러다가 각목 대회를 거쳐 당수직까지 이철승한테 뺏기지 않았나. 바로 그걸 얘기한 것으로 난 보고 있다. 그 잘못도 인정하고, 그러면서 새 출발을 하겠다는 것을 견고하게 얘기한 것이다.

이날 김영삼은 당선 제일성으로 지난번 총선에서 여당이 득표율에서 야당에 1.1퍼센트포인트 뒤진 만큼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꺼내며 박정희를 윽박질렀다. 이날 전당 대회에서는 윤보선, 김대중을 상임 고문으로 추대했다. 김영삼 쪽을 보강한 것이다. 한 신문은 "(김영삼 당선은) 당외 재야 세력의 지원에 크게 힘입었다"고 썼다. 이건 김대중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전당 대회가 끝난 후 김영삼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동교동 김대중 자택이었다. 라이벌로 계속 싸우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 전당 대회에서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그 후 1979년 10·26 이후에는 또 갈라졌다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1984년 결성) 때에는 다시 손잡고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다시 갈라지지 않나. 이처럼 혼자 힘으로 안 될 것 같으면 손잡고, 혼자 힘으로도 뭔가 될 것 같으면 둘 다 서로 하려고 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였다.


▲ 김영삼과 김대중(1980년 5월). ⓒ연합뉴스

차지철의 거듭된 월권에 중앙정보부는 부글부글

프레시안 : 김영삼 당선 후 유신 권력 내부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5·30 전당 대회에서 공작의 주력을 맡고 있던 사람은 김재규라기보다는 차지철 아니었느냐고 기자들은 썼다. 박정희 대통령 금고에서 엄청난 돈이 차지철 실장한테 갔을 터인데 돈 가진 사람이 더 힘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잘못'되자 차지철이 모든 책임을 김재규한테 떠넘기는 식으로 돼버렸다. 왜냐하면 형식적으로는 대야 공작이 중앙정보부의 임무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김진 기자가 쓴 글에 의하면, 전당 대회가 끝나고 1주일쯤 지나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책임지고 물러나겠다'면서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이봐, 임자 혼자 잘못한 게 아니잖아. 그대로 있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재규는 그 자리에 할 수 없이, 김재규 본인이 그렇게 얘기했는데, 있게 된다. 그렇지만 차지철이 이미 백두진 파동 때 나섰던 것에 더해 5·30 전당 대회 때 또 나선 것에 대해 중앙정보부 쪽은 분노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차지철이 계속 하고 있다는 생각을 중앙정보부로서는 갖게 된다.

아울러 이 5·30 전당 대회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박정희가 그 당시에는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김영삼은 1975년 5·21 영수 회담 바로 그것 때문에도 박정희와 맞서며 굉장히 강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박정희의 눈물 연기에 깜빡 속아 그야말로 바보 취급을 당했던 김영삼은 배신감, 치욕감에 떨면서 오랫동안 지내지 않았나. 이제 김영삼은 '나를 죽이려고 해도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울부짖으며 사자처럼 필사적으로, 무섭게 유신 체제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관련 기사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