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물 테러와 박정희 직속 기관, 그 수상한 관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5> 유신의 몰락, 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폭압의 시대, 노동의 권리와 민주주의 위해 온몸으로 싸운 여성 노동자들

프레시안 : YH 노동자들이 겪은 일은 YH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업체의 민주 노조 구성원들도 피하기 어려웠던 게 당시 현실 아니었나.

서중석 : YH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은 다른 수많은 기업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YH무역 노조는 민주 노조로 불렸는데, 민주 노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민주 노조는 대개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 방적, 방직, 모방, 스웨터, 봉제 산업, 가발, 전기·전자 산업, 식품, 제약 등에 있었는데 대부분 수출 산업이었다. 여기에 민주 노조가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 있었던 민주 노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노조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어용이라는 비판을 받던 기존 노조와 달리 조합 내에 소모임을 만들어 활성화한 것도 노조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소모임 활성화가 말해주듯이 조합원 교육에도 많은 힘을 썼는데, 그 점도 기존의 다른 노조와 크게 다른 점이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이들 민주 노조의 조직이나 형성 과정, 그리고 소모임 등 일상 활동, 투쟁 과정에서 산업선교회, 그리고 '지오세'(JOC)라고 하는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종교계와 지식인들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여러 민주 노조가 임금 인상 투쟁, 노동 조건 향상 투쟁을 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노동 전문가 이원보는 유신 체제에서 단체 교섭권과 단체 행동권이 사실상 금지돼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민주 노조들은 단체 행동을 통해 요구 조건을 쟁취하면서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확보했다고 썼다. 그러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민주 노조들은 권력과 자본, 상급 노조의 끊임없는 탄압에 과감하게 저항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74년 원풍모방 노조의 민주화 투쟁과 회사 재건 투쟁, 1977년 9월에 있었던 유명한 청계피복노조의 노동 교실 사수 투쟁, 그리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노조 수호 투쟁, 1974년 반도상사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투쟁과 임금 인상 투쟁, 그리고 1979년 YH무역 노조의 폐업 반대 투쟁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청계피복노조의 노동 교실 사수 투쟁은 죽음의 투쟁이라고도 불렸다.

이러한 민주 노조들은 상급 노조로부터 극심한 견제, 탄압을 당했다. 민주 노조의 투쟁이 한국노총과 산별 노조에는 위협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 노조는 정부와 회사뿐만 아니라 상급 노조와도 격렬하게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 노조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한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공동으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도 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연대 투쟁, 정치 투쟁을 시도하기도 했다. 여기서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 사례 중 하나인 동일방직 투쟁을 살펴보자.

노조 민주화 후 나체 시위까지…가시밭길 걸어야 했던 동일방직 노동자들

ⓒ오월의봄
프레시안 : 동일방직 투쟁,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동일방직 인천 노조의 투쟁은 1976년에서 1978년까지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동일방직 공장이 다른 곳에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이 동일방직 인천 노조로 돼 있는데, 일반적으로 동일방직 투쟁 하면 동일방직 인천 노조의 투쟁을 가리킨다. 나도 그렇게 사용할 것이다.

동일방직 인천 노조의 투쟁은 국가 권력, 자본, 상급 노조라는 3부가 합작해 엄청나게 벌인 노조 파괴 공작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197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노동 투쟁의 하나로 꼽힌다. 동일방직의 노조 수호 운동을 통해 그 당시 민주 노조가 어떠한 조건에서 노조 활동을 했는지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한 유신 정권과 사주, 상급 노조는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여러 책에서 참 많이 썼지만 여기서는 김정남의 책과 내 제자 장숙경 박사의 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동일방직에서는 1966년경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 그리고 인천산선이라고 불린 인천산업선교회 쪽의 도움을 받으면서 노동자들의 소그룹 운동이 전개됐다. 인천산선이 동일방직에 직접 뛰어들게 된 건 1966년 조화순, 목사로 활동하게 되는 이분이 동일방직에서 6개월간 노동 체험을 하면서부터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성 노조 지부장을 선출하면서 민주 노조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여성 집행부 중심의 민주 노조가 탄생하자 사측은 탄압을 계속했다. 노조원들을 표적으로 삼아 출근 정지, 부서 이동, 사표 강요 등을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막 해고도 하는 식이었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1975년 제2기 여성 지부장으로 이영숙을 선출했다. 그러자 회사 쪽에서는 노조 집행부 교체 공작, 즉 회사에 고분고분한 남자로 지부장을 바꾸려고 하는 공작 또는 민주 노조 파괴 공작을 아주 집요하게 전개했다.

프레시안 : 동일방직 하면 많이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이른바 나체 시위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서중석 : 1976년 7월 민주 노조를 사수하려는 여성 노동자들하고 회사와 한편이 된 남성 직원들 사이에 심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때 경찰은 지부장 이영숙, 총무 이총각을 연행했다. 남성 조합원들이 경영진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기들끼리 대의원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800여 명의 노동자가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곧바로 완전 무장을 한 전투 경찰이 이 노동자들을 에워쌌다. 겁에 질린 여성 노동자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옷을 벗고 저항했는데, 이게 나체 시위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그렇지만 경찰은 사정없이 폭력을 써서 이들을 연행했다.

이와 관련해 노조가 당시 낸 호소문을 보자. "우리는 끌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모두 옷을 벗고 반나체로 저항을 했습니다. 경비와 사원들, 경찰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고 넘어지고 구둣발에 채이고 머리카락이 뽑히고 차에 실려서도 유리창을 깨며 뛰어내리려고 저항을 해봤고 바퀴 밑에 뛰어들어 차를 정지시키려고도 해봤습니다." 이때 72명이 연행되고 50여 명이 충격으로 졸도했고 부상자 70여 명 중 14명이 병원에 입원했다.

있을 수 없는 야만, 똥물 테러…"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친 게 잘못인가요?"

프레시안 :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나체 시위에 대한 폭력보다 더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았나.

서중석 : 1977년 4월에는 이총각 총무를 제3대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했는데 그러면서 시련은 더 커졌다.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가 예정된 이날 새벽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회사 측 남성 노동자들이 투표하러 오는 여성 조합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발랐다. 탈의장에 벗어놓은 옷에도 똥을 발랐다. 그런데도 경찰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총각은 르포 작가 박수정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똥물 뿌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러나 그들이 분명히 폭력 행위를 할 거라고 생각해서 닷새 전에 동네 파출소에다가 보호 신청을 해놨죠. (…) 새벽 5시 50분에 문이 콱 열리더니 남자 대여섯 명이 '너 이년들, 오늘 투표 하나 보자' 그러면서 고무통에 똥을 담아 온 거야. 그때는 고무장갑이 없었으니까 가죽 장갑을 끼고 그냥 뿌려대요. 처음에는 우리한테 정면으로 뿌리지는 못하고 사무 집기에 막 똥을 뿌리는데, 그것도 모르고 현장 노동자들은 투표한다고 달려오는 거예요. 그런 애들한테 '니들이 투표를 해' 하며 똥을 뿌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가서 똥을 바가지째 뒤집어씌웠죠. 거기에는 담당 형사가 두 명 있었고 파출소에서 나온 경찰 두 명, 관리자가 있었는데 다들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했습니다. 섬유본부 조직국장은 조직 선동대장으로 와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데려온 깡패들하고 지켜보고 있었죠." (<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 34쪽) 똥물 테러 현장에서 형사와 경찰은 "야! 이 XX아! 가만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라며 수수방관했다. '편집자')

이 사건에 대해 이 노동자들의 호소문에는 이렇게 돼 있다.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은 없지만 불의와 타협할 수 없었고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똥을 먹는 것까지 참을 수는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눈, 코, 귀, 입속으로 스며드는 똥물을 뱉으며", 그렇게 눈, 코, 귀, 입에까지 똥을 집어넣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부둥켜안고 가슴 아프게 울었습니다. 이 넓고 찬란하다는 사회를 향해 순수한 꿈을 키우는 어린 나이의 저희들이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친 것이 똥을 뒤집어써야 할 만큼 큰 잘못인가요?"

이런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자 노조 측에서는 산업선교회의 조화순한테 이 사실을 알렸다. 산업선교회 관계자들 그리고 김찬국, 공덕귀, 이우정 같은 사람들이 바로 현장에 달려왔다. 다음 날 아침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에 갔을 때 지부 사무실을 점거한 남성 노동자들은 "외부 세력 이총각 물러나라", "산업선교는 물러나라", "때려잡자 조화순! 무찌르자 이총각!" 등의 구호를 써 붙이고 산업선교회와 여성 집행부를 맹렬히 공격했다.

(왜 똥물 테러라는 기괴한 방식으로 일을 저지른 것일까? 역사학자 홍석률은 이렇게 진단했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경제 개발, 수출 전선에 나선 한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천대받는 존재들이었다. 그녀들은 못 배웠고, 어렸으며, 가난했고, 촌뜨기였고, 게다가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갑자기 제대로 선거하는 법을 배워 노조를 장악했다. 당시 국가 권력, 회사, 섬유노조, 남성 노동자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이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갑자기 똑똑해지고, 자신감 있고, 지식의 근본적인 가치와 세상에 대해 자각해가는, 그리하여 세상의 중심에 진입해가는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유신 체제 하의 정치 권력자와 기업주, 섬유노조의 간부들, 남성 노동자들은 현격하게 달라진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두렵기도 하고 열등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녀들이 보여준 지식 그 자체에 대한 열망과 애정, 여기서 열리는 더 근본적인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두려워했기에, 한편으로 시기심이 발동하고 짜증나고 신경질이 나서, 그것이 절대로 보이지 않게 확실하게 가려야 했기에, 똥칠을 했던 것이다." (<역사비평> 2015년 가을호, 249쪽) '편집자')

프레시안 :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솜먼지가 흩날리는 공장에서 눈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스펀지로 털어내면서 매일 작업복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일해야 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겨울에도 25~26도를 오르내리는 한증막 같은 더위도, 귀청 떨어질 것 같은 기계들의 소음도 하루하루 견뎌내며 경제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민주 노조를 중심으로 노동자 의식과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고양하는 순간 이들은 정권과 자본, 그리고 일부 못난 남성 노동자들로부터 불순분자 또는 용서받지 못할 '계집애들'로 낙인찍혔다. 당시 사회가 어떠했는지 뿐만 아니라, 각종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을 지니고 자존감을 높이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로막는 오늘날 현실도 돌아보게 하는 풍경이다. 다시 돌아오면, 똥물 사건에 대해 상급 노조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상급 노조인 섬유노조 측은 즉시 동일방직 지부를 사고 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를 즉각 해산 조치하도록 했다.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는 "산업선교회는 빨갱이 단체이며 동일방직 노조 집행부는 그 새끼", "조화순이와 관련이 있는 자, 신부와 관련이 있는 연놈들은 박살을 내겠다"며 동일방직 노조 집행부 전원을 제명 처분했다.

그러나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1978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에 다시 투쟁을 벌였다. 이때는 5월 1일을 노동절, 메이데이로 한 게 아니라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이라고 했다. 이승만 정권 때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지정해놓고 계속 그날 행사를 열고 있었다. 이것도 정말 어이없는 일인데, 노동자라는 말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근로자 또는 종업원이라고 불러야 했다.

하여튼 3월 10일 이날 근로자의 날 행사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최규하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정동호 한국노총 위원장이 개회사를 읽고 있을 때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현수막을 높이 쳐들고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는 물러가라",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구호를 외쳤다. 한국노총 행동대가 여성 노동자들에게 막 발길질을 하고 머리채를 잡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런 와중에 기념식이 3분간 중단됐고 생방송되던 것이 3번이나 끊겼다.

여성 노동자 31명이 경찰서로 연행돼 구류 25일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바로 명동성당으로 달려갔다. 저녁 미사를 올리는 자리에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지오세'와 산업선교회가 빨갱이인지 아닌지 공식적으로 밝혀달라고 요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어떤 언론사도 이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침묵으로만 대응했을 뿐이다.


▲ 동일방직 노조 성명서. 사진은 똥물 테러 직후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노조 깨부수기' 직접 나선 중앙정보부, 블랙리스트로 밥줄 끊은 섬유노조

프레시안 : 섬유노조와 한국노총, 그리고 언론사들의 그러한 모습은 유신 권력의 태도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대통령 직속 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 권력은 은밀히 조종하는 수준을 넘어 동일방직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경기지부 요원으로서 노사 문제를 담당했던 최종선(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최종길 교수의 동생)은 섬유노조가 중앙정보부 경기지부 차원이 아니라 서울의 본부 차원에서 지시와 조종을 받아 동일방직 노조를 탄압했다고 2001년 증언했다. 이와 관련, 한겨레 2013년 7월 21일 자에 따르면 1978년 2월 초 인천의 한 뒷골목 여관에 들락거리는 수상한 자들에게 최종선이 정체를 묻자 "정말 우리가 누군지 몰라서 묻소? 위(중앙정보부 제2국)에서 다 알고 있는데, 우리는 동일방직 노조를 깨부수러 왔소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에서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를 올렸으나 상부에서는 '경기지부는 빠져라'라는 답이 내려왔고 그 직후 똥물 사건이 발생했다고 최종선은 증언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도 2010년 "동일방직 똥물 테러 사건의 배후에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고 밝혔다. 그에 앞서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 위원회'의 진실 규명 과정에서 동일방직 노조 간부 이총각이 대의원 대회 회의록을 인쇄한 업체 대표와 나눈 대화 내용을 중앙정보부 요원이 정리해 보고한 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개별 기업의 노사 문제에 정권 차원에서 깊이 개입한 것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꾸밈없이 보여준다. 다시 돌아오면, 1978년 '근로자의 날' 투쟁 이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끝이 없었다. 동일방직, 방림방적, 원풍모방 등 5개 업체의 여성 노동자 6명은 1978년 3월 26일 여의도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 예배 때 단상을 점거하고 "우리는 똥은 먹고 살 수 없다", "우리도 인간이다", "노동 3권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구속됐다.

동일방직 사측은 4월 1일 자로 126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4월 1일의 해고 조치에 맞춰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는 전국 사업장에 공문을 보냈다. 해고 노동자 126명의 명단, 주민등록번호, 본적 등을 기재해 통보하고 '이 사람들을 일절 받아주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해고 노동자 중 한 사람은 어떤 병원 식당에서 막일을 하다가 바로 해고됐다.

그전에도 블랙리스트 비슷한 게 있긴 했지만, 해고 노동자들의 밥줄을 끊는 블랙리스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이 동일방직 때부터라고 이야기한다. 1983~1984년에 가면 이런 블랙리스트가 또다시 대거 나오게 된다. (블랙리스트 문제도 중앙정보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는 "1970~1980년대 블랙리스트의 광범위한 작성과 취합, 배포에 경찰, 노동부, 중앙정보부 및 국가안전기획부 등이 개입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블랙리스트는 오랫동안 해고자들을 괴롭혔다. 예컨대 동일방직 출신이라고 밝히면 면접에서 단번에 떨어졌고, 동일방직 출신임을 밝히지 않아도 한두 달이면 블랙리스트로 인해 이력이 드러나 해고됐으며, 때로는 빨갱이라는 욕설을 들으며 질질 끌려 나오는 일도 겪어야 했다. '편집자')

그러한 블랙리스트까지 뿌린 후 김영태는 부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입후보했다. 그러자 그해 5월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15명이 부산에 내려가서 김영태의 죄상을 폭로했는데, 그게 문제가 돼서 그 중 7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된 박근혜 의원에게 동년배의 한 여성이 공개편지를 띄웠다. 편지를 쓴 사람은 YH사건 당시 노조 지부장이던 최순영 민주노동당 부대표, 제목은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박근혜에게>였다. 경제 개발과 노동자의 관계, 고도성장 또는 산업화의 주역, 박정희 신드롬, 아울러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담은 글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박근혜에게>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독자들이 편지 전문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그중 일부를 옮긴다(< > 부분).

<'영애 박근혜'와 '공순이 최순영'에 대한 고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재능과 능력만 있으면 잘살 수 있고, 평등하게 대접받는다'는 기존의 믿음이 틀렸음을 깨닫는 작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 님께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당신이 잘 꾸며진 청와대 뜨락에서 국내외 귀빈을 만나고 '영애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동안, 당신과 같은 또래였던 우리들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기 위해 하루 종일 공장 먼지를 마셔야 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철권을 휘두르며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동안 우리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평생을 노동해야 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군대·경찰·관료·재벌들과 함께 '5개년 경제 계획'을 밀어붙이는 동안 내 아버지 또래의, 내 또래의, 그리고 내 동생 또래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집권 시절 이뤄진 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통계 작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 저는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산업화 세력이라는 표현에 심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청춘을 산업화에 바친 '산업 전사'의 한 사람으로서, 기업과 국가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렸던 근로자의 한 사람으로서, 남의 노동에 기생하지 않고 자기 노동력에 의지해 힘껏 일했던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당신이 말하는 '경제 발전의 주역이 박정희와 3공 세력'이라는 주장에 모멸감을 느낍니다.

한국 사회에 부를 가져다 준 산업화 세력, 경제 발전의 진정한 주역은 님의 아버지나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수구 기득권층이 아니라, 당신들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참혹한 노동 환경에서 묵묵히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화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했던 농민들이었습니다. 자기 몸 하나 믿고 사회 복지 제도 하나 변변치 않은 천민 자본주의를 견뎌냈던 이 땅의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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