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몰아낸 마산, 박정희 사진도 찢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유신의 몰락, 열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부산에서 불붙은 항쟁, 마산으로 번지다

프레시안 : 부마항쟁의 다른 한 축인 마산의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에 실린 글을 중심으로 마산 항쟁을 살펴보자.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일어난 시위는 마산으로 번지게 되는데, 부산에서 통학하는 일부 학생들을 통해 부산 시위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면서 17일부터 경남대가 술렁였다. 17일 밤 학교 곳곳에 "파쇼 정권 타도하자" 등의 격문이 은밀히 나붙었는데, 18일에 등교한 학생들이 이걸 보면서 상당한 자극을 받게 된다.

부산 시위 소식과 격문 등으로 분위기가 술렁술렁하자, 18일 오후 2시 18분경 학교는 휴교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흩어지지 않고 도서관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때 국제개발학과 2학년 학생인 정인권이 학생들한테 '부산에서 저렇게 독재와 맞서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가만있으면 되겠느냐. 우리도 싸우자'고 외치면서 투쟁에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난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문 쪽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부산의 투쟁에서 힌트를 얻었겠지만, 이 학생들도 학교 바깥에서 다시 집결해 계속 싸우기로 결정했다. 일부 학생들이 '오후 5시에 3·15의거탑 앞에 모이자'고 뜻을 모은 다음 다른 학생들한테 그걸 알렸다. 오후 5시쯤 됐을 때 3·15의거탑 주위에 학생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19년 전, 그러니까 1960년에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며 일어섰던 마산 시민들의 의로운 뜻을 기리는 그곳에 모여든 학생들은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연좌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시내로 가자"고 외치면서 시내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돌을 던졌다. 남성동파출소 쪽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고 학생들은 불종거리로 나왔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많은 군중과 만나게 된다. 불종거리, 창동, 부림시장, 오동동 이쪽은 마산의 중심지로 상가 밀집 지역이었다. 그 일대에서 군중이 대거 참여하면서 시위가 커지기 시작했다.

"박정희 물러가라", "대한민국 만세"…부유층에 대한 적대감 드러내기도

ⓒ오월의봄
프레시안 : 부산에서는 어둠이 깔리고 시위 주도권이 학생들로부터 여타 시민들에게 넘어가면서 시위가 더 격렬하게 전개되고 민중 항쟁 양상을 띠었다. 마산에서는 어떠했나.

서중석 : 시위대는 주변 상가나 사무실을 향해 "불 꺼", "불 꺼"라고 외치면서 강제로 소등을 시켰다. 불 켜진 상점, 사무실, 민가에는 사정없이 돌멩이를 던졌다. 그러면서 마산 중심지 일대가 암흑천지로 변했다. (불을 끄게 한 것은 경찰의 '채증'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경찰이 옥상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말이 나온 후 "불 꺼"라는 외침이 시위대에서 터져 나왔다. '편집자')

시위에 참여한 군중에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많았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주축이 된 선봉대는 경찰을 향해 빈 병, 돌멩이, 벽돌 등을 던지며 격렬하게 맞섰다. 경찰도 난폭하게 진압했다.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은 불종거리 근처에서 "박정희는 물러가라", "언론 자유 보장하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 비중은 역시 여기에서도 줄어들고, 행동의 주도권이 이제는 학생의 손을 떠나 일반 군중에게 넘어갔다. 시위대는 "공화당사를 때려 부수자"고 하면서 공화당사 쪽으로 밀려갔다. 어둠 속에서 몰려오는 시위 군중을 본 경찰은 차를 버리고 도망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항쟁 규모는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시위대는 오동동 다리에서 경찰 차량을 부수고 다리 아래에 처박아버렸다. 그러고 나서 공화당사로 향한 시위대는 공화당 경상남도 지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 4~5층까지 유리창을 모두 박살을 내버렸다.

시위 군중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서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수출 자유 지역 후문 앞에 있는 양덕파출소에 진출했다. 경찰은 모두 도망간 상태였다. 청년들은 텅 빈 파출소에 들어가서 집기를 부수고 유리창도 박살을 내버렸다. 대통령 사진이 담긴 액자를 벽에서 떼어낸 다음에 내동댕이쳐 박살을 내버리고 사진을 쭉 찢어버렸다. 그러고 나서 태극기를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주위 군중은 "잘한다", "박정희 물러가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심지어 "박정희를 죽여라"라는 구호도 나왔다. 또한 시위 군중은 산호동파출소를 공격하고 회원동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역전파출소의 유리창 같은 것도 모두 깨버렸다. 그러면서 시내 중심가 여러 곳에서 시위대는 경찰과 계속 공방전을 벌였다.

부림시장 일대는 완전히 철시를 했는데 여기에는 대형 직물 판매 가게들이 밀집해 있었다. 대개 부유층이 소유한 상점들이었다고 하는데, 시위대는 그런 상점들을 공격했다. 마산 쪽은 그야말로, 김재규가 이야기한 대로 민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시위대는 버스나 택시의 경우 그냥 보내줬지만 관용차, 자가용 같은 것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관용차, 자가용에 불이 켜져 있으면 가차 없이 헤드라이트를 부숴버렸고 때로는 차를 뺏기도 했다. 그런 방식으로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샹들리에가 켜진 고급 주택이나 고층 건물에도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쉈다.

프레시안 : 계급적 적대감을 그처럼 분명하게 표출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있었던 다른 여러 항쟁과 비교해볼 때 특이하고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모습이다. 1960년대부터 박정희 정권이 밀어붙인 압축 성장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간 격차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다시 돌아오면, 그 이후 시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오동동파출소를 공격한 시위 군중은 대통령 사진을 전리품인 양 앞세우고 환성을 지르며 불종거리로 돌아왔다. 시위대 중 일부는 동성동에 있던 박종규의 집으로 몰려갔다. 이때 박종규는 공화당 국회의원이자 대한체육회장이었고, 경남대의 사실상 교주라고 볼 수 있었다. (경남대는 1946년 9월 국민대학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1952년 해인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인대는 1960년 4월혁명 당시 다른 대학보다 훨씬 빨리 시위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61년 해인대는 마산대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1970년, 현직 경호실장 박종규는 마산대를 운영하는 삼양학원 이사장에 취임했고 얼마 후 학교 법인 삼양학원을 경남학원으로 바꿨다. 이듬해(1971년)에는 학교 이름도 경남대로 바꿨다. 그러면서 학교 분위기도 달라졌다. 4월혁명 때 시위를 했던 해인대의 전통은 박종규 이사장 취임 후부터 부마항쟁 때까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편 경남대 총장을 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맡았던 박재규는 박종규의 동생이다. '편집자') 그전에는 오랫동안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이후락, 김형욱과 함께 대단한 세력가로 꼽힌 사람이다. 대단한 세력가였기 때문에 사실 마산 쪽 지역 사업도 좀 했다. 수출 자유 공단이 마산에 세워진 것도, 창원 공단이 만들어진 것도 박종규와 관련됐을 것으로 이야기될 정도로 세도가 당당했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시위대는 박정희뿐만 아니라 박종규에 대해서도 강한 분노, 적개심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박종규 집은 2층으로 된 좋은 주택이었는데, 군중의 돌팔매질에 박살이 났다.

시위대는 군중을 계속 새로 흡수하면서 공공건물을 주로 공격했다. 경찰관들은 대개 총을 들고 피신했다. 북마산파출소는 각목, 쇠파이프, 벽돌 등으로 무장한 시위 군중한테 박살이 났다. 북마산파출소를 공격한 사람들 중에는 룸펜 청년이라고 불린, 소위 불량배라고 이야기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돼 있다.

자유당 정권 무너지던 그날 떠올리게 만든 마산 시민들의 반유신 투쟁

프레시안 : 몇 가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상당 부분 4월혁명 당시 마산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서중석 : 밤 9시가 조금 지나서 시위대는 마산시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시청 건너편에 있는 마산세무서에도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먹을 치켜들고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부가세를 없애라"라고 외쳤다. 군중은 세무서를 향해 "잘 먹고 잘살아라"라고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이 얘기를 왜 계속하느냐 하면 뒤에 이야기할 분석에서 이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나왔는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마산경찰서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접전을 벌이게 된다. 시위 군중이 경찰과 한참 동안 공방전을 벌이면서 연좌 농성에 들어가자, 주위 가게에서는 음료수를 박스째 가져와 시위 군중한테 전달하기도 했다. 시위대는 마산경찰서로 계속 돌진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진입 시도는 실패했다. 시위 군중은 "유신 헌법 철폐하라", "박정희는 물러가라", "김영삼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계속 싸웠다.

이때 경찰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마산 경찰이 자체 인원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까 함안, 고성 등 주변 지역 경찰서에서 인원을 지원받은 것이다. 이렇게 경찰이 인원을 늘려 반격을 가할 무렵인 밤 10시를 전후해 가을비가 조금씩 내렸다. 밤 10시 30분경에는 창원에 있던 보병 제39사단 병력 약 1개 대대가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이동해 시내에 투입됐다.

프레시안 : 위수령을 공식적으로 발동한 시점은 20일 정오 아닌가.

서중석 : 마산에 투입된 군대는 밤 11시경 시내 주요 공공건물 경비에 들어갔다. 이때는 위수령 발동 전전날이었는데, 위수령을 내리기 전에 군인들부터 투입한 것이다. 북마산파출소 일대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파출소를 공격한 시위대 중 일부가 남성동파출소 쪽으로 내려가다가 밤 11시경 착검을 하고 장갑차를 앞세우고 행군해오는 군인들하고 마주치는 일도 벌어졌다. 다음 날인 19일 새벽 군인과 경찰은 공동으로 조를 짜서 수색 작업을 했다. 골목골목을 다니며 청년들이 눈에 띄기만 하면 무조건 연행했다.

18일에 이렇게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자 일부 회사에서는 일을 다 끝낸 노동자들을 회사 밖에 못 나가게 하기도 했다. 잔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노동자들의 퇴근을 막고 회사 안에서 강제로 재웠다. 노동자들이 시위대에 합류할 수도 있다고 보고 그렇게 한 것이다. 한편 잔업을 마친 창원 공단의 현대양행 노동자들은 10여 대의 버스를 타고 퇴근하다가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현대양행은 몇 달간이나 계속된 지독한 임금 체불로 노동자들의 큰 불만을 사고 있던 거대한 중화학 기업이었다.

18일 시위는 19일 새벽 3시까지 치열하게 전개됐는데, 시위대는 역전파출소, 마산역을 공격하고 지나가는 장갑차를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4월혁명 당시 마산을 보는 것 같다고 질문에서 얘기했는데, 1960년 3·15 마산의거에 참여했던 한 시민은 "시위 전개 양상이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던 그때 모습과 비슷하다. 그 모습이 떠오른다"고 나중에 말했다.

긴장한 유신 정권, 공수 부대 급파하고 '불순분자 폭동'으로 왜곡

프레시안 : 19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19일 시내에선 대청소가 이뤄졌다. 대검을 꽂은 총을 든 군인들이 시청, 파출소, 방송국 등 공공건물에서 경비를 섰다. 그리고 장갑차와 탱크가 시가지를 누볐다. 19일 오후 5시경에는 공수 부대 1개 여단이 마산에 급파됐다. 18일 새벽 서울 근교에 있던 부대를 포함한 공수 부대 2개 여단을 부산으로 긴급 이동시킨 유신 정권이 그중 1개 여단을 마산으로 보낸 것이다. 이때도 위수령 발동 전이었는데 박정희 명령, 청와대 결정에 따라 급히 마산에 투입됐다.

내무부는 19일부터 마산시, 창원 출장소 일원에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밤 10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로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마산시는 매달 25일에 열리던 반상회를 앞당겨 19일 오후 6시에 일제히 열게 했다. 그리고 반상회 자리에서 '부산 사태, 마산 사태는 불순분자들의 폭동'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정권은 빨갱이몰이라는 익숙한 방식을 활용해 부마항쟁의 배후를 조작하려 했다. 수사관들은 항쟁 과정에서 검거된 사람들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과 관련돼 있다고 자백하라', '북한의 지령을 받지 않았느냐', '간첩과 연계돼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항쟁에 참여했던 한 동아대 학생은 당시 고문을 당하던 중 중앙정보부 간부라고 밝힌 인물로부터 받은 심문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솔직히 이야기하더만. '자네들 순수한 마음으로 했는 거는 안다. 아는데 정부에서 수습을 하기 위해서는 자네들을 갖다가 용공 분자로 몰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이 수습이 된다. 그러니 더 이상 고생하지 마라. 거부해봤자 고생만 하지.' 그리고 여기에서 인제 이북하고 이북 간첩 연계됐다는 이야깁니다." (유신 선포 40년 역사 4단체 연합 학술 대회 자료집 <역사가, '유신 시대'를 평하다> 138쪽)

이처럼 유신 정권은 조작에 필요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남민전과도, 북한과도 상관이 없었다. 당국은 총기 관련 조작도 시도했다. 1979년 10월 20일 마산경찰서장은 18일 밤 불순분자가 인명 살상용 사제 총기를 발사하고 도주했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총소리를 듣지도, 사제 총기를 보지도 못했다고 증언했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부마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이 조사 과정에서 물고문을 비롯한 각종 고문과 성희롱 등을 당했으며, 사제 총기를 사용했다는 마산경찰서장의 발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편집자')

그러나 항쟁의 불길은 가라앉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또다시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창동, 불종거리, 오동동 일대의 상가, 유흥업소는 밤이 되자 셔터를 내리고 철시했다. 그러면서 이 지역은 암흑천지로 변했다. 밤 8시경, 전날 큰 시위가 있었던 창동 네거리 일대에서 시위대가 형성됐다. 이들은 불종거리로 몰려갔다. 전날과 비슷하게 헤드라이트나 실내등을 끄지 않고 정차해 있던 관용차, 자가용은 시위대의 몽둥이와 돌멩이에 박살이 났다. 시위대가 분수 로터리에 도착하자 북마산 방면에서도 많은 군중이 몰려와 합류했다.

경찰과 군인들은 MBC 쪽으로 가는 전신전화국 앞 도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했다. 경찰은 MBC 앞까지 밀려났다. 시위대는 관제 언론의 상징인 MBC를 향해 돌을 던져 건물 3층까지 유리창을 전부 박살내버렸다. 수천 명에 달하는 군중이 이 일대에 운집해 연좌 농성을 벌였다.

시위 군중은 통금 시간이 지난 밤 11시경까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하다가, 경찰과 군인이 합동 총공세를 펴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위 군중은 북마산, 해안 도로, 남성동 일대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부는 계속해서 시위를 벌였다. 북마산, 마산역, 산복 도로, 오동동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군중은 수십 명씩 몰려다니며 파출소, 동사무소 등을 집중적으로 습격했고 경찰은 차를 타고 다니며 진압했다. 20일 새벽까지 시가지 전역에서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전날과 달리 이날 시위에는 대학생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주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실업자, 노동자, 그리고 고등학생들이 많이 가담했다. 19일 새벽과 마찬가지로 군인들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청년들만 보면 무조건 잡아들였다. 그 청년들을 버스에 태우고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다음에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고 갔다.

▲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는 소식을 담은 경향신문 1979년 10월 20일 자 1면. ⓒ경향신문


위수령 이틀 전 군대부터 투입, 요건도 못 갖춘 위수령 발동

프레시안 : 그 후 위수령이 발동되는데 발동 요건을 충족하기는 했나.

서중석 :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시 및 창원 출장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그러니까 사실상 마산 시위가 끝나고 나서 위수령을 발동한 것이다. 위수령은 원래 그 지역 행정 책임자의 요청에 의해 이뤄지게 돼 있는 건데, 김성주 경남 도지사는 병력 요청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조치는 다 박정희가 내린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위수령을 발동하기 전, 그것도 전전날인 18일에 이미 군이 투입되고 19일 오후 5시경에는 부산으로 내려온 공수 부대 2개 여단 중 1개 여단이 마산으로 온 것도 청와대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조갑제의 <유고>에 따르면, 박정희는 부산 지구 계엄사령관인 박찬긍 중장에게 두 번이나 직접 전화를 걸어 "마산은 당신 책임 지역이 아니지만 현지 부대장과 의논해 자네 책임 지역으로 생각하고 도와줘라"라고 말했다. 그 후 박찬긍은 공수 부대 1개 여단을 마산에 급파했다. '편집자')

부산에서도 현지에 있는 정상만 2관구 사령관이 '군을 투입할 필요는 없다. 경찰력만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보고했는데도 유신 정권은 계엄을 선포하지 않았나. 더군다나 마산에서는 시위가 다 끝난 후 위수령을 발동한 꼴이었다. 이건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격이라고 얘기하기도 뭣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위수령을 발동한 건 극단적인 위압을 가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처할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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