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들이 어떻게 알겠나", 국민 깔본 독재자 최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4> 유신의 몰락, 열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김재규가 거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때는 언제인가.

서중석 : 김재규가 언제 거사를 결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부산 항쟁 직후인 1979년 10월 18일 오후 청와대 회동 때였을 수도 있고 그 이후인 23일이나 24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김재규는 대행사가 있을 때 거사하겠다는 생각을 이때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판단된다.

궁정동에서 있었던 이 행사라고 하는 것에는 소행사와 대행사가 있었다. 소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자와 단둘이 만나는 걸 가리키고 대행사는 여자 두어 사람에다가 비서실장,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이 배석한다고 할까, 자리를 같이한 것을 말한다.

이런 행사는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일 때 시작은 됐다고 한다. 육영수가 죽기 전부터 이런 행사가 있었던 것인데, 보안 유지를 위해 궁정동 안가에서 행사를 열게 됐다고 한다. 보안 유지라는 건 박정희가 압구정동 같은 곳에 은밀히 가는 것 때문에 이런저런 말이 생기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한 것일 터이다.

대행사의 날, 거사 계획한 김재규

프레시안 : 10·26 그날 상황을 짚었으면 한다. 김재규는 그날 어떻게 행동했나.

서중석 : 10월 26일과 관련해서는 참 많은 글이 있는데 여기서는 김재홍의 책과 조갑제의 책, 이 두 가지를 많이 활용하려고 한다. 그날 오후 2시 김재규는 얼마 전에 귀국한 재미 동포를 남산의 중앙정보부장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아주 초조한 모습에 표정이 굳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날쯤 대행사가 있을 것으로 김재규가 추측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4시경 차지철로부터 전화가 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차지철이 전화해서 '있다'라고만 얘기하면 그것으로써 알 수 있게 돼 있었다고 한다.

이 전화를 받은 후 김재규는 오후 4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김정섭 중앙정보부 차장보한테 전화해서 궁정동으로 오라고 했다. 김재규가 대행사 때 거사하려고 했다는 점을 이걸 통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오후 4시에 전화를 받고 나서 몇 분 동안 어떠어떠한 식으로 일을 처리할 건가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바로 오후 4시 15분경에 전화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재규가 궁정동에 도착한 시간은,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오기는 하지만, 오후 4시 반경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김재규는 도착하자마자 총기를 꺼내 잘 작동되는가를 시험했다. 그러고 나서 오후 5시 넘어서 비서실장 김계원이 왔다고 한다.

프레시안 : 운명의 날, 박정희는 어떻게 움직였나.

서중석 : 박정희는 이날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김재규가 '나도 가고 싶다'고 차지철한테 얘기했는데, 차지철이 못 오게 했다. 대통령 일행은 준공식에 참석한 후 아산에 있는 도고 온천 관광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 호텔에서 사육하던 노루가 헬기 프로펠러 소리에 놀라서 뛰다가 뭔가에 부딪혀 즉사했다. 이것에 대해 한 기자는 불길하다고 썼다.

삽교천 행사를 마치고 도고 온천 쪽으로 가기 전 대통령은 KBS 송신소에 들렀는데,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성진 문공부 장관이 이때 수행했다. 김성진은 여기서 박정희가 너무 힘이 없어 보였고 얼굴에 죽음의 사자가 머물고 있는 듯했다고 했다. 이 무렵 정치건 경제건 다른 문제건 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날 박정희는 전날(25일) 청와대 새마을 담당 특보라고도 불리고 농촌 담당 특보라고도 불린 박진환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을 수도 있다.

부마항쟁 후 성찰하기는커녕 국민 깔보고 야당 탓만 한 박정희

▲ 10·26을 소재로 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 ⓒMK픽처스
프레시안 : 박진환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서중석 : 박정희가 박진환을 부르더니만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번 사태라는 건 부마항쟁을 말한다. 박진환 고향이 마산이기 때문에 그걸 물어본 것이었다. 박진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민심이 떠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국민들이 새마을운동에도 옛날처럼 열을 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방 관리들이 올리는 새마을 관계 보고나 통계도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뭔가 헛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12월 초에 장충체육관에서 열 새마을 지도자 대회도 박수만 요란하지 김이 빠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박정희로서는 참 김빠지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힘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튼 박정희는 차지철과 함께 이날 오후 6시 5분경 궁정동에 왔다. 그러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이 얘기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가 신민당 일은 어떠냐고 물어보니까 김재규는 "공화당이 발표했기 때문에", 이건 김영삼 제명에 반발해 야당 의원들이 일제히 낸 의원직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는 쪽으로 논의가 이뤄졌다고 여권에서 발표한 걸 가리키는데, "다 틀렸습니다. 암만 해도 당분간 정(운갑) 대행 (체제) 출범이 어렵겠습니다. 주류들이 강경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이렇게 답했다. 그러자 차지철이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이어서 박정희가 이렇게 얘기했다. "부산 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해서 하는 일인데 괜히들 놀라가지고 야단이야. (…) 부산 데모만 하더라도 식당 보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아.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이 계획한 일인데도 괜히 개각이니 뭐니 국회의장을 사퇴시켜야 한다느니 하면서…. 중앙정보부는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여기서 "신민당이 계획한 일"이라는 건 신민당이 부산 항쟁의 배후라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도 1960년 4월혁명 때 똑같은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나. 장면과 민주당이 봉기를 선동했다는,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이승만이 강변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프레시안 : 최고 권력자의 오만함과 그 충복의 무지막지함이 다시 적나라하게 드러난 대화다. 그 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두 여자, 즉 가수 심수봉하고 신모 씨인데 이 사람들이 오후 6시 50분경 술자리에 들어섰다.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다음에 차지철을 지명하자 차지철이 '도라지',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고 한다.

그 무렵 김재규는 방을 나섰다. 연회장을 떠나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가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2층에 가서 준비된 권총을 갖고 나온 다음에 박선호 의전과장, 박흥주 수행 비서관을 세워놓고 '오늘 저녁에 해치우겠다. 방 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나를 도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고 얘기했다. 자신이 가장 믿는 두 사람한테 구체적인 얘기를 처음으로 한 것이다. "각하까지 포함됩니까?" 박선호가 묻자 김재규는 물론 그렇다고 답했다. 박선호는 '경호원이 7명이나 된다. 다음으로 미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얘기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안 된다. 오늘 저녁에 내가 결행한다. 나는 모든 준비를 하고 나와 있다'고 말했다. 사전에, 그러니까 여러 날 전에 결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총으로 권력 움켜쥔 박정희의 18년, 부하의 총에 막을 내리다

프레시안 : 거사의 순간, 상황은 어떠했나. 박정희 최후의 대화 내용도 궁금하다.

서중석 : 김재규는 다시 대행사장으로 갔다. 이때는 다들 윗도리를 벗고 있었다고 하는데, 박정희가 "김영삼이를 구속 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라고 얘기했다. 이때 유혁인은 정무수석이었다. (유혁인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유신 체제에서 6년간 정무수석을 지냈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의 아버지이자,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최금락의 장인이다. '편집자') 그러자 김재규가 "김영삼 총재는 이미 국회의원으로서 면직됐습니다. 사법 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그것으로써 본인을 처벌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을 또 사법 조치까지 하면 일반 국민들한테 같은 건으로 이중 처벌을 하는 인상을 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중앙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딱딱 입건해야지"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정치는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차지철이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한 놈도 없습니다. 언론을 타고 반정부적인 놈들이 선동해서 그러는 거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때 김재규가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오른쪽에 앉아 있던 김계원을 탁 치며 "각하를 똑똑히 모시시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차지철을 쳐다보면서 "버러지 같은 친구"라고 하고는 총을 쐈다. 이어서 박정희에게도 총을 쐈다.

그런데 김재규 총에 맞긴 했지만 치명상을 입진 않았던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갔다. 김재규가 다시 차지철한테 총을 쏘려고 했지만 탄피가 잘 빠지지 않았다. 김재규는 바깥으로 막 뛰어가서 박선호 총을 뺏었다. 그걸 갖고 다시 들어온 김재규는 문갑 뒤에 숨어 있는 차지철한테 총을 쐈다. 그러고 나서 박정희를 확인 사살했다.

프레시안 : 총으로 권력을 움켜쥔 박정희의 독재는 그렇게 부하의 총에 막을 내렸다. 그 후 김재규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김재규는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거기서 김계원과 마주쳤다. 김계원은 김재규가 총을 쏘기 시작한 후 행사장 밖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김재규는 김계원한테 "이제 혁명은 끝났으니까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시오", 이렇게 말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하지만 "혁명은 끝났으니까",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라고만 얘기했을 것 같은데, 하여튼 그렇게 얘기했다고 나온다. 그때 김재규는 굉장히 다급했기 때문에 맨발에 와이셔츠 바람이었다. 신발도 못 찾아 신은 것이다.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하고 김정섭 차장보가 있는 곳으로 급히 가서, 큰일이 났으니까 빨리 차에 타라고 얘기했다. 정승화하고 김정섭, 김재규가 뒷좌석에 앉고 앞좌석에는 박흥주가 탔다. 차는 남산 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승화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김재규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세운 다음 밑으로 뒤집는 시늉을 했다. 정승화가 다시 물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김재규는 "적이 알면 큰일입니다", 이렇게 답했다.

차가 삼일 고가 도로 쪽으로 달리고 있을 때 정승화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중앙정보부로 가고 있다고 김재규가 얘기하자 정승화는 "육본으로 갑시다"라고 얘기했다. 이건 육본 벙커를 가리킨다. 김재규는 망설였다. 그때 박흥주가 "육본으로 가지요"라고 하면서 차는 육본으로 향해 밤 8시 5분경 육본 벙커에 도착했다.

숨 가쁘게 돌아간 10·26의 기나긴 밤

ⓒ오월의봄
프레시안 : 김재규가 이때 육본이 아니라 중앙정보부로 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간 게 치명적인 실수 아니냐는 얘긴데, 옛날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게 본다. 김재규는 거사 얘기를 사전에 남산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믿는, 아주 가까운 몇몇 부하를 동원할 수는 있었지만 중앙정보부라는 거대 조직을 활용해서 거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산에 갔더라도 반드시 상황이 김재규에게 유리하게 전개됐을 것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또 남산은 육본하고 달라서 전국에 있는 군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군 지휘관들을 소집할 수 있는 건 역시 육본 벙커에서 가능하지 않았겠나.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남산에 갔다고 하더라도 김재규가 성공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육본 벙커에 도착한 후 정승화는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해군 참모총장, 공군 참모총장, 연합사 부사령관 같은 사람들한테 벙커로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와 별개로, 총에 맞은 대통령을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간 김계원도 주요 각료 등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맨 먼저 최규하 총리가 왔고 장관들도 연이어 도착했다. 그 후 육본 벙커에 있는 김재규하고 청와대에 있는 김계원이 통화를 하는데, 서로 자기 쪽으로 오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계원 비서실장이 최규하 총리한테 "육본 벙커로 가시죠"라고 해가지고 장관들과 함께 밤 9시 30분쯤 육본 벙커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때까지 최규하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대통령한테 그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몰랐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최규하 총리가 도착하자 김계원이 바로 보고했다. 총리한테는 얘기를 해야 한다고 봤던 건데, "김재규가 잘못 쏜 총탄에", 잘못 쐈다고 한 게 눈에 띄는데,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도 최규하 총리는 못 들은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이건 사람이 신중하다는 것보다도 권력이 어느 쪽으로 쏠릴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다.

국무회의가 26일 밤 11시 50분경 국방부에서 열렸는데 이때도 최규하 총리는 대통령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렇게만 얘기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다수의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10분간 정회하자고 했고, 최규하 총리하고 신현확 부총리 등이 대통령 유해가 안치된 국군 서울 지구 병원에 갔다 온 뒤 국무회의가 속개됐다. 그 자리에서 비상 계엄 선포를 의결했는데,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비상 계엄을 선포했다.

프레시안 : 제주도는 왜 뺀 것인가.

서중석 : 왜 제주도를 제외했느냐 하면, 전국을 계엄 지역으로 선포하면 모든 행정 권한이 계엄사령관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계엄사령관, 즉 육군 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의 지휘 감독을 받을 수 있도록 제주도를 제외한 것이다. 비상 국무회의가 이렇게 계엄을 선포하고 끝난 때는 27일 새벽 3시 45분경이었다.

그러면 김재규는 언제 체포됐느냐. 26일 밤 11시 30분경 김계원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걸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한테 은밀히 얘기했다. 밤 11시 40분경 육군 참모총장은 보안사령관하고 헌병감한테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27일 0시 30분이 조금 지난 때에 김재규를 유인해서 체포했다.

28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11월 3일에는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이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국장으로 치러졌는데, 해방 후 최고 권력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국장을 치른 건 이때가 처음이다. (이승만은 가족장(1965년), 장면은 국민장(1966년)으로 장례를 치렀다. '편집자') 미국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부 장관을 보냈다.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1978년 12월 27일)에 특사를 보내지 않았던 일본은 이때도 정부 인사를 안 보냈다. 다만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이 왔는데, 짙은 안개 때문에 김포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회항했다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영결식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11월 6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박정희 대통령 살해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일부에서는 시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난 시해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본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김재규 등 5명의 사형을 확정했다. 그로부터 나흘 후인 5월 24일, 김재규 등 5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전두환·신군부의 바람과 달리 상고 기각 결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법원 형사 3부에서 이 사건을 맡았으나 의견이 엇갈려 최종적으로 전원 합의체에서 다루게 된다. 그런데 전원 합의체의 판사 14명 중 절반에 가까운 6명이 소수 의견을 냈다. 소수 의견의 핵심은, 살인은 맞지만 내란 목적 살인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4·19를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근거로 '저항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의견,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새 헌법을 만들자는 것이 전 국민의 합의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판사도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판사들은 '유신 헌법 자체가 주권을 찬탈한 범법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고, 김재규 등의 행위는 내란죄 성립 요건인 폭동에 해당하며, 저항권을 인정할 근거가 실정법에 없다'고 주장하며 상고 기각 결정을 내렸다. 소수 의견은 전두환·신군부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전두환·신군부는 소수 의견을 낸 판사들에게 다각도로 압력을 가했다. 소수 의견을 낸 판사들은 결국 강요된 사표를 내거나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어야 했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여든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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