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왜 수하 '기관원'들에게조차 버림받았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9> 유신 체제, 스물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청와대와 백악관은 1960년대 중반 이래 한동안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주요 계기는 한국이 베트남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한미 관계는 그와 달랐다. 삐걱거리는 수준을 넘어 심한 갈등이 심심찮게 겉으로 드러났다. 특히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그러했는데, 그처럼 어긋난 관계의 실상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 중 하나가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아닌가.

서중석 : 박동선 사건에 대해 물었는데 그걸 살펴보자. 박동선 사건 이전에 이미 미국은 한국 정부가 1960년대에 한국에 진출했던 걸프사를 비롯한 기업으로부터 얼마나 심하게, 막대한 정치 자금을 가져갔는지 등의 부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나중에 프레이저 위원회(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 청문회 증언 등을 통해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미국 행정부와 또 다르게 미국 의회에서는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발언이 특히 유신 시대에 와서 많이 나오게 된다. 지난번에 살펴본 조지 맥거번 상원 의원 발언, 그러니까 1976년 9월 15일에 한 "유신 헌법에 관한 국민 투표는 사기극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을 국내 정치 억압에 악용하고 개인 권력 강화에 주력해왔다"는 등의 발언도 그중 하나다.

맥거번 발언 다음 달인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에서 박동선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박동선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그쪽 사교계에 드나들던 중, 1967년 미국 쌀 수입 거래를 대리하는 것이 큰 이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돼 있다. 당시 한국은 미국에서 매년 막대한 쌀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미국 쌀 도입은 그전에도 있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박동선이 1967년부터 이것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나는 본다. 하여튼 그때 박동선은 리처드 해너 하원 의원을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미국 쌀 수입 거래 대리권이라는 아주 큰 이권을 따내는데, 그러면서 박정희를 위한 로비 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게 나중에 문제가 되면서 미국 하원 윤리위원회 청문회가 열리고 그와 별도로 프레이저 청문회도 열리게 된다. 유신 시대 한국은 미국 여론의 단순한 비판 대상이 아니었다. 그 수준을 넘어서 이제는 조사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 언론들도 한국 정부의 '더티(dirty)한' 행위를 집중적으로 폭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박동선 사건 폭로를 계기로 미국 역사상 한국 문제를 가장 많이 다룬다고까지 얘기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무렵 미국의 주요 언론들을 살펴보면 박동선 사건, 박정희 정권의 미국 내 로비 활동 같은 문제를 여러 차례 톱기사라든가 중요 기사로 내보낸 것을 볼 수 있다. 1976년 한 해만 그런 게 아니라 수년 동안 그랬다.

그러면 그 포문을 연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 기사는 어떤 내용이었느냐.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는 '박동선이 박정희 대통령과 협의해 1960년대 후반부터 대미 의회 공작을 계속해왔다. 박동선은 고급 클럽을 운영하고 있고 고급 승용차도 4대나 갖고 있는데, 전 미국 법무부 장관까지 불러서 파티도 했다'고 보도했다. 대미 의회 공작이라는 것의 주요 내용은 한국 측이 미국 정치인, 관료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먹였다는 것인데,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20명 이상의 미국 의원들한테 박동선을 내세워서 1970년대에만 50만~100만 달러의 뇌물을 건넸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 보도를 시작으로 미국의 다른 언론사들도 이 문제를 앞다퉈 다뤘다. 그러면서 리처드 닉슨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워터게이트에 이어 코리아게이트라는 큰 사건이 터지게 된다.

한미 관계 뒤흔든 코리아게이트…유신 정권 무리수가 초래한 망명 시대

프레시안 : 그 무렵 한국 관리들이 외국에 망명하는 일도 연이어 벌어지지 않나. 이 시기에 망명한 관리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서중석 : 박동선 사건에 이어서 또 한 명의 유명한 로비스트인 김한조가 관여한 사건 등도 연달아 폭로되는데, 그러면서 한국 역사상 드물게 망명 시대라는 게 열린다. 저널리스트 이상우의 글, 그리고 김충식 기자의 글을 중심으로 해서 이 부분을 간략히 살펴보자. 1971년 이후 1979년 10·26까지 현직 공무원 중 망명 성격을 띤 근무 이탈자가 수십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 재외 공관에서 근무하다가 현지에서 정치적 망명 등으로 이탈한 공관원이 1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중 8명은 외무부 소속 외교관이고 5명은 이른바 기관원이라고 한다.

먼저 1970년부터 주미 공보관장을 맡고 있던 이재현이 1973년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다. 이 사람은 왜 망명했느냐. 유신 쿠데타 후 외교 활동의 범주를 벗어나는 각종 불법 공작을 서슴지 말라는 지시가 본국에서 내려왔지만, 이재현은 그러한 지시를 이행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이재현은 감시를 받게 되는데, 그런 속에서 사표를 제출하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망명한 것이다. 1977년 10월 이재현은 미국 하원 윤리위원회 청문회에서 재직 중 주미 한국 대사관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로비 활동에서 있었던 돈 거래를 증언하게 된다.

19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한테 가장 큰 상처라고 할까 충격을 준 건 뭐니 뭐니 해도 김형욱의 폭로일 것이다. 프레이저 청문회 같은 데에서 아주 중요한 증언을 연이어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김형욱 실종 사건에서 따로 얘기하도록 하자.

1976년 11월에는 주미 한국 대사관 참사관 김상근이 미국에 망명했다. 김상근은 중앙정보부 요원으로서 워싱턴에 가 있었던 건데, 주된 임무는 교민 대책이었다. 교민들의 반정부적인 움직임을 봉쇄하고 유신 정권 친화적으로 유도하는 임무였다. 그런 가운데 1975년 백설 작전이라는 특별 임무가 떨어졌다. 미국의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 각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을 포섭해 유신 정권 편으로 만들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공작 계획을 백설 작전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재미 교포 김한조가 깊숙이 개입했다. 그렇지만 백설 작전은 실제로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오히려 코리아게이트에서 문제가 돼버렸다. 그러자 정부는 11월 23일 김상근한테 귀국 명령을 내렸다. 그다음 날 김상근은 근무지를 이탈했고, 26일 FBI에 연락해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 이재현과 마찬가지로 김상근 역시 1977년 미국 하원 윤리위원회에 출석하는데, 여기서 백설 작전에 관해 설명하고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는 증언을 하게 된다. 한편 김상근 망명은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해임을 불러왔다. 그러면서 김재규가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이 된다.

손호영은 김형욱 설득에 실패하면서 망명하게 된다. 중앙정보부의 뉴욕 총책임자였던 손호영 참사는 1977년 9월 16일 근무지를 이탈해서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했는데, 이 사실이 당시에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람은 휴스턴에서 근무하다가 1976년 말 뉴욕 총영사관으로 전근됐는데, 어떻게 해서든 김형욱을 귀국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김형욱이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는 것을 막으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렇지만 이건 성공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전전긍긍하다가 1977년 8월 23일 본국으로부터 귀국령이 떨어지니까 그다음 달인 9월에 '1976년 대미 공작 계획서'라는 이름이 붙은 문서를 가지고 망명했다.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공표한 대로 이 문서에는 구체적인 대미 공작 및 로비 활동 계획이 들어 있었다.

이 사람들 말고도 망명자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1973년 5월에는 주미 공보관 직원으로 근무하던 한혁훈이 유신 체제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고 사실상의 망명을 했다. 역시 주미 공보관에서 일한 김성한은 사표를 낸 후 미국 국무성에서 일하면서 유신 체제 반대 활동에도 가담했다. 뉴욕에 있는 유엔 대표부 지역 책임자로 있던 이영인은 귀국 명령을 받자 사표를 내고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했다. 캐나다 주재 한국 대사관의 양영만 영사는 1978년 망명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한 후 캐나다 정부에 영주권을 신청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면서, 이상우 책을 보면 심지어 함병춘 주미 대사한테 미국 측이 간접적으로 망명을 타진하는 상황까지 왔다고 나온다. 그런 속에서 1977년 9월 박동선이 36가지 죄목으로 기소됐고 그로부터 5일 후에는 김한조도 위증죄와 매수 혐의로 기소됐다.

▲ 코리아게이트의 주역 박동선(1978년 1월 11일, 주한 미국 대사관 뜰). ⓒ연합뉴스


국민교육헌장을 정면으로 비판한 '우리의 교육 지표'

프레시안 : 1970년대 후반 국내 상황을 짚었으면 한다. 해직 교수가 곳곳에서 양산된 것도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 아닌가.

서중석 : 긴급 조치 9호 선포 후 두 달이 지난 1975년 7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4대 전시 입법(민방위법, 사회안전법, 방위세법, 교육 관계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교육 관계법 개정안에서 제일 중요한 건 교수 재임용제 부분이었다. 정부는 1976년 2월 28일 교수 재임용제를 통해 총 416명을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때 탈락한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부를 비판하거나 학원 민주화 같은 것을 요구해 이른바 '문제 교수'로 찍힌 사람들이었다. 여기에는 노명식, 한완상, 김윤수, 염무웅 등 여러 명이 포함돼 있었다. 김동길, 김찬국 같은 사람은 그전에 해직됐다.

이렇게 해직 교수를 많이 만들면 반드시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기 마련이다. 1977년 12월 2일 백낙청, 성내운 등 해직 교수 13명의 이름으로 민주 교육 선언이라는 게 발표된다. 12월 16일에는 리영희 교수 필화 사건에 대해 해직 교수 13명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리영희 교수가 낸 책을 문제 삼아 반공법 위반 혐의로 리 교수(구속 기소)뿐만 아니라 발행자인 백낙청 교수(불구속 기소)까지 잡아간 사건인데, 이때 성명서를 발표한 13인은 12월 2일 민주 교육 선언을 발표한 13인과는 구성이 조금 다르다. 물론 겹치는 사람이 많긴 하다. 그러면서 1978년 4월 13일에는 드디어 해직교수협의회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프레시안 : 해직교수협의회 결성 후 '우리의 교육 지표'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주목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1978년 6월 27일 '우리의 교육 지표' 사건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서는 전남대 송기숙 교수가 활동을 많이 했다. 송 교수는 그해 3월경 안병직, 성내운 교수를 만나서 협의하고 그러면서 '이제 해직 교수만으로 성명서를 내지 말고 재직 교수가 중심이 돼서 교육 선언을 발표하자'는 결의를 하게 됐다. 전남대에서 명노근 교수 등 11명의 재직 교수가 여기에 동참했고, 전국적으로도 여러 교수가 동참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처음에는 전국 교수들의 연합 성명을 발표하려 했으나 일부 교수들이 동요하면서 각 학교별로 성명서를 내자는 것으로 방침이 변경되는 속에서, '엄혹한 상황에서 이러다가 발각되지 않겠느냐'고 우려한 연세대 성내운 교수가 외신 기자들에게 전남대 교수들의 '우리의 교육 지표'를 발표했다.

6월 27일 발표된 '우리의 교육 지표'는 특히 국민교육헌장을 강력히 비판한 것으로 주목받았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시기에는 학생, 공무원,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기업체에서도 부분적으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했다. 그런 식으로 교육의 중심에 국민교육헌장을 두고 유신 교육을 시켰다. 그런데도 국민교육헌장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 그때까지 없었다. 부분적으로 비판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없었는데, '우리의 교육 지표'에서 그게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그 부분을 보자. "국민교육헌장은 행정부의 독단적 추진에 의한 그 제정 경위 및 선포 절차 자체가 민주 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강제되고 있는 애국 애족 교육이라는 것도 지난날 세계 역사 속에서 한때 흥하는 듯하다가 망해버린 국가주의 교육상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부국강병과 낡은 권위주의 문화에서 조상의 빛나는 얼을 찾는 것은 잘못이며 민주주의에 굳건히 바탕을 두지 않은 민족 중흥의 구호는 전체주의와 복고주의의 도구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또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와 권력에의 순응을 조장하고 정의로운 인간과 사회를 위한 용기를 소홀히 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교육헌장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아주 잘 지적해서 이 사건이 그렇게 유명하게 됐다. 그러면서 '우리의 교육 지표'에서는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하여 교육의 참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되어야 한다"는 굉장히 중요한 제안을 했다.

'우리의 교육 지표'가 발표되면서 선언에 서명한 11명이 전원 연행, 해임됐고 주모자로 송기숙 교수가 구속됐다. 그러자 발표 이틀 후인 6월 29일 700여 명의 전남대 학생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학생들은 "먹구름 뒤의 푸른 하늘을 보자"고 외치며 양심 교수 석방과 어용 교수 퇴진, 학원 사찰 중지 등을 요구하고 도서관을 점거해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일부 학생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6월 30일에도 전남대 민주 학생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도서관 점거 농성을 계속했다. 조선대에서도 학생들이 들고일어났고 양심범가족협의회나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광주 대교구 사제단 등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 속에서 7월 24일 성내운 전 연세대 교수가 구속됐다.

▲ 1978년 발표된 '우리의 교육 지표'는 국민교육헌장을 정면으로 비판해 주목받았다. 사진은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모습. ⓒ연합뉴스


유신 붕괴의 밑바탕에는 '민주 바람'이 있었다

프레시안 : 10·26으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원인으로 유신 체제 자체의 모순, 거듭된 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심각한 경제 문제 등이 주로 거론된다. 그와 더불어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체포, 고문, 옥살이 등의 고난에 굴하지 않고 유신 독재에 맞선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다. 독립 운동을 배제하고 1945년 해방을 말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한 민주화 운동의 주요 형태 중 하나인 시위 투쟁 상황, 1970년대 후반에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75년 5월 13일 긴급 조치 9호가 발동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김상진 유지를 받들기 위해 5·22 투쟁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대학에 학도호국단이 부활하고 대학 병영화가 한층 더 철통같이 이뤄짐에 따라 대학에서 시위를 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웠다. 캠퍼스에 따라 학내에 사복 체포조가 상주하기도 했다.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는 각 동마다 20여 명의 경찰 체포조가 상주하는 방이 있었다. 사복 체포조는 교정의 잔디밭이나 도서관, 심지어 강의실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 소리라도 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체포하곤 했다. 5분 만에 주동자들이 체포되고 시위가 진압된다고 해서 5분 시위라는 말이 대학가에 있게 된다. '5분 안에 모든 걸 해치워야 한다. 건물 난간이라든가 계단이라든가 특별한 데에 가서 경찰 체포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면서 학생들이 어떻게든 모이게 해 반유신 선언문을 낭독하고, 그래도 5분 정도는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활동이 몇 차례 계속되면서 그런 말이 퍼진 것이다.

대학에서 시위는 못했지만 지하 유인물은 계속해서 배포됐다. 그런 속에서 1976년 10월 15일, 서울대 축제 기간이던 이때 탈춤이 끝났을 때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40명이 연행되고 2명이 제적됐다. 우발적인 면이 있었던 이런 시위를 넘어선, 좀 더 적극적인 시위가 그해 12월 8일 서울대 법대에서 박석운, 이범영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유인물을 배포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시위에 들어갔는데, 즉각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어나는 시위의 하나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 이때 나타났다. 뭐냐 하면, 시위 주동자가 모든 책임을 지고 나머지 활동가는 연루시키지 않는 것을 통해 시위 투쟁으로 조직 전체가 와해되지는 않도록 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때 주동자들이 다 4학년 학생이었는데, 4학년들이 주동자가 되는 모범을 보였다고들 이야기한다.

1977년 3월 28일에도 서울대에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유신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선언문을 낭독하는 도중에 경찰에 바로 진압됐다. 앞에서 5분 시위 이야기도 했지만 이 시기에는 선언문을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1977년 4월이 되면 한신대, 감리교신학대, 이화여대, 연세대, 성균관대, 전북대 같은 데에서 조금조금 시위나 유인물 배포 시도가 이어진다. 이런 유인물 배포 사건은 많은 학교에서 일어났다. 한신대가 이때 참 열심히 했다. 그해 5월에는 한신대에서 신앙 고백서를 배포하며 시위를 시도하다가 4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1977년 10월 7일에는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학과 창설 30주년 심포지엄이 있었는데 이때 또 학생 시위가 전개됐다. 400여 명이 26동 강당에 모여서 시위를 했다. 그래서 이걸 26동 시위라고도 하는데, 무려 23명이 제적당하고 38명이 학사징계를 받았다. 그래도 이때는 상당히 오랫동안 시위를 할 수 있었다. 강당 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데,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시위였다.

프레시안 :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다시 거리로 나아가는 대규모 시위도 이 무렵 부활하지 않나.

서중석 : 규모도 크고 시간도 이제는 5분이 아니라 여러 시간에 걸쳐서 과감한 투쟁을 벌인 시위가 1977년 10월에 드디어 나타나게 된다. 10월 25일 연세대에서 한 학생이 대강당 4층의 폐쇄된 박물관 유리창을 깨고 플래카드를 늘어뜨렸다. 그러자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학생이 구호를 외쳤다. 그러면서 시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시위는 규모가 큰 시위로 전환됐다. 이때 시위에 나선 학생이 2000여 명이라고 나오는 자료도 있고, 다른 책에는 4000여 명으로 기술돼 있다. 하여튼 많은 학생이 백양로를 가득 메우고 결연히 정문으로 돌진했다. 4시간 동안이나 시위를 벌였고 규모도 컸다는 점에서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최대 규모 시위가 이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경찰과 투석전도 벌였는데, 그중 300여 명은 이화여대, 신촌 로터리를 거쳐 서강대까지 진출했다.

이 시위로 400여 명이 연행되고 7명이 구속됐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시위가 5분 만에 끝나지 않게 하려고 학생들이 얼마나 연구를 많이 했겠나. 그리고 시위를 준비한 학생들은 다 각오하지 않았겠나. 올바른 주장을 하다가 감옥소에 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만이 문제였던 건데 폐쇄된 건물에 들어가는 게 아주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경찰이 진입하기가 힘든 곳 아닌가.

닷새 후인 10월 30일에는 이화여대 학생 2500여 명이 유신 반대를 외치면서 농성을 했다. 이처럼 연세대 박물관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에 이어 대학 병영 체제에 또 하나의 큰 구멍을 낸 것이 유명한 11월 11일 서울대 시위다. 이 시위에서는 성동격서라고 할 수 있는 방식이 등장했다. 경찰 눈이 한쪽으로 쫙 쏠리게 한 다음에 실질적으로 시위를 벌이려 한 다른 건물을 점거하는 방식이었는데 아주 성공적으로 잘 이뤄졌다.

이날 낮 12시 55분 서울대 학생회관 식당에서 주동자들이 메가폰을 잡고 유인물을 돌리면서 시위가 시작됐다. 식당조가 이렇게 움직이면서 선언문을 낭독하자 식당 건물 안에 학생들이 가득 들어차고 그 주변 아크로폴리스에도 모여들었다. 2500명이나 되는 학생이 즉각 동참하면서 시위가 커졌다. 그러자 그쪽이 중심지라고 여기고 경찰이 몰려왔는데, 그때 김경택이 도서관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창문을 잠가버렸다. 그걸 계기로 어림잡아 400명 정도가 오후 7시 30분경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 관련자 68명에 대해 제적 28명, 무기정학 34명, 유기 정학 6명, 그야말로 무더기 징계를 했다. 그만큼 규모가 큰 시위였다.

서울 중심부에서 울려 퍼진 '유신 독재 철폐', 광화문 연합 시위

ⓒ오월의봄
프레시안 :
다시 불붙은 유신 반대 시위가 1978년에는 더 퍼져 나가지 않나.

서중석 : 1978년에도 큰 시위가 일어난다. 유인물 배포는 이 시기에 각 대학에서 계속해서 많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1978년 5월에 들어서면서 여러 대학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다. 5월 18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그걸 앞두고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5월 8일에는 서울대생 1500여 명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 일부 학생은 학교 밖 봉천동, 신림동까지 나가서 가두 투쟁을 벌였다. 그다음 날에는 이화여대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 기동대가 교내에 투입됐다. 기동대는 학생들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6월 1일에는 서울대 농대생들이 시위를 했다.

이렇게 시위가 계속 격화됐는데 1977년 연세대 박물관에서 시작된 시위, 서울대 도서관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된 시위에 이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시위로 장식되는 게 1978년 6월 12일 서울대생들의 시위다. 이 시위에서는 성욱이라는 학생이 주동적인 역할을 했는데, 3000명이 넘는 학생이 3시간 동안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관악구청과 신림동 등지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벌이고 오후 4시에 해산했다.

이날 시위는 규모, 지속성에서 모두 주목할 만하지만, 특히 광화문 연합 시위가 바로 이날 시위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날 시위 학생들은 "광화문에서 6월 26일에 만납시다"라고 외쳤다. 6월 26일 오후 6시 세종로 네거리에서 서울의 전 대학생과 시민이 함께 집회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광화문 연합 시위라는 특이한, 새로운 형태의 시위를 창출하게 된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특이했다는 것인가. 이때는 시위 예정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도 쉽지 않은 시기였는데 어떻게 서로 연결해 광화문에 모였는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6월 26일 광화문 연합 시위로 들어가자. 이때쯤 돼서는 학생들의 게릴라전이 더 활발하게 전개된다. 유인물 배포를 학내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버스 같은 걸 타고 거기서 환기통 같은 걸 통해 유인물을 날려 보내서 시내 한복판에 유인물이 나돌게끔 하는 활동도 하면서 '6월 26일에 모이자'는 걸 여기저기 알렸다. 긴급 조치 9호 시대는 어떠한 사실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깜깜이' 시대라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얘기를 들은 사람만이 알 수 있었던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여기저기 알려지고 그랬다.

6월 26일 오후 6시 40분경, 드디어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광화문 일대에서 밤 10시 30분경까지 계속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 박형규 등 민주 인사들, 그리고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학생 등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위는 예고된 시위였다. 그전에는 몰래, 그것도 5분 안에 어떻게든 하려는 시위가 대부분이었는데 이건 예고된 시위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장소가 도심, 그것도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데로 지정되지 않았나. 그 장소에 경찰이 워낙 삼엄하게 깔려 검문검색을 하는 통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지 못했을 터인데도 1000여 명이나 모여 밤늦게까지 시위를 했다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때 경찰이 검문검색을 심하게 하자 남녀가 아베크족 식으로, 그러니까 한 쌍의 연인 같은 모습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또한 도심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시민과 학생을 구별해 격리하기도 어려웠다. 주동자가 누구냐, 이걸 잡아내기도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아사히신문 같은 데서는 이 시위가 "당국의 신경을 곤두세워 일반 시민에게 반정부 활동의 존재를 과시"하는 효과를 거뒀다고 보도했다.

프레시안 : 이례적인 광화문 연합 시위 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 시위 직후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의 교육 지표' 사건으로 교수들이 연행되자 전남대 학생들이 들고일어나고 조선대에서도 호응 투쟁을 했다. 하여튼 광화문 연합 시위를 거치면서 이제 더 많은 유인물이 각 대학에 살포됐다. 2학기에 들어가자 학생 시위 규모가 더욱더 커진다. 9월 13일에는 서울대 학생 2500여 명이 여러 가지 선언문을 배포하면서 3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시위를 했다. 이 중에서 600여 명은 상도동 장승배기에 모여 반정부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런 식으로 시위가 확대됐는데, 6월 12일 서울대 시위 때와 마찬가지로 9월 13일 이날 서울대생들은 10월 17일 유신 독재 타도를 위한 범시민·학생 궐기 대회를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또 연다고 예고했다.

9월 14일에는 고려대에서 3000여 명이 참가하는 큰 시위가 벌어졌다. 긴급 조치 7호 이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고려대에서 드디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경희대, 숙명여대, 서강대, 동국대, 그리고 지방에 있는 원광대 같은 데에서도 9~10월에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그렇게 시위를 곳곳에서 벌이면서 10월 17일 광화문 시위를 성사시키려 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0월 16일부터 재야인사 300여 명을 강제 연금했고 17일 당일에는 전국 경찰력을 차출해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 정말 삼엄한 경계망을 폈다. 그래서 결국 이 시위는 좌절되고 말았다.

10월 17일 연합 시위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유신 반대 투쟁은 계속됐다. 11월 7일에는 경북대에서 2000여 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때 대구 시내로 진출해 파출소 한 곳과 경찰 차량 8대를 파손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 200여 명이 연행되고 그중 7명이 구속됐다.

이 시기에는 구치소 안에서도 투쟁이 많이 벌어졌다. 1978년 3월 1일에는 서울구치소에서 양심범들이 3·1절 시위를 벌였고 4월 19일에는 4·19 기념 옥중 시위를 했다. 5월 13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부재자 투표 문제로 서울구치소 양심범들이 농성을 했다. 부재자 투표를 거부한 양심범들을 교도관들이 심하게 폭행하자 양심범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당일인 5월 18일에는 양심범 150여 명이 서울구치소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2월 12일에 유신 제2기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게 된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즉 국회의원의 3분의 2만 뽑는 선거였다. 그렇지만 이 선거가 진행되면서 유신 체제가 드디어 붕괴로 들어가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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